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고마워요 대장금" 우즈벡 영부인이 이영애에게 친서 보낸 까닭

2020.07.13 12:00

지난달 24일 배우 이영애씨 앞으로 한 친서가 발송됐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지로아트 미르지요예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영부인이다. 12일 본보가 단독으로 입수한 친서에 따르면 미르지요예바 영부인은 "이영애님께서 보여주는 우즈벡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애정에 매번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라며 "이영애님께서 몸소 실천하고 계신 선행은 우리에게 가슴 깊은 곳까지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우즈벡과 한국은 선량함ㆍ개방성ㆍ손님에 대한 환대ㆍ전통 계승 등 공통점이 많다"며 "우즈벡 홍보대사로 활동해주기를 학수고대한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웬 친서인가 싶지만 사연이 있다. 이영애씨 측이 2017년 국내에서 방영된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사임당)의 판권을 우즈베키스탄에 무료로 기증한 것이다. 해당 판권은 중국에 가장 비싸게 판매됐는데, 중국에 팔린 금액만 1,300만달러(약 155억2,59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그룹에이트) 입장에서는 수 억원으로 예상되는 판권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이씨 측에서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쉽지 않은 결정을 하게 됐다고 이씨 소속사 굳피플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중앙아시아에서도 한류 열풍과 함께 K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데도 콘텐츠 가격이 점점 올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라며 “대장금으로 큰 사랑을 받은 입장에서 이들 국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전했다. 특히 우즈벡에만 약 20만명 중앙아시아 전체에는 60만명 가까운 고려인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K콘텐츠는 조상의 자취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를 위해 이씨 측은 현지 더빙을 포함한 편집ㆍ방송 신호 송출 비용까지 부담하기도 했는데, 약 1~2억원에 달하는 금액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미르지요예바 영부인도 친서에서 "방영권을 우즈벡에 기증해주셨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다"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아름다운 행보는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의미를 갖는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우즈베키스탄의 '이영애 사랑'은 남다르다. 한국에서 2003~2004년까지 방영된 '대장금'의 경우 현지에서 시청률은 97%까지 기록했었다. 이후 우즈벡에서는 이듬해부터 2, 3년 간격으로 세 차례 방송됐다. 총 30부작인 사임당은 우즈베키스탄에서 4회까지 방영됐다(6일 기준).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국영방송에서 황금시간대인 오후 5~8시까지 방영된다. 현재까지 공식 시청률은 집계되지 않았으나 약 70~80%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전언이다. 김창건 주한우즈베키스탄 명예영사는 "대장금 때도 그렇고 이번에 사임당도 마찬가지로 TV 방영 시간만 되면 길거리가 한적해진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나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며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사임당은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우즈벡은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400명을 육박하는 상황이다.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내외는 특히나 이영애씨의 열렬한 팬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017년 11월 우즈벡 대통령 내외가 청와대를 방문했을 당시 이씨도 초청받아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특히나 이씨가 모델로 활동하는 한방화장품까지도 현지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김 명예영사는 전했다.  이 같은 교류는 개인적 친분을 넘어서서 두 나라가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는 평가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우즈벡인들은 약 7만5,000명에 달한다. 앞으로 1, 2년 사이에는 10만명까지 이를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김 명예영사는 "우즈벡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100% 경영권을 인정하는 등 투자 유치를 지원해주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포스트차이나'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초에는 우즈벡 정부가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며 한국 정부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 최재욱ㆍ윤승주 고려대 교수들이 각각 3월과 4월 현지에서 자문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에 우즈벡 정부는 이들 전문가의 귀국을 돕기 위해 직항 전세기를 두 차례 띄우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 우즈벡과의 친선은 중앙아시아 권역으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즈벡은 신북방 주요권역인 중앙아시아 5개국(투르크메니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카자흐스탄ㆍ타지키스탄ㆍ키르키즈스탄) 중 인구가 가장 많고, 최근 교역규모가 급상승하는 나라다. 실제로 대장금의 시청률은 이 5개국 모두에서 90%를 넘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 소속사 관계자는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에도 방영권을 기부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이영애씨가 영부인급의 친서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씨는 2018년 3월에도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전 스리랑카 대통령 영부인인 자얀티 시리세나의 친서를받기도 했다. 2017년 홍수와 산사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스리랑카에 5만달러를 기부한 데 따른 감사의 표시다. 스리랑카는 우즈벡 못지 않게 한류 바람이 강한 곳으로 꼽힌다.

'반도' 강동원 " '꽃미남' 넘어 배우 인생 2막 준비해야죠"

“요즘이 데뷔 이후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 인생 2막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놓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이 된 배우 강동원(39)은 “진짜 성인으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청춘 스타에서 성인 배우로 도약하는 시기에 들어섰다는 자각인 걸까. 영화 ‘반도’ 개봉을 앞두고 지난 10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나이가 들면서도 막연히 ‘난 아직 어려’라고 생각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제 더 이상 어리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강동원은 ‘인랑’ 이후 2년 만에 '반도'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2016년 전국 1,156만 관객을 모은 흥행작 ‘부산행’(2016)의 속편이다. 좀비떼와 사투를 통해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려낸 전작과 달리, ‘반도’는 할리우드 영화 ‘매드맥스’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 세계)’를 그려낸 액션 스릴러다. 폐허 속에서 맞부딪히는 인간성과 야만성, 그리고 생존자들의 희망을 그려낸다. 강동원이 맡은 '정석'은 군인 출신으로 좀비 바이러스에 누나와 조카를 잃고 홍콩에서 비루한 삶을 살아가던 인물. 거액의 현금을 실은 트럭을 가져오면 절반을 주겠다는 범죄조직의 제안을 받고 다시 한반도로 향한 그는 두 딸 준이(이레) 유진(이예원)을 키우며 살아가는 민정(이정현)과 함께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선다. 줄거리만 보면 서부극의 총잡이, 영웅적 용병 같지만 '반도'에서 정석은 조력자에 가깝다. 극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지만 타인의 의지에 따라 묵묵히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강동원도 “‘인랑’의 임종경도 그랬지만 정석은 아무런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명령이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이고 답답한 캐릭터”라며 “애초부터 정석을 돋보이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강동원이 말하는 '배우 인생  2막'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자신의 캐릭터보다 전체를 생각해 절제하는 연기. 조연 같은 주연. “정석이 딱히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죠. 배우로서 연기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오히려 하지 않는 것도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장치로서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영화가 돋보일지를 우선 생각하며 연기에 임했어요.” 2016년 1,0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던 ‘검사외전’ 이후 ‘골든슬럼버’와 ‘인랑’의 잇단 흥행 실패로 잠시 슬럼프를 겪었던 그가 다시 티켓 파워를 입증할지도 관심사다. 그는 “주연배우로서 흥행이 안 되면 책임감이 무겁다”면서도 “흥행이 잘 되겠다 싶은 작품이라도 흥미가 안 생기면 선택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강동원은 소녀팬들을 거느리는 꽃미남 스타에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다. 민정의 딸을 연기한 이예원이 9일 언론ㆍ배급 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마치 오래 전 옛 일이라는 듯 “강동원이 예전엔 엄청 핫했다고 하더라”고 하기도 했다. 정작 강동원은 "맞는 말"이라며 웃었다.  “예원이 말대로 제가 언제까지 핫하겠어요. 벌써 마흔이고 10년 지나면 쉰인데요. 늘 생각하고 있던 거였죠. 그래도 간담회 끝나고는 예원이에게 ‘네가 나를 여러 번 죽이는구나’라고 말하긴 했죠.(웃음)”

고아들을 품은 티베트 '고아 소녀'

1959년 3월 10일 시작된 티베트 독립 봉기와 20~24일의 ‘라싸 교전’으로  티베트 자치정부가 결딴났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했고, 승려 등 티베트인 8만 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전’이란 말은 사실 적절치 않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저지른 사실상 제노사이드였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교전’ 이후 지속된 학살까지 그해 숨진 사람만 최소 50만 명이고, 더 많은 이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또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세 격변기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오지의 척박함 덕에 누려 온 폭넓은 자치 권한도 함께 사라졌다. 국토 약 절반이 인근 칭하이, 간쑤, 쓰촨, 윈난 성에 편입됐고, 남은 영토도 이름만 ‘티베트 자치구(TAR)’일 뿐, 베이징 중앙권력에 장악 당했다. 티베트는 홍콩과 더불어 ‘반 중국 분리독립 정서’가 거센, '잠재적 소요지역'이어서, 수도 라싸는 지금도 “CCTV로 빠짐없이 감시 당하고 사원에는 중국 군인들이 가짜 승려로 들어가 감시”하며 “누구 하나 자유를 이야기하면 연좌제로 마을 전체가 처벌 받는” 곳이다. 그 현실을 고발하며 2009~18년 10년 사이 152명이 분신해 130명이 숨졌다. 59년의 난리통에 수만 명이 히말라야 설산을 보름 넘게 넘어 부탄과 미얀마, 인도로 피신했다. 7세 고아 소녀 텐돌 걀주르(Tendol Gyalzur)도 그 난민 행렬 안에 있었다. 그는 독일의 한 고아원에서 성장해 간호사가 됐고, 결혼 후 스위스에 정착했다가 1993년 티베트로 돌아가 고아원을 설립했다. 어떤 과거는 각자의 마음 속에 영원한 현재로 박제된다. 그는 관광객들에게 손을 벌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티베트 아이들에게서 유년의 자신을 보았다. 유럽서 성장한 스위스 국적의 티베트 난민 여성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당국의 고아원 설립 허가를 얻는 건 히말라야를 넘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었다. 해외 후원금으로 운영될 보육ㆍ교육 시설인 만큼 가뜩이나 불온한 지역에 분열의 씨앗을 퍼뜨릴 수도 있었다. 걀주르는 부모형제의 원수인 중국 당국의 환심을 사야 했고, 협력도 해야 했다. 그런 그를 언짢아 한 동포들이 적지 않았고, ‘민족의 배신자(blood traitor)’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훗날 걀주르는 “내 종교는 아이들의 코를 풀어주는 것이고, 내 사상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건 진심을 몰라주는 동포들을 향한, 에두른 항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93년부터 2018년까지 만 25년 동안 300여 명의 아이들을 혈통 종교 피부색 안 가리고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고 독립시켰다.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기억해 ‘이름’으로 불렀던 티베트의 가장(家長) 텐돌 걀주르가 5월 3일 코비드19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59년은 티베트 현대사뿐 아니라 걀주르 개인사에서도 거대한 분기점이자 단절이었다. 그는 59년 이전을- 부모 이름도, 자기 생년월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자료와 기사는 그의 부모와 오빠가 난리통에 숨졌다고 소개했지만, 어떤 기사는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피난 행렬에 운 좋게 끼어 눈 덮인 산맥을 넘는 동안 한 낯선 여성이 자기를 챙겨주었다는 것, 잠깐씩 노새 잔등에 얹혀 가기도 했다는 것, 늘 배고프고 힘들었다는 것은 잊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고된 피난길에도 가족과 함께 있는 또래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2주 넘게 걸어 인도 북부 다람살라의 한 고아원에 수용된 그는 3년 뒤 달라이 라마의 주선으로 또래 11명과 함께 독일로 입양됐다. 난민 아이들만 집단 수용해 교육시키는, 은퇴한 의사 부부가 운영하던 독일 남부 콘스탄츠(Konstanz)의 ‘루돌프 슈타이너 스쿨’ 이었다. 27세의 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가 입양 가는 아이들에 했다는 당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꽃씨가 되어 훗날  티베트에서 꽃을 피우라”- 도 그는 잊지 않았다. 난민ㆍ이민 당국은 걀주르의 젖니를 세어 나이를 추정, 그의 여권에 ‘1951년 12월 2일 생’이라 기록했다. 그의 독일행은 고아여서 얻은, 어쩌면 행운이었지만, 또 한 번의 생의 단절이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진 낯선 환경. 언어와 종교와 문화의 혼란. 물론 차별도 그를 주눅들게 했다. 당시 서방 세계는 난민ㆍ이민에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공산권 난민은 심지어 환대했다. 그들은 체제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간호대학을 나와 외과 간호사로 일하던 걀주르는 70년대 초 티벳을 탈출해 스위스 국적을 얻은 14년 연상의 전기 기술자 로상(Losang)을 만나 72년 결혼했다. 부부는 스위스 취리히 호숫가 마을 요나(Jona)에 정착, 73년과 75년 두 아들 송첸(Songtsen)과 가덴(Ghaden)을 낳았다. 걀주르가 혼자 티베트로 떠나 고아원을 짓고 새 삶을 시작하던 93년, 그의 두 아이는 어머니를 선뜻 보내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걀주르는 3년 전 관광차 라싸를 방문했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을 처음 보게 됐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가, 막아서는 주인과 싸우다시피 해서 밥을 먹일 수 있었다고 했다. 훗날 그는 “내 생애 처음, 그 순간 비로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뭔지 깨달았다”고, “세상 어디나 고아들이 있겠지만, 내가 티베트인인 만큼 그곳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설득하고, 친지 등에게 계획을 알려 도움을 얻고, 중국 중앙ㆍ지방 정부와 협상하고, 관이 요구하는 온갖 서류들을 만들어 제출하고, 땅을 찾고 건물을 짓는 일들을 그는 거의 혼자 해냈다. 통장 깬 돈 2만 8,000 달러와 남편 연금, 이리저리 기부 받은 돈으로 그는 93년 라싸 변두리(Toelung)에 첫 고아원을 지었다. 그리고 3년 전 안면을 익힌 아이들까지 고아 6명을 첫 식구로 맞이했다. 티베트 문화에서는 다른 씨족의 아이들을 거두는 일 자체가 무척 생경한 일이라고 한다. 관광 수입에 재정을 크게 의존해 온 티베트 정부로서는, 겉으론 까탈을 부려도 속으론 걀주르가 고마웠을지 모른다. 경찰 등 공무원들은 거리의 아이들을 보이는 족족 고아원으로 데려왔다. 식구는 이내 50명이 넘는 대가족으로 커졌다. 중국 정부의 ‘티베트개발재단(TDF, 87년 설립)’이 운영비 일부를 보태주기 시작했다. 4년 뒤 걀주르가 남편 고향인 윈난성 쿤룬산맥의 세계적 관광지 ‘샹그리라(옛 지명 중뎬)’에 두 번째 고아원을 지을 땐 지방 정부가 시설 부지를 무상 제공했다. 걀주르는 2002년 쓰촨성 리탕현에 기숙사를 지어 유목민 아이들의 교육 사업도 후원했다. 10년 뒤인 2003년 세 곳에 깃들인 아이들은 183명(여아 81명)으로 불어났다. 걀주르의 고아원에는 교육시설이 없었다. 예산도 빠듯하고 당국의 통제ㆍ감독 문제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다니게 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섞이게 하자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대신 6세 미만 아이들에게는 중국어와 영어, 티베트어를 가르쳤고, 전통무용 등 티베트 문화 교육은 병행했다. 국경 인근인 샹그리라 고아원에선 한족을 비롯해 7개 민족 아이들이 한 가족을 이뤄 지냈다. 그는 “혈통 피부색 종교 그 무엇도 우리 식구가 되는 데 변수가 안 된다. 보호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면 다 된다”고 말했다. 위탁아동 시설의 일반적 관행과 달리, 걀주르는 아이들을 입양 보내지도, 나이가 찼다고 강제로 내보내지도 않았다. 자기처럼 아이들이 또 한 번 삶의 단절을 겪게 하기 싫어서였다. 아이들은 서로를 언니 오빠라 부르며 설거지 등 가사를 나눠 했고, 나이가 찬 아이들은 보모나 교사로 일하고, 더러는 유학을 갔고,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오기도 했다. 그런 크고 작고 기쁘고 슬픈 소식들을 걀주르는 매년 보고서에, 당연히 아이들의 실명을 담아, 당국과 후원자들에게 알렸다. 20주년이던 2013년 걀탕 고아원 보고서의 마지막 항목은 “우리 시설의 가장 몸집 작은 식구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숨져 모두 함께 애도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터를 잡고, 신뢰를 얻게 되면서 지방 정부들은 보모 등 시설 인력의 급여 일부와 아이들의 옷, 음식, 교통비 등을 지원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걀주르는 한해 운영비로 약 28만 달러가 든다고 밝혔다. 그 돈을 모으느라 그는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등지의 시민들과 후원기관에 상시적으로 손을 벌려야 했다. 2013년 보고서에 그는 ‘양호실을 짓고 양호교사를 채용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썼다. 여행 전문지 ‘론리플래닛’은 티베트 가이드북에 샹그리라의 고아원을 ‘현지 문화를 알고 티베트인을 돕고 싶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10곳 중 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여행자들이, 후원자들이 고아원에 들러 자원봉사도 하고, 외국 대학생들이 방학 기간 동안 찾아와 돕기도 했다. 미국 시애틀에 사는 릭 몽고메리(Rick Montgomery)도 2001년 여행 도중 걀주르를 알게 된 뒤 매년 음식과 담요 식료품 자전거 등을 지원했고, 2007년 아예 국제 어린이 후원 NGO인 ‘Global Roots’를 설립했다. 몽고메리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이로 걀주르를 꼽으며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난 가장 놀랍도록 이타적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남편 로상도 은퇴 후 아내의 일에 합류했다. 꽤 능숙한 승마인인 그는 아이들에게 승마를 가르쳤고, 샹그리라의 아이들은 연례 승마 페스티벌에서 여러 개의 상패를 타오곤 했다. 걀주르는 사무실 벽 가족 사진들 사이에 그 상패들을 걸어두고 자랑하곤 했다. 10~20대 시절 내내 주말마다 스키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 좌판을 펴놓고 샤발레(Shabale, 군만두처럼 생긴 티베트 전통음식)를 팔아 어머니 후원금을 벌어야 했던 장남 송첸은 스위스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됐고, 2008년 은퇴 후 샹그리라로 이주해 “해발고도 3,300m의 지구에서 가장 높은 맥주 브루어리 공장”과 카페 두 곳을 개업했다(동영상). 종업원 열에 여덟은 형, 누이, 동생으로 함께 자란 고아원 출신이었다. 스위스에 남은, 경영학을 전공한 동생 가덴도 회계 등 어머니의 일을 거들었다. 중국 입법기관 전국인민대표회의는 2003년 가을 국내 4,000여 개 자선기관ㆍ단체를 평가, 우수기관 400곳의 대표자를 북경에 초대해 치하했다. 티베트에서 초대장을 받은 건 갈주르 뿐이었다. 그런 일들이, 중국 정부의 억압에 항의하며 몸에 불을 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배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걀주르와 고아원 시설의 미담은 티베트의 평화를 치장하는 장식품이었다. ‘설원의 용: 1947년 이후 현대 티벳의 역사(1999)’라는 책을 쓴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대 교수 체링 샤캬(Tsering Shakya)는 걀주르를 ‘실용주의자’라 평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티베트에서도) 바닥서부터 시작되는 긍정적 변화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걀주르는 “어릴 적 나는 중국인에게는 심장도, 사랑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안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정부 당국은 우리 일에 힘을 보태고 있고, 내 생각엔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누구든 그들을 보면 누구나 평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2016년 5월 중국 전인대 제12회 상무위원회 20차 회의는 ‘해외 NGO 국내활동 관리법’을 제정했다. 중국 국내에서 활동하는 교육, 경제, 환경, 문화 법률, 체육, 복지 등 거의 전 부문의 해외 영리ㆍ비영리 단체 및 기관 상시 활동에 대한 국무원 및 성급 공안기관의 허가ㆍ감독을 법제화하고, 당국이 인정하는 국내 기관의 보증을 의무화한 거였다. 홍콩 민주화운동 등서 비롯된 외부 불안요소의 유입을 원천 차단하고 더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취지였다. 걀주르의 시설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늘어난 문서 작업 때문에”, 또 “(아이들에게) 더 나은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걀주르는 2017년과 18년 차례로 시설들의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정부 시설에 나뉘어 수용됐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온 뒤로도 중국 정부를 원망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결코 공개적으로는, 한 적이 없었다. 떼어 놓고 온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면, 이제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그는 이후 수 차례 아이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걀주르가 숨졌고, 아이들이 다시, 고아가 됐다. 

"교양과 실무역량 갖춘 융합형 창의인재 배출 전력"

“교양과 실무역량을 겸비한 융합형 창의인재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개교 40년을 맞는 대전대가 올해 교육부가 주관하는 각종 재정지원사업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며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한때 재정지원대학에 올라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학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제는 '미래 대학의 새로운 표준' 정립이라는 비전을 현실화하고 있다.   대전대 약진의 중심에는 교육부 차관출신으로 2017년 3월 취임한 이종서(65) 총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사회맞춤형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대학혁신지원사업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아 받은 지원금을 학생 교육여건 개선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지난 8일 총장실에서 만난 이 총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 불확실한 대학의 미래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파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며 “대전대가 내세우는 ‘미래 대학의 새로운 표준’이라는 비전 구현을 위해 혁신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종 평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학생들의 실질적인 학습역량 강화를 우선하는 대학의 의지와 교직원들의 노력이 어우려져 맺은 결실”이라고 평가했다. 이 총장은 "대전대의 지향점은 연구중심보다 교육중심 대학"이라며 "학생 중심의 실용적 융ㆍ복합교육 실현에 전력을 다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대전대는 입학에서 졸업까지 학생들이 자기주도적 학습 체계를 구축하도록 하고 있다. 1학년에 입학하면 미래비전 탐색과 설계를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기숙사형 레지던스칼리지(HRC)에서 인성과 공동체의식 함양 교육으로 전인적 인재로서 기틀을 다진다. 이어 2학년때는 리버럴 아츠 교육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과 학제간 융합적 식견을 겸비하도록 한다.  이를 바탕으로 3, 4학년때에는 현장실습과 인턴십, 캡스톤 디자인 등 전공별 차별화한 산학연계 교육프로그램과 에듀파크, 메이커 스페이스 등 실무역량 강화 교육시스템을 운영한다. 대학측은 이 같은 과정을 '튼튼한 기본 위에 특별한 경험'을 갖춘 인재 양성으로 표현한다. 4차 산업 혁명시대에 필요한 미래 인재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도 가속화하고 있다. 미래인재융합대학 신설이 대표적이다. 4차 산업 혁명시대 핵심산업인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포스트 코로나시대 비대면산업을 선도할 핀테크, 정보보안 분야의 융ㆍ.복합 전문인력 양성이 목표다. 내년부터 AI와 핀테크 학과 신입생을 모집하고, 학생들이 전공과 상관없이 각 분야를  연계해 공부할 수 있는 융ㆍ복합학부도 만든다. 이 총장은 “미래에 필요한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도 취업에 호조를 보이고 있는 기존학과들에 대한 지원도 더욱 늘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서울에 한방병원을 신규 개원한 한의학과를 비롯한 보건ㆍ의료분야와 소방ㆍ경찰ㆍ군사학 등 국가 안전ㆍ방재분야 학과, 문화콘텐츠 관련 학과, 지역재생 분야 학과 등 현재 경쟁력을 갖고 있거나 지역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이행하는 분야 등이다. 이 총장은 “올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로 모든 분야에서 위기를 맞고 있고 대학도 마찬가지다”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이환위리(以患爲利)의 자세로 항상 학생을 중심에 두고 교육체계 혁신과 대학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