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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味·樂(휴·미·락)

깨어있는 이성의 상징, 커피

인류 최초의 커피는 ‘에너지 드링크’가 아닌 ‘에너지 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커피 세계사’(탄베 유키히로·황소자리)에 따르면, 오랜 옛날 에티오피아 오로모족 병사들은 전쟁에 나설 때 커피 가루에 동물 기름(버터)을 넣어 둥글게 반죽한 뒤 칼로리와 카페인 보충용으로 휴대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풍습은 '부나 카라'라는 이름의 에티오피아식 독자 커피 이용법으로 남아 있다. 커피는 이렇듯 활기와 이성을 끌어올리는 에너지원으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활약해 왔다.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하던 17세기는 시민사회의 여명기였다. 커피하우스에서 정치적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하며 각성한 시민들이 의회파를 꾸려 왕당파에 승리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커피 잔 사이로 넘쳐나는 정보, 무한하게 뻗어가는 논쟁과 실험은 학문과 산업 발전의 윤활유였다. 파리에서도 카페는 지식인들 간 만남의 장소였다. 다만 정부의 통제를 받은 탓에 런던만큼 자유롭지는 못했다. 당시 프랑스 통치자였던 루이15세는 왕정에 불만을 표하거나 반대 의견을 내는 지식인과 문인들을 색출해 즉각 투옥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깨어있는 시민들은 몇 명씩 ‘몰래’ 모여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곳곳에 들어선 카페에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썩어버린 정치판을 뒤엎을 방도를 궁리했다. 이뿐만 아니다. 빈과 이스탄불에도 정보 교류 및 사교장으로 기능하는 커피하우스가 성행했고, 미국에서도 런던과 비슷한 커피하우스가 유행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역사 속에서 커피하우스가 대유행할 때의 사회 상황은 한결같이 시민사회의 여명기이거나 변혁기였다. 왜 커피가 한국인에게 이토록 사랑받는 건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이제는 명확하게 알 것 같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변혁기를 뜨겁게 겪어 내는 중이다. 그래서, 깨어있는 이성의 상징인 커피가 그토록 필요했던 건 아닐까. 뜨겁게 타오르는 시민운동에서 커피야 한낮 엑스트라겠지만, 이 거리에 커피가 없었다면, 아니 인류사에 커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현실은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커피 내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나의 하루. 일상이라는 소중한 전쟁터에 서기 위해 에너지를 준비한다. 혹은 거리의 카페에서 에너지를 보충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오늘도 싸운다. 맹추위를 견뎌야 할 누군가를 위해 커피값을 선결제하는 마음, 착한 사람들 간 결속을 강화하는 이 커피는, 우리 기억과 역사에 새롭게 각인될 것이다.

초선의원이 말한다

'엄마, 이제 못 보는 거냐'던 그날 밤

지난주 화요일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일정이 조금 일찍 끝나서 쉬려고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왔다. "비상계엄 선포." 이게 무슨 말이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뉴스 클립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여러 의원이 모여 있는 채팅방에 당장 국회로 모여야 한다는 글이 올라왔고, 서둘러 국회로 출발했다. 국회에 도착했을 때, 국회 문은 닫혀 있었고, 경찰들은 모든 문을 막고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국회 담장을 돌면서 넘을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나 경찰이 보초를 서며 지키고 있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초조해졌다. 담을 넘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보좌관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어 나를 국회 담장 위로 밀어 올렸다. 간신히 국회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과정에서 무릎과 발목에 상처를 입었다. 국회 본청 가까이 가니 많은 사람이 모여서 "군대가 들어오려고 해요"라며 가구와 집기로 문 안쪽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쌓인 가구들 틈을 간신히 통과해 본회의장에 들어가니, 다른 의원들도 모여들었다. 유튜브 화면에는 군인들이 본청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모습, 보좌관들이 군인들을 막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나왔다. 의원들은 빨리 계엄해제 표결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위급한 상황이 실감 나면서 불안이 엄습했다. 다행히 표결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계엄은 해제되었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비상상황은 진행 중이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가장 마음에 와닿는 것은 민주주의는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의 관심과 열정과 노력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국회 앞으로 몰려 온 시민과 보좌관들이 계엄해제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국회 담을 넘는 의원들을 돕고, 본청으로 몰려오는 군대를 맨몸으로 맞서서 싸웠다.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도 수많은 시민이 국회를 지키고 매일 밤 집회를 하고 때로는 국회 담벼락 아래에서 노숙까지 하면서 함께 싸우고 있다. 어린 학생부터 어르신,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아빠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친다. 이 거대한 물결에 참여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시민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가 모여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추운 날씨도, 무장한 군인도 이 물결을 막지 못했다. 그날 밤 국회로 가는 길에 초등학생 딸아이가 뉴스를 보며 "혹시 엄마 이제 못 보는 거야" 하고 걱정하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엔 "독재를 막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나고 나서야 아이의 메시지를 다시 읽으며 가슴이 찡했다. 지인들과 광명 주민들이 격려 메시지를 보내주시고, 중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던 옛 친구가 뉴스에서 나를 보았다며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민주주의를 함께 지킬 수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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