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연 날리며 빌고 싶은 한가지 소원... '코로나19 끝!'

'송액영복(送厄迎福)': 액운을 보내고 복을 기원한다 새해를 전후해 날리는 연은 '액막이연'이라고도 부른다. 송액영복을 연에 적어 하늘 높이 날려보내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연날리기는 일종의 민속신앙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월 대보름쯤이면 너도나도 동네 언덕이며 하천 둔치에 모여 연을 날리는 모습이 과거에 흔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 지금 한 조각 방패연에 바이러스를 실어 영영 떠나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랜 역사에 걸쳐 민초들이 의지해 온 풍습이자 아이들에겐 훌륭한 장난감이기도 했던 연날리기 장면을 이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급변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연의 효용 가치가 급격히 퇴색한 탓이다. 존재의 기억조차 잊혀가는 지금 전통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리기태 명장(한국연협회 회장)을 만났다.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체육문화회관. 리 명장은 자신의 승합차에 싣고 온 100여 종류의 방패연을 '방패연 모양'으로 바닥에 늘어놓았다. 리 명장은 창호지에 댓살을 붙여 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직도 소가죽을 중온수에 끓여 만든 아교나 민어 부레를 이용한 어교, 조개껍데기를 갈아 만든 물감 등 천연재료를 고집한다. 조부 이천석 옹과 부친 이용안 옹에 이어 3대 째 이어오는 조선시대 전통 방패연 제작 원형 기법이다. 이날 그가 선보인 연들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통 연 제작자 및 민화 작가로부터 기증을 받거나 공모를 통해 모은 민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에는 해, 달, 새, 꽃과 같은 자연을 비롯해 용이나 봉황 등 상상 속 존재까지 담았다. 리 명장은 이를 두고 "오직 바람에 의해서만 하늘을 나는 연의 자연친화적인 면모"라고 설명했다. 현대 문명에 밀려 점점 사라져 가는 연날리기의 전통을 잇기 위해 리 명장은 다양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지난 3일 소의 해를 맞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대형 황소연과 봉황 줄연 등 150여개의 연을 날려 코로나19 퇴치를 기원한 것을 비롯해, 전국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자신의 호를 따서 고안한 '초양법'으로 손쉽게 연을 만들고 날리는 방법을 미래 세대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영국 왕실 식물원에서 보관 중인 가장 오래된 한국 전통 연 '한성연'을 복원하고, 지난해 1월엔 인도에서 열린 국제 연축제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 전통연의 개성과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한국의 전통 연은 크게 방패연과 가오리연 두 종류로 나뉜다. 보통 가운데 둥근 구멍이 있는 장방형 연을 방패연이라 하는데, 정확하게는 구멍이 없는 네모난 연이 방패연이고 중앙에 구멍이 있는 것은 방구멍연이다. 형태나 무늬에 따라 나누자면, 꼭지연, 반달연, 치마연, 동이연, 초연, 박이연, 발연 7종류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날리는 목적이나 기능에 따라 70여 종류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부모나 조부모가 사망한 경우 연 몸체에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색 연을 날려 고인의 명복을 빌었는데, 이를 상주연이라고 불렀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인류는 다양한 목적으로 연을 만들어 날렸다. 기원전 5세기 중국에선 연을 날린 후 연줄의 길이로 거리를 어림 측정하기도 했고, 삼국사기에는 서기 647년 반란 진압에 나선 김유신 장군이 불붙은 연으로 적군을 교란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연의 계승은 리 명장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그는 "연 박물관을 만들어 소장하고 있는 연을 모두 기증하는 방식으로 후손에게 전통을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 촬영에 응한 박인순 삼익타운 대표는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으로 연날리기를 계속하고 있다”며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전 국민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 역시 40년 이상 연을 날린 전문가이자 리 명장의 제자다. 촬영을 마치고 헤어지기 전 리 명장이 연을 날려 소원을 이루는 비법을 소개했다. “연을 날릴 때는 가장 간절한 소원 하나만 비세요. 그럼 반드시 성취됩니다.”

언 포도에서 발견한 뜻밖의 달콤함... 로마인도 아이스와인을 즐겼을까

독일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이스와인(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Eiswein·아이스바인)용 포도 수확하기. 주변에 이 얘기를 했더니 “가능하겠어?”라며 다들 시큰둥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작년 이맘때였다. 포도를 수확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독일로 날아갔다. 결국 포도밭의 단꿈을 이루진 못했다. 여행하는 동안 기온이 단 하루도 아이스와인용 포도 수확에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여행 가방 속에 아쉬움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아이스와인 생각을 까마득히 잊었을 무렵이었다. 독일 13개 생산지 어느 곳에서도 2019년산 아이스와인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지구 온난화의 직격탄을 맞았단다. 필자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스와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 상태에서 언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보니, 따뜻해진 겨울 날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생각이 도드라져 아이스와인에 관한 기록을 눈을 부릅뜨고 뒤지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먼저, 고대 로마 시대에 이미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는 주장. 로마군의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가 37권으로 엮은 ‘세상 모든 이야기들(Naturalis Historiae)’에 기록을 남겼다. “달콤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포도를 수확하지 말라.” 동시대의 시인 마르티알리스 역시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물론 이 정도 기록으로 당시에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렇게 만든 와인을 먹어봤으니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물며 고대 로마인이 누구이던가. 우리 선조가 한반도에 삼국시대를 열 즈음, 한여름에 알프스의 얼음으로 와인을 시원하게 칠링해 마셨고 머나먼 브리타니아(오늘날 영국의 그레이트브리튼섬)에서 나는 굴을 싱싱하게 운반해 미식의 향연까지 즐겼으니, 그들이 아이스와인을 만들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아이스와인 강국 독일에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1794년 어느 늦가을이었다. 프랑켄 지역 농가들은 포도밭을 돌보며 수확 시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잘 영근 포도밭에 때 이른 한파가 닥치고 말았다. 서리가 내려앉자 포도는 모두 얼어버렸다. 포도밭 앞에서 얼음처럼 굳은 농부들은 언 포도라도 수확할 수밖에 없었다. 시린 손을 불끈 쥐고는 땡땡 언 포도에서 즙을 짜내 와인을 만들었다. 농부들의 갖은 고생 덕분인지 와인은 맛이 꿀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웠다고 한다. 독일 라인헤센 지역에는 상세하게 기록된 문서가 남아있다. 1829년 라인헤센의 드로머샤임 마을에도 포도를 수확하기 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농부들은 올해 농사는 망쳤다고 여기고 포도를 가축 사료로나 쓰려고 나무에 달린 채로 그대로 방치했다. 기온이 더 떨어지자 포도는 마치 황태덕장의 황태처럼 얼고 녹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포도의 당분이 농축됐다. 이 사실을 알아챈 농부들이 언 포도 그대로 수확해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망쳤다고 여긴 농사를 뜻밖의 달콤함으로 결실 맺은 농부들은 얼마나 안도했을까. 최초의 아이스와인을 고대 로마인이 만들었는지 독일인이 만들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계절의 굴곡과 시간의 손길이 만난, 삶의 어느 굽이에서 ‘문득’ 탄생했으리라. 한편, 아이스와인을 상업적으로 처음 생산한 와이너리는 따로 있었다. 라인헤센의 이야기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1858년이었다. 라인가우 지역에 슐로스 요하니스버그라는 와이너리가 있었다. 이 와이너리는 이미 늦수확 포도로 당도 높은 스위트 와인을 만든 경험이 있었기에 아이스와인을 본격적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지 그리 활발하게 생산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스와인은 기술만 있다고 만들어낼 수 있는 와인이 아니다. 2019년 겨울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처럼 기온이 따라주지 않으면 절대 생산할 수 없다. 슐로스 요하니스버그 와이너리에도 기술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여전히 기술이 부족했거니와 여러 정밀 장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언 포도에서 포도즙만 추출할 수 있는 공기압을 이용한 착즙기나 밤이나 새벽에 수확할 수 있도록 작업 환경을 밝혀주는 이동식 발전기와 조명 장치, 언 상태로 포도를 수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원격 온도 경보장치, 야생동물이나 새로부터 포도나무와 포도를 보호해줄 비닐캡이나 그물망 등이 없었으니, 지금처럼 아이스와인을 활발하게 생산할 수 없었을 게다. 1960년까지 100여 년 동안 독일에서 아이스와인이 단지 6개 빈티지만 생산된 데에는 이처럼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게다가 그때는 유럽의 포도밭을 초토화한 벌레 필록세라가 창궐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두 차례 세계대전도 있었으니, 포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을까 싶다. 숱한 시련이 아물고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1961년부터 독일은 아이스와인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1980~90년대에는 아이스와인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세상사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 탓에 앞으로는 독일에서 아이스와인 생산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전통적인 아이스와인 강국 독일이 아이스와인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아이스와인을 맛보지 못하게 될까? 다행히 아이스와인 생산량 세계 1위인 캐나다가 있다. 캐나다에서 아이스와인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는 1972년이다. 독일 이민자인 발터 하인레가 오카나간 밸리에서 아이스와인을 만들면서부터다. 현재 캐나다에서 아이스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나이아가라 지역의 온타리오 호숫가에 위치한 이니스킬린이다. 캐나다 말고도 겨울 날씨가 제법 매서운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등 중유럽 여러 나라와 몰도바, 중국, 미국, 이탈리아에서도 아이스와인을 생산한다. 최근에는 신대륙 여러 나라에서도 소량 생산하고 있으니, 아이스와인을 맛보지 못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아이스와인은 날씨 조건이 맞아야 생산할 수 있다. 여름에는 포도가 충분히 익을 만큼 일조량이 풍부해야 한다. 가을에는 포도가 곰팡이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하며, 겨울에는 포도가 충분히 얼 만큼 추워야 한다. 아이스와인을 생산하는 곳 대부분이 독일이나 캐나다처럼 포도 재배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스와인 포도 품종은 생산국만큼이나 다양하다. 독일에서는 리슬링, 캐나다에서는 비달블랑을 주로 쓴다. 그 밖에도 게뷔르츠트라미너, 그뤼너 벨트리너, 소비뇽블랑, 슈냉블랑, 샤르도네, 실바너, 세미용 등 화이트 품종과 카베르네프랑, 쉬라즈, 메를로, 피노누아, 카베르네 소비뇽, 산지오베제 등 레드 품종도 있다. 그런데 언 포도로 어떻게 와인을 빚을까. 다른 과일이 그러하듯 포도 역시 수분과 당분 등 여러 성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성분들은 서로 ‘어는 점’이 다르다. 수분은 영하에서 얼지만 당분 등 다른 성분은 여간해서는 영하에서 얼지 않는다. 이러한 ‘결빙점 차이’를 이용해 아이스와인을 만든다. 기온이 영하 7~8도까지 떨어지기를 기다려 수분만 꽁꽁 언 포도를 수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포도 수확은 주로 한밤중이나 미명에 시작해 여명이 밝아오기 전에 마친다. 기온이 오르면 포도의 언 수분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수확한 포도를 재빨리 옮겨 압착하면 언 수분은 결정 상태로 제거되고, 당분 등 여러 성분이 농축된 포도즙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추출한 즙엔 당분은 물론이고 산도, 아로마, 미네랄 등이 농축돼 있다. 이 즙을 발효해 와인을 만들면 높은 당도와 산도가 균형을 이룬 와인이 빚어진다. 아이스와인은 잘 익은 포도를 자연적으로 얼려서 빚기 때문에 맛과 향이 다른 스위트 와인보다 맑고 깨끗하고 상큼하고 건강한 느낌, 프레시하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 아이스와인은 포도를 수확하기까지 여러 위험 요소를 극복해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익을 때까지 병충해나 곰팡이 피해를 보지 않아야 하고 기온도 떨어져야 하니, 농부들의 수고로움에 ‘천우신조’의 도움까지 필요한 셈이다. 게다가 당도가 높다 보니 들짐승과 날짐승이 가만두질 않는다. 이 모든 조건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 해의 땀과 정성을 포기해야 한다. 비싼 데에는 만만찮은 인건비도 한몫한다. 포도를 언 채로 수확해야 하니,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포도를 따야 한다. 무사히 수확했더라도 수분을 제거한 즙으로만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다른 와인에 비해 생산량마저 적다. 보통 와인 병은 용량이 750ml인데 아이스와인이 500ml나 375ml 용량의 병에 담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높은 당도 때문에 발효 기간 또한 길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아이스와인용 포도를 ‘자연 상태’에서 얼려야 할까. 요즘엔 냉동 기술을 이용한 ‘냉동추출법’이란 방식으로 아이스와인을 대량 생산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면 가격이 저렴할뿐더러 맛도 상당히 좋아 부담 없이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단, 우리가 횟집에서 익히 경험했듯, 와인도 ‘자연산’과 ‘양식’이 같을 수는 없다. 자연이 얼린 포도로 만든 와인만 아이스와인이라 칭하는 이유이다.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에서는 이 규정을 엄격히 적용한다. 그러고 보면, 아이스와인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굉장히 달콤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로 지구의 빙하들이 녹고 있다. 기후 이상 탓에 포도가 자연적으로 얼지 않더라도 기술의 힘으로 얼린 ‘아이스드’ 와인을 맛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어쩌면 우리가 먹는 아이스와인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빙하의 영혼이 아닐까.

모두에게 공평한 시간? 황제에게 16년은 찰나였다니

양저우에서 경항대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약 100km 내려가면 창저우(常州)에 이른다. 기원전 춘추시대 오나라 땅이었다. 마음속 약속을 지키고자 무덤 옆 나무에 보검을 남긴 계찰(季札)의 봉읍으로 연릉(延陵)이라 했다. 사마천은 ‘오태백세가(吴太伯世家)’에서 계찰을 일러 인자하고 덕성이 풍부한 군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계찰괘검(季札挂剑)’의 땅 창저우는 수나라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이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을 가면 2,800년 역사를 지닌 춘추엄성(春秋淹城) 유적지가 있다. ‘명청 시대를 알려면 베이징, 수당 시대는 시안, 남송 시대는 항저우, 춘추 시대는 엄성을 봐야 한다’고 자랑한다. 외성과 내성, 가장 안쪽의 자성까지 해자를 세 번이나 건너야 한다. 건설 계획도를 보니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백공불파다. 1930년대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1958년에 청동기, 도기와 함께 쪽배가 출토됐다. 천하가 개벽한 이후 최초의 배라는 칭호와 함께 베이징의 중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난공불락의 성은 누가 세웠을까? 그저 말만 무성하다. 산둥성 취푸에 엄국(奄国)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남쪽으로 도주해 세운 도읍이라는 설이 있다. 고대에는 ‘엄(奄)’과 삼 수가 붙은 ‘엄(淹)’이 통용됐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쟁패를 겨루던 위험 지역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나라에 멸족 당한다. 계찰이 거주했다는 가설도 있다. 넷째 아들로 태어난 계찰은 왕위 계승을 거절하고 세 형의 왕위 계승을 지켜봤다. 마지막까지 왕위를 사양하니 조카가 즉위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조카 합려가 왕위를 찬탈하자 평생 오나라 도읍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성을 짓고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오래 머무른다’는 뜻인 '엄류(淹留)'는 그저 체류한다는 뜻에 더해 상종하지 못할 인간과의 절교를 내포하고 있다. 200년도 더 흐른 후 초나라 시인 굴원도 엄류를 시어에 담았다. 정적의 중상모략을 견디지 못하고 세태를 비관했다. 서글프고도 비장한 가락의 ‘이소(离骚)’다. 총 378행 중 후반부의 6행은 이렇다. 창저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우시(无锡)로 간다. 북쪽으로 장강이 흐르고 남쪽에 5대 담수호인 태호(太湖)가 있다. 태호와 이어진 혜산(惠山) 자락에 역사문화가 풍성한 옛 마을이 있다. 혜산고진은 최근 최고 등급의 5A급 관광지로 승격됐다. 북문으로 들어가 무지개다리가 이어진 도랑을 따라 들어간다. 현지인은 사찰 아래 제방 따라 흐르는 개울, 사당경(寺塘泾)이라 부른다. 용두하(龙头河)라는 별칭도 있다. 대운하를 거쳐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배를 타고 방문해서다. 마을 안으로 300m가량 들어서니 삼문사주오루(三门四柱五楼) 형태의 패방이 나온다. ‘산골짜기에 사는 기룡’이라는 암학기룡(岩壑夔龙)이 새겨져 있다. 기룡은 신화를 기록한 ‘산해경’에 등장한다. 소처럼 생겼으나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다. 한 번에 7,000리를 헤엄치는데 잠수할 때 풍우가 몰아치고 해와 달처럼 밝은 빛을 뿜고 우레 소리를 낸다. 이 신비한 동물을 끄집어낸 인물은 엄세번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재상이자 간신으로 유명한 엄숭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세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으며 당대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반대쪽에는 추적광의 인걸지령(人杰地灵)이 새겨져 있다. 추적광은 강남 일대의 과거 시험을 총괄하는 호광제학부사를 역임했고 수많은 인재를 발굴했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일심동체로 공덕 패방을 세웠다. 고진을 가면 늘 사당과 만난다. 집성촌이면 두어 개 정도 있다. 아무리 큰 고진이라도 10개는 넘지 않는다. 그런데 혜산고진에는 사당만 100여개에 이른다. 그야말로 사당 천국이다. 곳곳에 사당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국가중점문물로 보호되는 사당군으로 인해 혜산고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비 명단에 들어가 있다. 곧 등재되고도 남을 듯하다. 패방을 지나니 전무숙왕사(钱武肃王祠)가 나타난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 약 70년 동안 화북지방은 오대가 이어지고 남방은 10개의 나라가 할거한다. 항저우를 도읍으로 십국 중 하나인 오월(吴越)을 세운 무숙왕 전류를 봉공한 사당이다. 전류는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이란 말을 창시했다고 알려졌다. 쑤저우와 항저우를 발굴한 왕국이었다. 오왕전(五王殿)은 3대에 걸쳐 5명의 왕이 71년 동안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전류의 초상화 위에는 강희제가 하사한 보장강산(保障江山) 편액이 걸려 있다. 혜산사 산문은 2층 누각이다. 건륭제가 칭찬한 강남제일산(江南第一山) 현판은 당대 화가 치바이스의 제자 리커란의 필체다. 1층에 석혜승경(锡惠胜境)이 보인다. 서쪽의 혜산과 동쪽의 석산 사이의 영산호를 따라 형성됐다. 해발 300m 정도로 나지막한 산이다. 고진은 해발이 겨우 8m다. 2,000m 이상인 지방이 워낙 많아 이렇게 낮은 동네에 오니 낯설다. 혜산을 둘러싸고 사당은 물론이고 사찰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 유명한 샘물도 있다. 산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추충공사(邹忠公祠)가 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공덕 패방의 주인공인 추적광이 북송 시대 조상인 추호를 봉공하려고 처음 세웠다. 추호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상소를 관리하며 관리를 감독하는 관직인 정언과 병부시랑을 역임했다. ‘송사(宋史)’에도 기록된 인물로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패방 자리에 있던 사당이 훼손됐고 청나라 강희제 시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했다. 신위를 모시는 향당에 충공 추호와 지원공 추적광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산문 안 오른쪽으로 기창원(寄畅园)이 있다. 원래 혜산사의 승사였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진금이 인수해 정원을 꾸미고 풍곡산장(凤谷山庄)이라 했다. 병부를 비롯해 오부의 상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진씨 가문에 상속되다가 만력제 시대에 장거정이 추진한 개혁과정에서 해직된 진요가 다시 조성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서예가 왕희지가 쓴 ‘기창산수음(寄畅山水阴)’에서 이름을 따왔다. 산수의 재미에 빠지고 탁 트인 풍광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호반을 따라 돌다가 멈추면 시선은 어디라도 다 그림이다. 정자를 둘러싼 나무가 물속으로 고요하게 스며드는 경관이다. 관직 잃은 상심 정도는 금세 물감처럼 풀리지 않았을까? 서재를 함정재(含贞斋)라 했다. 여전히 충정을 잃지 않았다는 선언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구책이기도 했다. 사계절 호반의 변화에도 의연하게 책을 펼치고 앉은 모습이 상상된다. 본채인 와운당(卧云堂)에 산색계광(山色溪光) 편액이 걸려 있다. 색감과 빛깔이 꽤 예뻤나 보다. 강희제가 하사한 글자다. 넝쿨이 자라나는 담장에도 그럴싸하다. 강남 순행 길마다 방문한 건륭제도 옥알금종(玉戛金枞)이라는 글을 남겼다. 어려운 글자로 보이나, 흐르는 샘물과 호반을 둘러싼 가산(假山)을 뜻한다. 기창원에 매료된 건륭제는 황실 정원인 이화원을 만들 때 참고하라고 지시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양쪽으로 두 개의 문루가 나타난다. 오른쪽인 청송(听松)은 이천서원(二泉书院)으로 이어진다. 푸른 바탕에 금빛으로 쓴 전서가 인상 깊다. 명나라 강서제학부사를 역임한 학자인 소보를 봉공하는 사당이다. 이천은 그의 별호인데 혜산고진의 자랑인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과 관련된 듯하다. ‘진정한 사대부가 되어야지, 가짜 학문으로 도를 닦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선비의 수양과 처세를 기록한 '소창유기(小窗幽记)'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의 평판만 따르는 위선자를 경계하라는 뜻이니 진사부(真士夫)는 최고의 평가다. 왼쪽인 관천(观泉)을 지나면 화효자사(华孝子祠)가 나온다. 동진 시대 효자로 소문난 화보를 봉공하는 사당이다. 효자가 된 사연이 기가 막힌다. 어릴 때 모친을 잃었다. 8세가 되자 부친은 남조의 송나라(역사에서는 유송이라 함)를 세운 유유의 군대에 종군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혼례를 올려주겠다고 약조했던 부친이 그만 전사했다. 70세가 되어서야 조카를 입양해 대를 이었다. 그때까지 혼인하지 않고 부친의 귀향을 기다렸다. 지금 보면 참 미련한 불효일 수도 있는데, 당시엔 미담이었던 모양이다. 세태가 수상하니 ‘효도를 으뜸으로 여긴다’라는 효위행수(孝为行首)를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소보의 별호이자 관천 문루와 이어지는 천하제이천이 나타난다. 부근에 육우를 봉공하는 육자사(陆子祠)도 있다. 당나라 시대 차성(茶圣)으로 알려진 육우는 차 끓이는 샘물에 대해 품평을 했다. 그중 두 번째로 좋다고 했다. 당나라 재상을 역임한 시인 이신은 달콤하고 상큼한 샘(감상천)이자 세상의 신성한 물(인간영액)이라 칭찬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도 차 맛이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미사여구를 남겼다. 건륭제는 직접 필체를 남기기도 했다. 샘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어비정이 나온다. 혜산고진을 자주 찾은 건륭제가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고 16년이 지난 1751년에 쓴 시다. 비석에 새긴 8연 56자를 꼼꼼하게 읽어본다. 기창원의 풍광을 시작으로 구름과 나무, 명산의 승려, 음과 양의 반영,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풀을 읊더니 공무를 떠나 지난 일을 되새긴다. 느닷없이 ‘십육춘추일찰나(十六春秋一刹那)’라는 감회로 마무리한다. 16년 세월이 찰나처럼 느껴진 황제의 마음이 잘 전해진다. 찰나,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말이다. 북위 시대 인도에서 온 발타라와 법현이 번역한 ‘마하승지율(摩诃僧祇律)’에 나오는 말이다. 눈도 깜빡이지 말고 봐야 한다. 시간을 쪼개고 나누는 과정이라 복잡하다. 일찰나는 일념(一念)이고, 20념은 순(瞬)으로 눈 한번 깜짝이는 시간이다. 20순이 탄지(弹指), 20탄지가 라예(弹指), 20라예가 수유(须臾)다. 24시간은 30수유라고 한다. 거꾸로 돌아간다. 이제부터는 산수다. 수유는 48분, 라예는 144초, 탄지는 7.2초, 순은 0.36초, 일념인 일찰나는 0.018초다. 비석 위 조정(藻井)에 황제의 상징인 용이 내려다보고 있다. 황제나 서민이나 시간은 높고 낮음이 없다. 얼마나 평등한가? 마음껏 찰나를 즐겨도 좋으리라. 혜산사는 남조 유송 시대인 423년 처음 세워졌으니 1,600년의 역사다. 왕조를 거치며 훼손과 중건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와 이홍장의 회군(淮军)이 전투를 하면서 전화에 휩싸였다. 이홍장은 폐허가 된 혜산사를 중건했다. 대웅보전 1층 가운데 자리는 건륭제의 범우자운(梵宇慈云)이 차지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석가모니가 봉공돼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앉았다. 여의(如意)를 든 문수는 가끔 봤으나 책을 읽는 보현은 처음 봤다. 밤이 내리면 고진은 색다른 풍광으로 갈아입는다. 옛날 무대인 수장각(绣嶂阁)이 예쁜 모습으로 치장했다. 전서로 써서 운치를 돋운다. 1층에도 검은색에 청색으로 쓴 전서가 있다. 어둡기도 하거니와 어렵기도 하다. 애써 읽으니 천연신균(天然神均)이다. 천지를 창조할 때 신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눈 공기처럼 음악도 고루 퍼지라는 메시지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조명 덕택에 크고 작은 사당과 패방이 출몰한다. 이다지도 많으니 그 속에 담긴 역사를 배우려면 1주일로도 모자랄 듯싶다. 마을 끝자락에 패방이 나타난다. 오리향승(五里香塍) 편액이 작별 인사를 한다. 청명절 즈음 수양버들 가지마다 꽃이 피고 울긋불긋한 장관이 5리에 이른다는 마을이다. 얼마나 만발했길래, 골목마다 떨어진 꽃을 밟고 돌아가면 발바닥에서 향내가 난다고 한다. 어쩐지 혜산고진 발품 기행에 솔솔 꽃 향기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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