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우체통에 넣으면 답장이’, 판타지가 현실로

사람이 ‘온기’, 그러니까 따뜻한 기운이 될 수 있을까. 이메일도, SNS 메신저도 아닌 손글씨가 그 온기를 퍼뜨리는 통로가 될 수 있을까. 일반 우편물은 자취를 감춰가는 시대에 말이다. 디지털 문명의 속도를 거슬러, 느릿느릿 다정하게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4년여 간 그가 세상에 흘려 보낸 편지가 1만 통. 말 못 할 고민 한 자락을 써서 넣어두면 며칠 뒤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온기우편함’을 만든 조현식(31) ‘온기’ 대표다. 그러나, 그도 한때는 속도전의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공부란 걸 해야겠구나’ 마음먹고 성남에서 서울로 전학까지 가 ‘압축 학습’을 했고, 대학에 가서는 좋은 회사에 취업하려 조기졸업이 가능할 정도로 학점을 따며 내달렸다. ‘높은 곳에 빨리 당도하는 것’이 인생의 지향점이었다. 그 삶에 쉼표를 찍어준 사건이 일어났다. 할머니의 죽음. 어릴 적 5년이나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그에겐 어머니의 어머니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투병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6개월을 그가 함께했다. 틈날 때마다 병실을 찾아 할머니가 살아온 시간을 들었다. 막노동에 ‘함바집’ 같은 육체 노동을 하며 어렵사리 생계를 꾸리면서도 어떻게 4남매를 번듯하게 키울 수 있었는지 같은. 그러면서 할머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정말 중요하다. 내가 이제까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야.” 생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할머니는 가쁜 숨으로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아.” 그가 ‘사람’과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2주 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리고 이런 고민을 했죠.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내일 내가 만약 죽는다면 나는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후 그의 삶은 느려졌다. 방황이 길어졌다. 야학교사, 위기가정아동 방과후 돌봄, 루게릭병 환우 지원 같은 일들을 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해 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이 그에게 영감을 줬다. 둘 다 과거에서 온 편지에 주인공이 답장을 하면서 생기는 일이 줄거리다. “내 고민에 귀를 기울여주는 편지를 써주는 사람이 실제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대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온기우편함을 제작했다. 2017년 2월 25일 서울 삼청동 돌담길에 처음 세운 우편함은, 현재 여덟 군데로 늘어났다. 삼청동을 비롯해 덕수궁 돌담길, 노량진ㆍ신림동 고시촌, 혜화동, 서울어린이대공원이다. 명동 우표박물관 내에는 우체국콜센터 감정노동 종사자들을 위한 온기우편함이 있다. 답장을 써주는 자원봉사자인 ‘온기우체부’도 10명에서 150명이 됐다. 소설과 영화 속 판타지는 그렇게 현실이 되어 지금에 이른다.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한때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고민이었다는 조 대표를 12일 서울 강남구의 온기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이 산뜻해요. “이사한 지 한 달쯤 됐어요. 이게 네 번째 사무실이에요.” -처음엔 사무실이 없었죠? “네, 온기우체부님들과 주로 카페에서 만나서 편지를 모아 읽고, 답장을 썼어요. 한 군데에만 너무 오래 있을 수 없으니 카페를 전전하며 다녔죠. (미소)” -군 복무 때 온기우편함 아이디어를 구상했다고요. “네, 맞아요.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다가, 이런 게 현실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죠.” -그때가 대학 재학 중이었잖아요. 원래 졸업 후 무슨 일을 하고 싶었나요. “군대 가기 전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뭘 하며 살아야 될까’ 하는 고민이 길어졌거든요. 대학 2학년 때까지는 학점을 잘 따려고 공부 열심히 했고 아르바이트도 여러 가지를 했어요. 과외, 택배, 노점상까지요. 그러다가 야학 교사, 굿네이버스의 위기가정 아동 방과후 돌봄, 루게릭 환우 단체 봉사 같은 활동도 했죠.” -돈도 벌고 봉사도 열심히 했네요. “네, 저는 공부란 걸 늦게 시작했어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공부를 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죠. 하하. 그러다가 고1 담임선생님이 지나가는 말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게 마음속에 남았어요. 따로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담도 했죠. 환경의 중요성을 조언해주시더라고요. 그때 (성남시) 분당구에 살았는데 서울로 이사를 가서 학교도 전학을 했죠. 제가 부모님께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렸거든요. 그리고는 정말 공부만 했어요. 2년으론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재수를 했고 대학(한양대 국제학부)에 진학했죠.” -대학에 가서는 어땠나요. “그때 제 삶의 방향은 경쟁에서 이겨 좋은 학점을 따고, 외국계 IT 기업이나 금융회사 같은 좋은 기업에 입사하는 거였어요. 그게 제가 생각한 성공이었고, 빨리 이루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지향이 바뀐 건가요? “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사건이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어릴 때 할머니와 꽤 오래 살았다고 했으니, 정말 남다른 존재였을 텐데. “네, 6개월 동안 입원하셨는데 틈만 나면 할머니를 찾아가서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일주일에 3, 4일은 갔죠. 돌이켜보니 그러면서 조금씩 제가 변한 것 같아요. 정말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앞둔 때였고 그 시간을 함께했으니까요.” -할머니와 어떤 얘기를 나눴나요. “대화라기보다 제가 할머니 말씀을 들어드리는 쪽이었어요. 처음에는 막연히 자주 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맛있는 거나 꽃을 사갔죠. 산책도 하고요.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말씀을 하시기 시작했어요. 처음 듣는 얘기도 많았죠.” -예를 들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참 어렵게 사셨거든요. 두 분 다 막노동을 하셨어요. 할머니는 건설현장에서 ‘함바집’ 일도 하셨고요. 그렇게 힘들게 4남매를 키우신 얘기를 계속 하셨죠. 할머니가 자주 하신 말씀이 ‘사람이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돌아가신 뒤 그 말씀, 특히 ‘사람’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남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장면도 있나요.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이었죠. 기력이 없으셔서 말씀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어요. 할머니께 저 왔다고 인사를 드리니까 우셨어요. 그러시면서 죽고 싶지 않다고 하셨죠. 그때는 말없이 안아드리기만 했는데 나중에 후회가 됐어요.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가 옆에 있을게요’라고 해드리고 싶어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많이 힘들었겠어요. “네, 한 2주 동안 집 밖에 나가질 않았죠. 삶과 죽음, 또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지, 나는 왜 살고 있는 건지, 지금 과연 잘 살고 있는지 같은 생각을 진지하게 하게 됐죠.” -할머니와 함께 산 기간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어릴 때 집이 어려워진 적이 있어서 5년 정도 할머니 집에서 살았어요. 할아버지 기억은 거의 없는데 할머니와 얽힌 추억은 좀 있죠. 두 분 다 매일 아침 나가셔야 하니까, 할머니가 저 먹으라고 밥을 해두시고 쪽지를 남겨두셨거든요. ‘맛있게 먹어라’ 같은 내용이었죠.” -할머니의 쪽지가 어쩌면 처음 받은 손편지일 수도 있겠어요. 떠올리면 어떤가요. “아쉬움이에요.” -왜 아쉬움이죠? “할머니가 쪽지를 남기셨을 때 저는 한 번도 ‘잘 먹을게요’ 같은 답장을 쓴 적이 없거든요.” -할머니 글씨도 생각이 나나요. “글씨를 잘 쓰시진 않았어요. 그런데 떠올리면 애정이나 따뜻함 같은 느낌이 떠올라요. 제가 기억을 미화한 건지 모르겠지만요. 글씨도 그 사람의 냄새를 담잖아요. 그 쪽지를 쓸 때 할머니가 저를 떠올리셨을 테니까 그런 감정이 드나 봐요.” -그래서 돈 버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자원봉사도 하게 된 거군요. “네, 맞아요. 그런 고민을 거치면서 서서히 삶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거죠. 적어도 누군가를 제치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게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그럼 어떨 때 행복을 느끼던가요. “생각해보니 누군가 제게 ‘참 힘들었지’ 같은 공감과 위로의 말을 해줄 때 저는 행복하더라고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도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에 귀를 기울이는 봉사활동을 해보기 시작한 거네요. “맞아요. 그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까진 못했지만, 막연히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죠.” -그러다가 군대에서 온기우편함 아이디어를 떠올렸고요. “네, 그래서 제대하고 바로 시작했어요.” -어떻게요? “일단 우편함을 스케치해서 목공소에 갖고 가서 제작을 했어요. 그게 첫 우편함인데 바로 저거예요.” 그가 사무실 한편에 세워둔 우편함을 가리켰다. 분홍 지붕에 몸통은 하얀색이다. 그는 “뭣 모르고 만들어 열쇠도 달지 못했다”며 웃었다. 현재 온기우편함은 색깔도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첫 우편함을 왜 삼청동 돌담길에 세웠어요? “삼청동 길을 걸을 때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었거든요. 서울시에 문의를 해보니 비영리 목적이라 설치가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세운 뒤 민원이 제기되면 철거해야 하고요.” -이름을 ‘온기우편함’이라고 지은 이유는 뭐예요? “따뜻함을 주는 단어를 넣고 싶었어요. 궁리를 하던 중에 책을 읽다가 ‘온기’라는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죠.” -처음부터 익명으로 편지를 받았나요. “네, 맞아요. 신상이 드러나면 고민을 털어놓기가 부담스러울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온기우편함에는 이런 안내 문구가 있다. “소중한 고민을 익명으로 넣어주시면, 느린 손걸음으로 답장을 보내 드립니다.” 그렇게 쓴 데에는 의미가 있을 거다. -먼저 ‘소중한 고민’에 담긴 뜻은 뭔가요. “고민이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붙인 수식어예요. 내가 하는 고민은 적어도 내게는 절대적이잖아요. 고민으로 하루 혹은 며칠이 꽉 채워지기도 하고요. 고민 때문에 몸도, 마음도 영향을 받죠.” -‘느린 손걸음’은요? “SNS를 떠올리며 썼어요. SNS가 상징하는 건 빠른 소통, 빠른 손놀림이잖아요. 주로 행복하고 기쁜 일을 빠르게 올리는 소통의 도구고요. 생각해봤어요. ‘과연 SNS에 힘들고 아픈 이야기도 쉽고 빠르게 올릴 수 있을까.’ 저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럼 온기우편함이 나만의 아픈 이야기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창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붙인 문구죠. 그리고 그렇게 보내주신 고민에 오랫동안 진심으로 고민해서 답장을 드리겠다는 뜻도 담았고요.” -온기우편함을 처음 세운 뒤 홍보도 했나요. “안 했어요. 시작했을 때는 한 주에 고민 편지가 10통만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답장을 써줄 온기우체부도 온라인 카페에 글을 올려서 모았는데 처음엔 10명이서 시작했어요.” -편지가 예상 외로 많이 왔다고 들었어요. “첫 주에 60통이 담겼어요. 저도 놀랐어요.” -무슨 고민이 많던가요. “지금도 많이 오는 내용이에요. 특히 20, 30대 중에서 이직한 분들의 사연이 많았죠. ‘이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하는 고민이에요.” -취업하고도 진로 고민이 이어지는 거군요. “네, 저도 방황을 하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답장에 제가 겪은 일을 쭉 쓰곤 해요.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많이 던지죠. 제가 저한테 했던 질문들이에요. ‘나는 왜 살까, 좋아하는 건 뭘까, 어떤 순간에 행복한가, 언제 살아 있음을 느끼나’ 같은 것들이죠. 이런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그 안에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함께 찾아나가 보자고 해요.” -답장을 쓸 때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계속 소통을 이어나가려 하는 느낌이네요. “온기 일을 하면서 갖게 된 원칙이 있어요. ‘정답을 드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할 때 이게 정답이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 있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같은 명령조의 답장은 하지 않아요. 대신 온기우체부들의 경험을 많이 적어요. ‘저도 그랬어요.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 함께 정답을 알아가 봐요’ 하는 식이죠.” -답장을 쓸 때 뭐라고 시작하나요. “고민을 남겨주신 분들을 ‘온기님’이라고 부르거든요. 대개 ‘소중한 온기님께’라고 써요.” -‘온기님’이라고 칭한 이유가 있나요. “익명으로 받는 편지니까 통칭하는 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온기우편함에 편지를 남기는 분들이니 ‘온기’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죠. 부를 때마다 따스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유치원생이든, 성인이든 ‘온기님’이라고 부르고, 편지도 모두 존댓말로 쓰죠.” -답장을 쓰기가 힘들었던 편지도 있을 텐데요. “네, 최근 보낸 답장도 그중 하나예요. 한 온기님이 생일날 남긴 편지였어요. 그 외에 나이나, 직업 같은 신상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죠. 생일인데 혼자서 길을 걷다가 너무 울적하고 쓸쓸해서 남긴다는 내용이었어요.” -내용이 아주 우울했나요. “손편지가 참 신기해요. 쓴 사람을 모르는데도 글씨에서 묻어나는 게 있거든요. 그 글씨조차 정말 외롭게 느껴지더라고요.” -답장을 어떻게 썼나요. “이틀간 고민을 했어요. 최대한 그 온기님의 처지가 되어 보려고 노력했어요.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우편함으로 보낸 편지였거든요. 그래서 그날 나도 그 길을 함께 걷는 심정으로 썼죠. 그때 날씨는 어땠을지, 홀로 걷는 걸음에 어떤 고민이 담겼을지, 그 길 초입 와플집에서 나오는 와플 향기를 맡으면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걷다가 온기우편함을 발견하고 쓸지 말지 고민하다가 편지를 쓴 마음은 어땠을지, 정동교회를 지나면 보이는 카페에 들르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저도 생일이 되면 우울할 때가 있는데, 생일이 특별해야 한다고 기대하니 그런 거 같다고 적었죠. 그날 제가 온기님과 함께 있었다면 그 옆을 함께 걸어드리고 싶었다고요.” -답장이 왔나요. “네, 진짜 그 카페에 갔었다고, 편지를 읽으면서 그날 누군가 나와 함께 걸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죠. 생일엔 우울했지만, 그날을 떠올리는 지금은 우울하지 않다고요.” -그런 답장을 받으면 어떤가요. “가슴이 찡해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그분을 생각하며 편지를 쓴 것밖에 한 게 없는데, 이렇게까지 위로가 됐다니 ‘정말 이 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죠. 다른 온기우체부들도 마찬가지예요.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동력은 우리 답장을 받은 온기님들의 회신이죠.” -답장이 갖는 의미도 되새길 것 같아요. “네, 처음에는 공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있는 것 같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지금은 마음의 안전망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정혜신 선생님이 쓴 ‘당신이 옳다’를 보고 적정심리학을 알게 됐거든요. 심리전문가나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보다 내 옆 사람의 공감에 더 큰 치유의 힘이 있다는 내용이잖아요.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에 그런 힘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온기우편함이 안전망이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요. 언제든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는, 그렇게 나를 지킬 수 있는 안전망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신호는 충분히 마음의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안전망을 꾸리는 사람의 생계는 어떻게 하나. -온기우편함도 운영비가 들 텐데요. “처음에는 사비로 우편함도 만들고, 편지지나 편지봉투, 우표를 샀어요. 그런데 규모가 커지면서 제 돈으로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죠. 그래서 비영리단체로 설립 신고한 뒤에는 온기우체부들 총회를 거쳐서 한 달에 1만 원씩 회비를 걷기 시작했어요. 그 돈으로 사무실 월세를 내고, 편지지와 편지봉투도 사고 있죠. 작년 하반기부터 우표는 한국우편사업진흥원에서 지원해주고 있어요.” 맞다, 우표. 편지를 보내려면 우표를 붙여야 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실을 발견한 듯 반가운 마음. 그런데 우표가 요즘 얼마더라. -우표 값도 들었겠네요. “한 달에 400통 정도 답장을 보내니까 우표 값도 상당했거든요.” -일반우표가 요즘 한 장에 얼마죠? “380원이에요. (미소)” -운영은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생계는 어떻게 꾸리나요. “그래서 저도 큰 고민의 시기를 거쳤어요. 단순하게 시작한 일이 커지면서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내 직업으로 삼아야 하나’ 고민이 됐죠. 누구보다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격증 따고, 군대 가서까지 컴퓨터공학 독학사 딴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씀이셨죠. 부모님과 갈등이 컸어요. 저도 한편으로는 ‘그게 맞는 건가’ 싶었어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중간에 그래서 IT 기업에 입사해 온기 일과 병행한 적도 있어요.” -힘들었겠어요. “네, 회사 출근하고 퇴근하면 온기 사무실에 와서 온기 일을 하고 집에 가서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죠.” -회사는 결국 그만뒀나요. “네, 그 생활을 1년 반 동안 하다 아내와 고민을 나눈 게 결심의 계기가 됐어요. ‘어떻게 살면 우리가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을까’란 말에 아내는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게 나도 행복한 거다’라고 해줬죠. 제 답은 온기 일이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가치 있다고 강하게 느끼거든요. 특히 답장을 받은 온기님들이 블로그에 와서 남기는 댓글이나, 보내주는 회신에 많은 힘을 받아요.” -그래도 온기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릴 수도 있어야 하는데요. “그간엔 유지만 되면 좋겠다고 여겼지 이 일을 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결론을 내고 나서 이 일도 직업이 될 수 있게 만들어 보자 싶었죠.” 현재 그는 ‘온기’를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설립 허가 신청을 하고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통과되면 기부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도 일반인의 후원이 가능하다. 그 수는 50명 남짓으로 아직 많지 않다. -온기우체부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다양해요. 20대 대학생부터 60대 이상 한 가정의 어머니까지요. 직업도 간호사, 소방관, 교사, 심리상담사, 디자이너, 주부로 각양각색이죠.” -공통점이 있나요. “있어요. 살면서 아파 본 적이 있는 분들이 지원하세요. 삶의 힘든 시기를 겪은 아픔이 있는 분들이죠. 일주일에 한 번씩 우편함의 편지를 제가 모두 수거해오면 다 같이 의견을 나누거든요. 그때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나같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 바람을 담아서 온기님들에게 답장을 쓰는 거죠.” -온기우편함에도 코로나19 영향이 있나요. “편지가 20% 이상 늘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생기는 고민, 우울감, 갈등이 많아요.” -지금까지 우편함에 들어온 편지가 대략 몇 통인가요. “4월 둘째 주를 기준으로 지금까지 온기님들의 편지에 보낸 답장이 9,192통이더라고요. 답장을 받을 주소를 남기지 않은 분들도 일부 있어서, 그걸 고려하면 대략 1만 통쯤 될 것 같아요.” -굉장히 위태롭게 느껴지는 편지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혼자 두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은 느낌이 들죠. 그럴 때는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을 꼭 알려드려요.” -30대 초반이지만, 많은 이들의 고민과 인생이 포개지면서 나이의 밀도가 높아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학을 잘하고 싶다’는 어린이의 고민부터, 학업 스트레스, 취업이나 진로 고민, 이별의 아픔, 번아웃의 위기, 삶에 관한 고민까지 정말 다양한 내용의 편지들이 오거든요. 제가 느낀 건 결국 고민의 시작점은 자기 자신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의 고민이 가장 힘들다는 거죠. 이 일을 하면서 좀 달라진 게 있어요.” -뭔가요.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 예전에 저는 내 신념과 다르면 ‘어떻게 그래, 그럴 수 없어’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누구나 안고 있는 고민이나 처한 상황이 다르더라고요. 자기한테는 그게 절대적이고요. 그래서 주변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봐도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왜 그럴까’ 하고 물어보고 싶어져요.” -묻는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뜻이죠. “언젠가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진짜 같다’고요. 이 일을 하는 제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어요.” -의미 있는 말이네요. “네, 저는 원래 빠르고 효율적으로 목표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그 전과는 다른 가치들이 제 삶을 채우고 있어요. 온기님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답장을 쓰는 시간, 우체부님들과 대화하는 시간, 아내와 있는 시간 같은 것들. 그리고 예전에는 보지 않던 하늘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고요.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가는 듯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조금 생각해 봐도 되나요?” 10여 분쯤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늘 진심을 지키고 싶어요. 내 자신에게는 물론, 누군가와 얘기하고, 인연을 맺을 때도요. 온기 일도 진심으로 하려고 하죠. 그게 제 초심이기도 하고요.” 들어보니, 그가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는 뭐라고 답할지 생각하려 그런 게 아니었다. ‘늘 마음속에 있지만 잘 지키지 못한 것 같은데 과연 말해도 되나’ 고민이 돼서였다. 그런 게 ‘진짜의 마음’ 아닐까 생각했다. 진심을 담아 세상에 온기를 흘려 보내는 사람들, 그 진짜의 온기가 느리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고 있다.

"오세훈·박형준 시장님! 동물공약 꼭 지켜주세요"

저는 2013년 7월 제주 앞바다로 돌아간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입니다. 함께 돌아간 춘삼이, 삼팔이와 방류된 지 8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 바다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죠. 바다에서 등지느러미에 '1번'을 단 저를 본 분도 많이 계실 겁니다. 제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방큰돌고래의 자연 방류는 세계 처음이었고, 또 소요되는 비용에 대한 논란까지 일면서 당시 엄청난 화제였죠. 그만큼 지방자치단체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시민뿐 아니라 우리 동물의 복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려준 사례였습니다. 예전 얘기를 꺼낸 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도시인 서울과 부산을 이끌 시장이 뽑혔다는 소식을 들어서입니다. 이제 각 선거에서 동물 공약은 필수가 됐는데요. 이번에 당선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 역시 각각 동물복지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오 시장은 지난달 유세 동안 반려동물박람회인 케이펫페어를 찾아 반려동물 진료비 표준화를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펫보험, 신탁 관련법 입법을 추진하고 서울시 지정 반려동물병원 역할을 확대하겠다고도 했지요. 반려동물 놀이터 공간 마련, 유기동물 구출·치료·교육·입양 플랫폼 구축 등 반려동물 동반시설과 유기동물 문제에 대한 공약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박 시장이 내세운 공약은 좀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후보가 강조한 동물 진료비 관련이 아닌 동부산 반려동물 테마파크 조성을 전면에 내세웠지요. 유기동물 보호, 반려동물 동반 공원, 동물 장례식장 등 관련 시설을 한 곳에 모으겠다는 것이고요.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부산에 제대로 된 동물종합병원이 필요하다'며 부산대 수의대 신설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물보호단체가 선거기간 각 후보에게 질의한 동물 정책에 대한 성적표는 어떨까요. 동물자유연대는 각 후보에게 위기동물대응, 채식문화장려, 공영동물원 공공성강화 등 20개 정책과제에 대해 물었는데요. 대부분 긍정적으로 답변을 했는데, 박 시장만 유일하게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 한국일보가 부산시에 확인을 했는데, "질의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일부러 답변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는 입장과 함께 답을 바로 전해왔습니다. 박 시장이 전에 반려견을 키우기도 했다며 동물복지정책을 펼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설명도 덧붙여 왔지요. 오 시장은 다른 후보보다 단계적 논의, 보류를 밝힌 항목이 많았는데요, 대신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동물보호 특별사법경찰단 지정, 위기동물대응센터 설립, 위기동물 응급처치와 고통경감 의무화에 대해서는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고요, 도심 생추어리(야생동물 보호소) 운영, 도심 야생동물 위해시설 조사 및 정비에 대해서는 국토교통부, 환경부 등과의 협의 필요를 이유로 보류입장을 전했는데요. 사실 동물보호 특사경의 경우 이미 2018년부터 경기도가 운영해 성과를 내고 있고, 울산시도 최근 시와 구∙군의 동물보호 감시원으로 지정된 공무원들을 특별사법경찰관리로 지정하고 특사경 연합체를 구성한 점을 감안하면 긍정적 답변을 받지 못한 건 다소 아쉬운 부분이긴 합니다. 박 시장은 위기대응센터 설립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 대해 채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요. 위기대응센터는 서부산 동물복지센터 건립 공약과 중복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동물복지 정책의 내용을 일일이 뜯어보고 어떤 게 시급한지 등을 따져볼 필요도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각 후보가 내놓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입니다. 각자 후보 시절 약속한 내용이라도 충실히 이행해주길 강력히 요구합니다.

“쉽게 쓰고 버리는 에코백은 정말 에코한가요”

가방 디자이너인 김승희(26) ‘기시히’ 대표는 고등학생 때부터 안 입는 청바지로 가방을 직접 만들었다. “시장에서 돈 주고 원단 사면 아깝잖아요. 대신 안 입는 청바지를 잘라서 가방을 만들었어요. 워싱으로 나오는 색감도 정말 다양하고, 질감도 두껍고 빳빳해서 튼튼해요. 가방 소재로 쓰기 좋았어요. 화려하게 디자인하지 않아도 패션 포인트가 될 수 있고요.” 그렇게 만든 ‘청바지 가방’이 요즘 인기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기시히 가방’이 회자되면서 이달 초 10개 한정 맞춤 주문이 1분 만에 마감됐다. 그가 만든 청바지 가방은 모두 디자인이 달라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그는 청바지 솔기를 모두 뜯어 해체한 뒤 만들고 싶은 가방의 형태와 크기에 맞춰 재단해 붙인다. 양쪽 대칭이 이뤄지도록 균형을 맞추고 주머니나 끈, 참, 버튼 등 장식을 어울리게 붙인다. 원래 청바지에 있던 지퍼나 로고, 주머니도 적절하게 배치한다. 색실을 활용해 자수를 넣기도 한다. 보통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청바지 두 벌은 필요하고, 완성하기까지 꼬박 하루 이상 걸린다. “갑자기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지난달 말부터 주문이 밀려들고 있어요. 감사하지만 많이 만드는 게 목표도 아니고, 제가 감당하기도 어려워서 한정된 수량만 주문받고 있어요.” 청바지로 가방을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환경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요즘에는 친환경이라는 이유로 에코백을 많이 쓰잖아요. 비닐봉지 대신 쓰는 건 좋지만, 하나의 유행이 돼서 과잉 소비되고, 저렴하니까 또 쉽게 쓰고 버려요. ‘에코백이 정말 에코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제 브랜드를 통해서 ‘재사용 해보세요’ ‘필요 없다고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좀 덜 사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청바지로 만든 가방은 비닐봉지로 포장하지 않고, 재사용하는 택배상자에 넣어 판매된다. 그의 목표는 ‘대구의 프라이탁’이다. 프라이탁은 트럭의 방수 천 등 재활용 소재를 활용해 가방을 만드는 스위스 브랜드다. “프라이탁처럼 못 쓰는 원단을 디자인적으로 보완해 충분히 아름답고 쓸모 있게 만들고 싶어요. 아무리 환경에 이로워도 안 예쁜 가방을 들라고 할 순 없잖아요. 지퍼가 고장나거나 얼룩이 묻었거나, 찢어져서 못 입게 된 청바지나 자주 입어서 너덜너덜해진 청바지를 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예쁜 가방으로 바꿨을 때 기쁨은 말도 못해요. 어떤 분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입으셨던 청바지를 가방으로 바꿔 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런 작업도 굉장히 의미 있었어요." 친환경이나 재사용이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 주문을 받고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주문을 받아보면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청바지인데, 안 입거나 호기심에 가방으로 만들고 싶다는 분도 많으시더라고요. 그럴 땐 ‘이 청바지는 중고로 팔거나 기부하면 원래 용도로 잘 사용될 수 있을 텐데, 굳이 뜯어서 가방으로 만드는 게 낭비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요.” 김 대표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가게도 대구에 있다. “제가 하는 일로 환경에도 유익한 영향을 끼치고 싶지만, ‘패션섬유의 도시’인 대구 지역에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프라이탁은 지역 생산자들이 개인 취향을 반영해 트럭 방수 천을 고른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저 혼자 하고 있지만, 지역 생산자와 협력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로컬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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