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실의 역사 속 와인

로마네 콩티, 와인의 여왕 퐁파두르가 놓쳤다

파리 남서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이 있다. 루이 13세 때에는 사냥용 별장에 불과했으나, 태양왕 루이 14세가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재탄생시킨 베르사유 궁전이다. 후대 루이 15세와 루이 16세까지 이 궁전에서 살았다.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세력을 견제했다. 그 한 방편으로 ‘귀족인증제’를 실시해 귀족들을 베르사유궁으로 불러들였다. 귀족들은 왕이 여는 화려한 파티와 공연을 즐기면서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왕을 태양처럼 떠받들며 왕 가까이 다가가려고 경쟁했다. 왕 곁에는 특별한 여성이 있었다. ‘메트레스 앙 티트르(Maîtresse-en-titre)’로 왕의 공식 정부 혹은 후궁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루이 14세 곁에는 그 유명한 마담 몽테스팡과 마담 멩트농이 있었다. 그녀들을 정면교사 반면교사 하며 아홉 살 때부터 철저히 준비한 또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후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되는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 그녀는 스물셋에 루이 15세의 메트레스 앙 티트르가 된다. 마흔둘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19년 동안 베르사유궁에 살면서, 왕의 연인이자 친구인 동시에 조언자이자 참모로서 권력의 중심에 머물렀다. 이번 칼럼에서는 베르사유 궁전을 배경으로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퐁파두르 부인의 삶을 네 마디의 말과 와인을 통해 전한다. 루이 15세가 퐁파두르 부인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루이 14세가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 루이 15세는 증조할아버지(루이 14세)를 이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국사는 신하에게 맡기고 사냥과 여색을 탐했다. 정략 결혼한 왕비(마리 레슈친스카)와 10남매를 낳았지만 늘 메트레스 앙 티트르와 가까이 지냈다. 특히 자매인 마담 마이, 마담 뱅티미유, 마담 샤토루를 연이어 총애했다. 이야기는 세 자매가 모두 왕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루이 15세는 마담 샤토루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삶의 재미를 잃었다. 하릴없이 투르넴 영지 부근의 세나르 숲으로 사냥을 나서는 날이 많아졌다. 그 영지의 주인은 ‘샤를-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 그는 부유한 부르주아로,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의 후원자이자 ‘친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잔은 공식적으로는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 어머니 루이즈-마들랭 드 라 모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투르넴과 한때 연인이었다. 잔이 아홉 살 때 “이 아이는 왕의 여자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는, 투르넴과 함께 예언이 실현되도록 철저히 준비했다. 잔은 투르넴의 후원을 받아 우르술라 수녀원에서 상류층 여성 교육을 받았다. 최고의 개인 교사에게 성악, 연주, 춤, 미술 등은 물론이고 수학, 문학, 철학과 여러 언어를 배웠다. 빼어난 미모에 교양과 지성을 갖췄으니 사교계 진출만이 남았다. 투르넴은 자신의 조카(샤를 르 노르망 드 에티올르)와 결혼시켜 잔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시기에 상류층 여성의 결혼은 곧 자유를 누리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마담 에티올르가 된 잔은 살롱을 열어 여러 지식인과 교류하며 왕을 만날 기회를 기다렸다. 한편, 상심한 왕 루이 15세는 그날도 세나르 숲으로 사냥에 나섰다. 기회를 노리던 마담 에티올르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사륜마차를 타고 사냥터 주위를 돌았다. 그러고는 마침내 루이 15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황태자의 결혼식 가면무도회에 초대받은 그녀는 이윽고 왕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왕은 그녀에게 이혼을 명하고는 퐁파두르 후작령과 작위를 하사했다. 부르주아에서 귀족이 된 그녀는 마침내 베르사유에 입궁한다. ‘예언’대로 왕의 공식 정부가 된 것이다.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그녀는 늘 노력했다. 사냥은 좋아하지만, 책은 멀리한 왕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연극이나 오페라를 만들어 직접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다. ‘조기 교육’ 덕분인지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퐁파두르는 활동 범위도 넓었다. 드니 디드로, 볼테르,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백과전서의 출판을 도왔다. 그들이 모인 자리에는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 바로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이 함께 마신 토카이다. 토카이는 헝가리에서 생산하는 달콤한 귀부(貴腐) 와인이다. 18세기 상류층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대영제국의 빅토리아여왕이 즐겨 마신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헝가리 독립영웅이 소개한 달콤한 황금빛 와인, 토카이 칼럼 참조) 베르사유궁에 들어가기 전 퐁파두르와 루이 15세가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가 있다. 그때 볼테르가 좋은 문구나 시를 퐁파두르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볼테르는 그녀에게 토카이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혁명의 씨앗이 되었던 계몽주의 사상이 피어나도록 싹틔운 거름이 토카이일지도 모르겠다. 퐁파두르의 말이다. 지성과 미모를 두루 갖춘 그녀는 스타일이 좋아 만인의 관심을 받았다. 한마디로 베르사유궁 유행의 아이콘이었다. 오늘날에도 퐁파두르 스타일이 회자할 정도니까. 하지만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를 두고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숱한 풍문도 돌았다. 팔방에서 쏘아대는 따가운 시선 탓에 퐁파두르는 늘 품위를 지키려 노력해야 했다. 샴페인을 좋아한 데는 그런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샴페인 하우스 모엣 샹동의 기록에 따르면, 1748년부터 베르사유궁에 매년 120병씩 샴페인을 공급했다. 퐁파두르는 여름 별장에 200병을 따로 주문하기도 했다. 그녀의 가슴을 본떠 만들었다는 ‘퐁파두르 샴페인잔’이 있었다고도 하니, 그녀가 샴페인을 좋아했음은 틀림없다. 퐁파두르는 나이가 들면서는 왕과 잠자리를 같이하지는 않았다. 조언자이자 정책 참모로서 역할을 하며 여전히 메트레스 앙 티트르 자리를 지켰다. ‘사슴농장’이라는 곳을 만들어 왕의 채홍사 역할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도자기에도 관심이 많아 ‘세브르 도자기’가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르사유궁의 인테리어에 참여했음은 물론 로코코 화가로 알려진 프랑수아 부셰와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 장 마르크 나티에 등 예술가들도 후원했다. 그들은 퐁파두르의 초상화를 남겼다. 물론 베르사유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퐁파두르는 여름 별장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권력의 무상함과 고단함을 달래지 않았을까. 허울뿐인 품위를, 베르사유를 잃지 않기 위해. 니콜라 알렉산드르 드 세귀르 후작의 말이다. 루이 15세가 “경의 단추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구려”라고 하자 내놓은 대답이라 한다. 18세기 베르사유궁에서는 근방인 샹파뉴와 부르고뉴의 와인을 주로 마셨다. 보르도는 거리가 먼 데다 그곳의 와인은 영국인 입맛에 더 맞았던 탓이다. 그런데 보르도 지역에 있는 세귀르 후작의 영지에서 만든 라피트 와인만은 베르사유궁에 소개되었다. 과거 리슐리외 공작(리슐리외 추기경의 손자)이 기옌의 총독으로 있을 때 라피트 와인을 처방받아 지병을 고쳤고, 왕에게 라피트를 소개한 덕분이었다. 당시 왕이 리슐리외 공작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데, 비결이 뭐요?” 공작은 라피트 와인 덕분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세귀르 후작은 금수저 중의 금수저다. 아버지에게 라피트와 칼롱 세귀르를, 어머니에게 라투르를 상속받았다. 이어 무통도 매입했다. 선대에는 오브리옹 영지도 소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세귀르 후작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라피트, 라투르, 무통을 가지고 있지만 내 마음은 칼롱 세귀르에 있다.” 그가 언급한 와인은 모두 1855년 파리박람회 때 그랑크뤼클라세에 올랐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는 라피트 와인을 매우 좋아했다. 퐁파두르는 보르도 최고 부자 세귀르 후작을 연회에 자주 초대했고, 루이 15세는 그를 ‘포도 왕자’라 불렀다. 생비방 수도원 소유였던 ‘라 로마네’ 포도밭은 부르고뉴 최고의 밭이다. 이 밭이 시장에 나오자 콩티 왕자(루이 프랑수아 드 부르봉)와 퐁파두르 부인이 서로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역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콩티 왕자는 루이 15세의 친척으로 왕과 가까웠지만, 퐁파두르의 계략 탓에 왕의 신임을 잃었다. 이 둘이 최고의 밭을 놓고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다. ‘콩티’라는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결국 이 밭은 콩티 왕자가 매입한다. 오늘날 최고의 와인 로마네 콩티가 이렇게 탄생했다. 그 뒤부터 퐁파두르는 베르사유궁 연회에 ‘콩티 왕자네’ 와인 대신 코르통 레드 와인과 알자스 화이트 와인, 보르도 생테밀리옹과 프롱삭 와인, 샴페인을 주로 내놓았다고 한다. 퐁파두르가 그토록 욕심내던 로마네 콩티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25년 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때 몰수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퐁파두르는 외교와 정치에도 간여했다. 나폴레옹을 배출한 왕립사관학교를 최초로 설립했다. 7년 전쟁에도 입김을 넣었으나 프랑스는 전쟁에 패하고 말았다. 퐁파두르는 폐렴을 앓다가 42세에 베르사유궁에서 세상을 떴다. 하지만 베르사유궁은 그녀를 품을 수 없었다. 왕족이 아닌 탓에 그의 시신은 조용히 베르사유궁 밖으로 내보내졌다고 한다. 루이 15세는 슬픔에 잠겼다. 세나르 숲에서 마담 퐁파두르에게 마음을 빼앗겼듯, 거울의 방에서 마담 뒤바리를 만나기 전까지. 볼테르는 ‘그녀는 항상 정의롭고 사람들을 도와주길 좋아했으며 진정한 철학자였다’고 애도했다. 디드로는 ‘그녀는 사치와 낭비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고 7년 전쟁을 패배로 이끌었다’며 비판했다. 정적이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이 기르는 개 이름을 퐁파두르라 이름 붙여 그녀를 조롱했다. 퐁파두르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도 엇갈렸고 지금도 분분하다. 와인의 역사에서 퐁파두르 부인의 삶을 보자면, 그야말로 최고의 와인을 향해 달려간 삶이었다. 최고의 권력이 있는 자리, 그 곁에서 퐁파두르는 잔에 담긴 와인을 마시면서 권력의 단맛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예술혁명의 두 얼굴,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의 다른 이름인가? 대답은 ‘예’ 그리고 ‘아니요’다. 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서로를 부정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이 답변에 과학적 논리를 제공한다. 관찰자에 따라 모든 해석이 가능하며 따라서 모든 해석은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믿는 것이 좋다. 유기적인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독선과 아집(我執)이 만들어내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예술 분야의 혁신적 작가나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원래 전쟁터의 전위병을 뜻하는 군사 용어로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났으나, 19세기부터 정치나 사회개혁의 급진파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 예술 용어로 정착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다중적이다. 보통명사로 쓰이면 혁명적 예술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 경우 ‘프랑스 미술의 3대 혁명’이라 불리는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모두가 아방가르드의 영역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대문자 A로 시작되는 고유명사로 쓰일 때 아방가르드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예술 운동을 지시하는 의미가 된다. 유럽의 다다와 초현실주의, 러시아의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따위의 미술 운동들이 이에 속한다. 한편 모더니즘(modernisme)은 근대의 예술 사조로서 새로움을 덕목으로 삼는 예술 경향의 총칭이다. 근대의 상한점에 대해서는 학문 분야마다 차이가 있으나 전통과 권위에 반대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미술에 있어 모더니즘은 1860년대 중반의 인상주의에서 시작되어 후기인상주의→야수주의→표현주의→입체주의→추상주의→1960년대 중반의 미니멀아트로 이어지는 약 100년간의 미술 흐름을 나타낸다. 모방론에 근거한 고전주의 이념과 형식에 도전하고 추상주의를 거쳐 물자체로 환원되는 역사적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 패러다임이란 진주알을 꿰어놓은 실처럼 연속성을 유지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패러다임의 고수라는 대목에서 아방가르드와 다른 점이 발견된다.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차이는 지속과 단절의 메커니즘에 있다. 모더니스트들이 혁신 속에서도 변증법적 패러다임을 유지하는 태도를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예술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파괴하는데 천착했다. 그런 점에서 유럽의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진정한 아방가르드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경우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유럽 모더니즘과 러시아 전통미술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실험적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절대주의와 구성주의를 비롯해 신원시주의, 광선주의, 입체미래주의, 추상미술 등의 경향들은 모더니즘 혁명과도 연대하고 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바실리 칸딘스키는 아방가르드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의 주인공들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혁명 시대의 산물이었다. 말레비치, 칸딘스키, 블라디미르 타틀린, 미하일 라리오노프, 나탈리야 곤차로바 등의 러시아 작가들은 서유럽에서 유입된 모더니즘 미술양식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을 위한 동력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 러시아 고유의 전통인 치열한 삶의 리얼리즘은 전에 없는 미술 경향들을 탄생시켰다. 1915년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선언’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선 1910년 유럽에 나가 있던 칸딘스키는 ‘최초의 추상화’를 제작함으로써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유럽 모더니즘을 융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20세기 예술혁명의 두 얼굴이다. 러시아인 말레비치와 칸딘스키가 주도했던 혁명들이었다. 이 두 예술 운동 사이의 동질성과 이질성, 그리고 그 속성들 사이에 흐르는 지속과 단절의 역설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20세기와 그 이후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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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직관... 수도권 야구장 모처럼 활기

국내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70%를 넘어서면서 단계적 일상 회복이 임박한 다가온 가운데, 24일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관중들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18일부터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적용 중인 수도권에서도 접종 완료자에 한해 실외 경기장은 수용인원의 30%, 실내 경기장은 20%까지 관중 입장을 허용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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