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속가능한 생태계, 건전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가기 위한 ESG적 시각에서의 이슈 탐구와 혁신 사례 소개.
베를린으로 가는 긴 출장길에 올랐다. 항공사가 제공하는 영화를 뒤적거리다, 며칠 전 알게 된 영화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을 갖고 감상하였다.
제76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및 사운드트랙 수상작이라고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관심 있게 보아야 할 지역이란 뜻인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담을 접한 수용소장 사택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수용소에서의 고함소리,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무심하게 던져진다. 사택 옆 수용소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와 함께. 이 영화는 1941년부터 4년간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범죄를 그 현장을 절절히 보여주는 대신, 그 범죄에 연관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특이한 영화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보이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까. 영화 내내 유대인이 고통받는 모습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간접적인 음향, 연기와 암시로 묵묵히 전달되었다. 고통받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택 내 정원의 꽃과 가축을 아끼는 소장의 모습은 인간의 이중성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야말로, 악의 평범성이라고 할까.
그 와중에 보이는 인간미 어린 장면은 그래서 소중하기만 했다. 강제 노역하는 유대인들이 먹게끔 밤중에 노역장 밭에 수십 개의 사과를 숨기는 소녀의 모습이 한줄기 위로로 남았다. 사택을 방문했던 소장의 장모가 이 상황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메모 한 장 달랑 남긴 채 급거 돌아가는 장면도 충분히 공감되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뒤 필자는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보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영화를 봐서인지, 유대인들이 나치 권력에 의해 100만 명 넘게 절멸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무거운 감정 못지않게, 평범한 독일인들은 왜 그런 반인륜적 행위에 눈을 감고 악을 일상화하고 담담히 받아들였는가에 대한 아쉬움을 무겁게 느꼈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철학적 논쟁부터, 개인적인 악의 처벌은 형사제도로 대응할 수 있는데 집단적 악에 대해서는 마땅한 대응책이 없는지 의문과 함께.
귀국길에는 베를린과 연관된 또 다른 영화를 감상하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생이 우승을 하고도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손으로 가렸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스포츠 영화였다. 이후 시간이 흘러 1947년 해방 뒤 개최된 보스턴 마라톤에서 난관을 뚫고 태극기를 달고 우승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감동스토리였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미군정 치하였기에 태극기 대신 성조기를 달고 참가해야 한다는 보스턴 마라톤 협회 측의 주장에 맞서, 한국이 해방되었고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절절하게 묘사되었다.
홀로코스트에서 느꼈던 문제의식을 보스턴 마라톤 영화에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결국 인류애 실천·사회적 가치 추구·ESG 실천은 톱레벨의 지시나 교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부터의 자발적 실천의지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악이 일상화된 상황에서도 사과를 숨기는 소녀가 있고 급거 귀국한 노모가 있었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절대 선을 추구하고픈 근원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구성원들에게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자발적 실천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것이 큰 숙제로 남게 된 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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