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는 '초중고 생활기록부' 다 내세요"... 학폭 논란이 바꾼 K콘텐츠

이제 비연예인들은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를 방송사에 내야 TV에 출연할 수 있다. 학교폭력 의혹으로 구설에 오른 연예인이 출연한 드라마는 줄줄이 해외에서만 공개되기도 한다. 기획사는 리스크(위기) 매니지먼트팀까지 따로 만들어 소속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집중 관리한다. 잇따른 학폭 논란이 바꾼 K콘텐츠 시장 풍경이다. 5월 방송 예정인 인기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하트시그널4'의 비연예인 출연자들은 제작진에게 초· 중·고등학교 12년 치 생활기록부를 제출한 뒤 촬영을 시작했다. 앞선 시즌에서 시청자들이 일부 출연자를 학폭 가해자로 연달아 지목하면서 곤욕을 치른 제작진이 새 시즌에서 서류 검증 절차를 추가했다. 출연자의 말에만 의존해 윤리 문제를 파악했던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 풍토를 고려하면 특단의 조처다. '하트시그널4' 제작을 총괄하는 이진민 채널A 제작본부장은 "(생활기록부 제출을) 동의한 분만 출연이 가능하다"며 "생활기록부를 보고 특이사항이 있는지 없는지를 체크하고 이 과정에서 (출연자의) 자기 검열도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엔터테인먼트에서 윤리적 소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자 미성년자를 K팝 스타로 육성하는 기획사 관계자는 아예 학교까지 찾아가기도 한다. 다수의 한류 아이돌그룹을 배출한 한 K팝 기획사 관계자는 "데뷔 조에 든 연습생의 경우 그 연습생 부모 동의를 받아 학교로 찾아간다"며 "담임 선생님을 만난 뒤 학교생활 등을 묻고 문제가 없을 때 계약 수순을 밟는다"고 말했다. 그룹 르세라핌의 김가람과 (여자)아이들 멤버였던 수진 등이 학폭 의혹으로 최근 줄줄이 팀을 탈퇴한 뒤 연예계에 불고 있는 나비효과다. 끊이지 않는 학폭 논란은 연예인과 드라마, 영화 제작사가 맺는 계약서까지 바꿔놨다. 출연자 귀책사유엔 학폭이 추가됐다. 반복되는 학폭 파문으로 작품 공개뿐 아니라 제작에 차질을 빚어 수백 명의 스태프들이 피해를 본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20, 30대 배우가 소속된 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예전엔 음주운전이나 마약 그리고 성범죄가 계약 위반 사유였다"며 "최근 1년 새 받은 작품 출연 계약서 중엔 배우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항목에 학폭이 포함된 것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드라마 '달이 뜨는 강'(2021)을 만든 제작사 빅토리콘텐츠는 학폭 가해 일부를 인정하고 드라마에서 하차한 배우 지수의 전 소속사 키이스트를 상대로 3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학폭 문제로 회사 간 대형 소송까지 벌어지다 보니 일부 대형 연예기획사는 아예 리크스 매니지먼트팀까지 꾸렸다. 이 기획사 관계자는 "소속 연예인의 학교생활 관리나 옛 학창 시절 점검뿐 아니라 부모의 빚 등 연예 활동에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사안을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게 이 팀의 역할"이라며 "연예인 부모님을 따로 불러 주의 사항 등을 따로 교육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학폭 의혹에 연루된 연예인이 출연하는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K콘텐츠 시장엔 '해외 전용 작품'까지 등장했다. 학폭 의혹을 받는 박혜수와 심은우가 각각 출연한 드라마 '디어엠'과 '날아올라라 나비'는 한국에서 방송이 무기한 연기된 뒤 일본과 대만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지난해 공개된 것으로 파악됐다. 공개하지 못하면 제작비를 회수할 수 없기 때문에 해외만 유통하는 고육지책을 택한 것이다. 드라마 제작사의 한 관계자는 "한국에서 흥행해야 해외에서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는데 해외에만 팔아선 제작비의 반도 거둬들이기 어렵다"고 속을 태웠다. 학폭 논란의 여파로 콘텐츠 제작 현장이 급격히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각에서 "학폭 의혹과 작품은 별개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는 피해자에 2차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안을 엄중히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명 연예인을 향해 학폭 미투가 이뤄지는 건 잘나가는 누군가를 추락시키고 싶어서라기보다 피해자 입장에선 어려선 잘 몰랐던 혹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고통을 '내가 피해자'라고 말하게 됨으로써 시작하는 치유의 과정"이라며 "K콘텐츠 산업 종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학폭 피해자들과 대화해 피해자의 상처가 더 커지지 않는 방향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혜교 탈진할 뻔"한 '더 글로리' 엄마의 폭력

부적응.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의 엄마 정미희(박지아)는 이런 사유가 적힌 딸의 자퇴서에 서명한다. 동은의 엄마가 딸의 학교폭력 가해자인 연진 엄마에게서 돈을 받고 한 일이다. 합의금을 손에 쥔 엄마는 딸을 버리고 야반도주한다.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내가 당신을 용서 안 하는 이유는 첫 가해자라는 걸 당신은 지금도 모르기 때문이야". 동은은 20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엄마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오열한다. 그때 동은의 집은 불타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는 딸의 집에서 혼자 삼겹살을 구워 먹다 딸에 화가 나 불을 지른다. 고기가 뜨거운 불에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집을 에워싸자 동은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의 몸엔 머리 모양을 다듬을 때 쓰는 미용전기제품 일명 고데기로 학폭을 당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 고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송혜교는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김은숙 작가는 28일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2 비하인드 영상에서 "혜교가 집이 불타는 장면 찍고 탈진할 뻔했다더라"고 말했다. 딸의 첫 번째 가해자는 엄마였다. 이 비극을 쓴 이유에 대해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분들을 보면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하는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군가가 부딪히는 첫 번째 세상이 엄마잖아요. 엄마는 (자식의) 첫 번째 어른이고 보호자이고요. 그런데 첫 번째 가해자가 되는 엄마들이 있더라고요. 그 엄마를 동은이 엄마로 그리고 싶었어요." '더 글로리'에서 동은처럼 안타까운 인물은 경란(안소요)이다. 연진(임지연)과 재준(박성훈) 등에 학폭을 당한 경란은 커서도 가해자 옆에서 눈치 보며 그들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김 작가는 "모든 (학폭) 피해자가 동은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며 "가해자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피해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경란은 동은을 다시 만나면서 가해자 없는 세상을 처음으로 꿈꾼다. 동은을 학폭으로 무너뜨린 연진, 재준, 이사라(김히어라), 혜정(차주영), 손명오(김건우)는 '동은 오적'으로 불린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과몰입해 붙인 별명이다. 이 동은오적은 명오 장례식장 장면을 가장 섬뜩한 장면으로 꼽았다. 이곳에서 사라는 "남의 아픔을 기뻐하는 자 사탄일지어다"라고 외치며 친구였던 혜정의 목에 연필을 꽂는다. 김히어라는 "이 장면을 찍은 뒤 너무 기분이 싸해서 '당분간 이런 역할 하지 말자. 이러다 큰일 나겠다'란 말을 동료들과 했다"고 말했다. "어두운 내용을 쓰니 감정이 피폐해지더라"는 게 대본을 쓴 김 작가의 말이다. '더 글로리' 파트2는 공개 첫 주 시청 시간에서 '오징어 게임'(2021)을 넘어섰다. 지난 10일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2는 2주 연속 1억 시간 넘게 재생됐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1이 첫 주 2,500만여 시간 재생되는 데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네 배 이상 폭증했다. 학교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파트1이 공개된 후 한국을 비롯해 말레이시아와 태국 등에서 줄줄이 벌어진 '반(反)학폭' 운동이 세계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부쩍 높인 여파로 풀이된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보니 '더 글로리' 파트3 혹은 시즌2를 기대하는 시청자도 많아졌다. 드라마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 '더 글로리' 쫑파티에서도 김 작가와 배우들은 파트3에 대한 말을 농담처럼 나눴다고 한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 관계자는 이날 "파트3 혹은 시즌2 제작 여부는 미정"이라고 말했다.

고대사까지 손댄 일본 교과서 "한반도 영향력 약화해 서술"

일본 초등학교의 여러 교과서가 고대사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을 축소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왔다.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로 표기하고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에 ‘강제성이 없었다’고 수정한 것은 물론이고 역사 전반을 자국 중심으로 고치려는 역사수정주의적 의도가 짙어지고 있음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29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열린 ‘일본 초등학교 검정교과서 분석 세미나’에서 나온 분석이다. 재단 소속 위가야 연구원이 2019년과 2023년 교과서를 비교한 결과 여러 교과서에서 5, 6세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준 ‘도래인’(度來人)을 축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쿄서적은 ‘도래인이 전했다고 생각되는 철기ㆍ청동기ㆍ삼베나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이 출토되었습니다’라는 문장을 ‘대륙에서 전했다고 생각되는 철기ㆍ청동기ㆍ삼베나 비단으로 만든 천 등’으로 수정했다. 일본문교출판은 “나라현에 있는 다카마쓰즈카 고분의 벽화와 후지노키 고분에서 출토된 신발을 봐도 중국이나 조선과의 깊은 관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조선과의 관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발견되고 있습니다”라고 고쳤다. “소가씨처럼 도래인과 결합을 강화해 힘을 갖는 호족도 나왔습니다”라는 문장은 아예 삭제했다. 위 연구원은 “소가씨 삭제 등은 일본 고대문화 및 정치세력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러ㆍ일 전쟁도 자국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일본문교출판은 “유럽국가인 러시아에 승리”를 “대국인 러시아에 승리”로 수정했다. 러일 전쟁 원인에는 “만주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위기”라는 문장을 넣었다. 전쟁을 벌인 당위성을 부각하면서 러시아를 대국으로 강조해 러일 전쟁 성과를 드높인 것이다. 위 연구원은 “일본 승리가 ‘구미제국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자각과 희망을 주었다’고 서술해 전쟁의 결과를 미화했다”고 비판했다. 강제병합, 식민지 지배 관련 사실도 여러 군데를 수정했다. 도쿄서적은 “조선의 역사는 가르치지 않고 사람들의 자긍심이 깊게 상처받게 되었습니다”를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로 바꿨다. 식민지 교육을 향한 조선인의 민족 감정 관련 서술을 삭제해 식민 지배의 침탈성을 약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피하고 싶은 역사도 정확히 기술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건 재단 연구위원은 "이들 전쟁(청일ㆍ러일 전쟁)의 목적이 무엇이고, 왜 나쁜 전쟁인지, 전쟁의 의미와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며 "이를 가르치지 않은 것 또한 교과서 왜곡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조윤수 재단 교과서연구센터장은 "교과서는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향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전문적인 시각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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