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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은 착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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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처벌·규제 위주 수습?
모든 위험을 다 법에 명시할 수 없어
법에 없어도 '안전' 작동해야 선진국
이태원 비극을 겪고 며칠을 보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간 너무 국뽕에 취했던 걸까. 몇몇 화려한 성과에 들떠 선진국 착시에 빠졌던 건 아닐까.
한 달 전 인도네시아 축구장에서 130여 명이 압사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우리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 아니, 아무리 라이벌전에서 져서 화가 나도 관중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상대 선수를 공격하는 게 말이 돼? 그렇다고 경찰은 거기다 대고 최루탄을 쏴? 그거 피하려다 이 끔찍한 사고가 생긴 거잖아! 영국 스페인 같은 유럽 축구강국에서 요즘 이런 일 생기는 거 봤어? 후진국이란. 쯧쯧.
이태원 참사 다음 날 인도에선 개보수공사를 마치고 막 재개통한 현수교가 몰려든 인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지는 바람에 140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무자격 업체의 날림공사, 관리감독 태만이 겹친 전형적 인재라고 한다. 만약 이태원 참사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인도에 대해서도 또 한번 저런 식으로 냉소하지 않았을까.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중동 등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적 소득 수준이 낮은 나라의 끔찍한 재난 소식들을 접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언젠가부터 우리 마음속엔 묘한 우월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린 선진국이고, 저런 나라들과는 다르다는.
틀린 얘기는 아니다. 세계 10위 교역 규모에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나라. 삼성 현대차 LG 같은 강력한 글로벌 브랜드를 가진 나라.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망과 행정 인프라를 갖춘 나라. 무엇보다 BTS,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 전 세계가 열광하는 K팝, K무비의 나라이니 이쯤되면 우쭐할 법도 하다.
그래서 이태원 참사는 더 납득이 안 되는 거다. 우리가 냉소했던 속칭 '후진국형' 재앙이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혐오와 분노에 사로잡힌 미치광이가 총을 난사하고, 끔찍한 폭탄 테러가 종종 발생하기는 하지만, 이런 류의 압사사고는 우리가 아는 선진국에선 일어나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그리고 세월호까지 우리에겐 비극적 기억이 참 많다. 그때마다 정부는 문제 된 위험요인을 법령에 담아 규제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고가능성을 다 법령에 반영할 수는 없는 일. 이태원 핼러윈 축제처럼 '주최자 없는 행사'는 그런 법적 사각지대였다. 앞으론 주최 없는 행사도 규제한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 또 어떤 형태의 사고가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세상 수만 가지 위험을 다 예상해 법에 담고 규정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법이 커버하지 못하는 위험까지 막을 수 있어야 진짜 안전 사회다. 구름인파가 모일 것 같으면 관할구청이나 경찰서가 본능적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나라다. 법에 명시되지 않아도 이런 안전 시스템이 작동하는 게 진짜 선진국이다. 수없이 많은 참사를 겪었고, 그로 인해 두꺼운 법령과 많은 처벌조항을 가졌음에도, 우리에겐 그런 선진국형 시스템, 법에 없어도 시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무형의 동력이 없었던 거다.
참사를 겪으니 '선진국' 취기에서 깨어난 느낌이다. 그렇다고 국뽕 아니면 헬조선식의 극단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야 하는데, 늘 그랬듯 처벌과 법령 개정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법 밖에 더 많이 존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려면, 공공영역의 체질과 마인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한 가지 더. 이 비극이 절대 정치적으로 오염되어선 안 된다. 누군가는 이 참사가 정권의 치명상이 되기를 바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정권에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라겠지만, 그런 셈법만 따진다면 150여 명의 젊은이들을 잃고도 우리 사회는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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