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일본 내 만주 인맥과 결탁 '흑막 정치'

입력
2015.04.20 13:10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前 총리

대륙 침략 보루였던 만주 개척 앞장

만주국서 軍복무한 朴 집권 환영

기시 측근들 의리ㆍ인정 내세워 朴과 유착 관계

한국 정부는 줄줄이 훈장 수여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70년 기시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70년 기시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기시는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박정희 정권의 대일 정책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의 일부 정치세력과의 ‘검은’ 유착이다. 마치 폭력조직 간의 거래처럼 의리를 내세우며 오랫동안 은밀하게 유지된 이 관계는 수시로 공식적인 외교채널을 압도하며 한일관계 전체를 왜곡시켰다. 그야말로 ‘흑막(黑幕) 정치’였던 만큼 이에 대해선 소문만 무성할 뿐 그 실체는 아직도 거의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비밀 해제된 한일 양국의 외교사료나 관련자들의 회고록 등을 참고하면 복잡하게 얽힌 흑막 속에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일본 총리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일본 내 만주 인맥과의 유대 관계가 유별났다는 점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이들 일본측 인사들에게 수교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광화장 등을 수여함으로써 ‘검은’ 유착 관계를 한일관계사에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 아베 외할아버지 기시와 박정희 정권의 인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는 진주만 공격을 결정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역임했고 대륙 침략의 보루였던 만주 개척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일본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3년 반 감옥에 갇혔지만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 전환 와중에 석방돼 정계에 복귀한 뒤 권력의 정점인 총리까지 됐다. 기시는 대미 자주노선과 ‘평화헌법’ 개정을 주장해 자민당 내에서도 비주류에 속했지만, 제도권 및 비제도권을 넘나드는 복잡한 인맥을 통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쇼와(昭和)의 요괴’로 불렸다. 아베 총리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脫却)’을 표방하며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외조부인 기시의 국가관을 사실상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런 기시가 전후 한일관계에 남긴 최초의 족적은 아무래도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의 포기일 것이다. 이승만 정권 이래의 한일회담은 일본이 남한 지역에 남긴 일본인의 재산에 대해 이른바 ‘역청구권’ 주장을 제기하면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때 총리로서 일본 국내의 반발을 억제하면서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 한일회담의 물꼬를 다시 튼 인물이 바로 기시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박정희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제6차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로 기시가 나서주도록 대일 공작을 벌이는 등 어떻게든 ‘기시 라인’에 줄을 대고자 했다.

기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 내 만주 인맥은 괴뢰국 ‘만주국’에서 하급 군인으로 복무한 박정희 군사정권의 출현을 환영했다. “다행히 한국은 군사정권이기 때문에 박정희 등 소수 지도자들 뜻대로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 의장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저쪽에는 국회도 없는 것이고, 만일 신문이 이것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박 의장이 그들을 봉쇄해버릴 수 있다.” 기시는 1961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위해 환영만찬을 준비했고, 박정희는 이런 기시에게 ‘메이지 유신의 지사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오른쪽)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오노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지간’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1962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오노 반보쿠 일본 자민당 부총재(오른쪽)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오노는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지간’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 “아들의 화려한 무대를 보고 싶다”

1963년 3월16일 박정희 의장이 당초 약속했던 민정 이양을 파기하고 군정 연장을 선언했는데 기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우익 세력은 이를 적극 지지했다. “지난달 도쿄에서 김종필씨는 ‘3월 중순 한국의 정치 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며 그 결과는 일본에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군정이 연장되면 일본에 유리하리라는 것은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면 어업 및 독도 문제 등 여러 난관이 손쉽게 제거될 것이라고 김씨가 말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기시의 측근으로 “정치는 의리와 인정(人情)”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던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당시 자민당 부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자민당 정권의 극우 실세들이 군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이후의 유신체제,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지지 및 지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시 라인’의 일본측 인사들이 생각하는 ‘의리와 인정’은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1963년 12월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오노 반보쿠는 “박 대통령과는 서로 ‘부모와 자식’이라고 서로 인정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면서 “아들의 화려한 무대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의 야당과 언론이 이 발언을 문제 삼아 오노의 입국금지를 주장했으나 오노는 방한을 강행했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은 최대의 애정 표현”이라면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 이에 앞서 오노는 독도를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자고 주장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과 일본측 우익인사들과의 ‘의리와 인정’의 관계는 과거 일제시대의 요정(料亭) 문화와 함께 점점 무르익어 갔다. “그날(1962년 12월12일) 밤 용산의 안가에서 박정희, 김종필, 오노, 나 이렇게 4명이 밤새 퍼 마셨다. 오노씨는 혈압도 높고 이런 자리에서 마시고 쓰러지면 곤란하다면서 먼저 침실에서 쉬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다음날 아침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해서 둘을 상대로 마셔야 했다. 이 두 사람이 술이 강해 과하게 마셨고 결국 정신을 잃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거기서 자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여기서 ‘나’는 이세키 유지로(伊關祐二郞)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이다. 일국의 국가수반이 처음 만난 일본 외무 관료와 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는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박 전 대통령이 기시 측근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 암흑조직의 거간꾼에게도 수교훈장

박정희 정권이 상대한 ‘기시 라인’ 인사 가운데 가장 기괴한 인물은 고다마 요시오(兒玉譽士夫)이다. 그는 한일 국교정상화에 공식적으로 관여한 기시와 그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 그리고 수교 때 일본측 수석대표를 맡은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 등과 함께 1970년 8월 상훈법에 따라 ‘국권의 신장 및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수교훈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았다.

고다마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해군에 텅스텐, 코발트 등 전략물자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고다마 기관’이라는 회사를 차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영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다음과 같이 황도(皇道) 사상을 찬양했다. “황도란 일본 민족의 혼과 피와 역사 속에 구현돼 온 인간생활의 올바른 원리이며 세계 최고의 절대 진리이다. 이는 오로지 일본 민족, 일본 국내의 진리일 뿐만 아니라 조만간 세계로 확대해 인류 공존의 원리로서 전 세계가 이에 귀일(歸一)토록 해야 한다.” 이런 고다마에게 일본의 전쟁은 “미국과 영국 등 진드기 같은 착취세력을 일소하는 것”이며 황도사상으로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일본 패전 후 기시 등과 더불어 A급 전범 혐의로 구속됐다가 운 좋게 풀려난 고다마는 그러나 갑자기 과거 ‘진드기’라고 매도한 미국 정보기관의 주구로 표변했다. 전시에는 황도에 대립하는 일체의 자유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그가 전후에는 “한국 대만 일본 등의 자유 아시아 제국이 연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다마는 ‘자유’를 앞세워 폭력조직을 동원해 노동운동을 탄압했고, ‘전범 동료’이기도 했던 기시 등과 연계해 일본 정계의 우익계열을 막후에서 주물렀다. 한일회담에도 막후의 조정자로 활발하게 관여했으며, 특히 국교정상화 후에는 청구권 자금 5억달러를 둘러싼 각종 이권에 개입해 박정희 정권과의 뒷거래를 주선했다.

고다마는 일본 정치사에서 최대 스캔들로 꼽히는 1976년 록히드 사건의 주역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미국 군수업체 록히드의 일본 대리인이었던 그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 등에게 항공기 판매를 위한 공작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확인돼 금권(金權)정치의 흑막으로 불렸다. 일본 내에서도 그에 대한 반감이 높아, 만년에 자택에서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던 배우가 조종하는 소형 비행기에 의한 ‘특공대 공격’까지 받았을 정도다. 박정희 정부는 이처럼 괴이한 검은 인물에게까지 수교훈장을 수여하며 ‘사례’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박정희 정권과 기시로 대변되는 일본의 일부 정치세력과의 결탁이 ‘의리와 인정’의 관계만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이른바 만주 인맥이 연출한 인적 네트워크가 이후 제도권으로 진입해 전후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며 왜곡시킨 경위에 대해선 다음 회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일관계가 이처럼 꼬인 것은 비정상을 정상화한 과거에 대해 눈감아온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