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의장, 해방 후 첫 한일 정상회담서 과거사 안 따져

입력
2015.03.23 13:58

1961년 이케다 총리와 청구권 논의 "법률상 근거 있는 것 인정해 달라"

포기 않던 전쟁 배상 요구도 접어 '이승만 라인'까지 협상 테이블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1일 저녁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자료 국가기록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1일 저녁 일본 총리관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자료 국가기록원

“한일 양국은 과거에 명예롭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춰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서 공동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친선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961년 11월11일 오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당시 일본 총리가 마련한 환영만찬에서 이렇게 과거사를 접겠다고 공언했다. 이어 이튿날인 12일 오전 10시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전 대통령과 이케다 전 총리는 서로에게 ‘명예롭지 못한’ 식민·피식민의 과거사는 일절 따지지 않은 채 그야말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서만 논의했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문서 등을 토대로 당시 회담의 핵심 부분과 박 전 대통령의 일본 내 행적을 재구성한다.

“청구권 말고 뭔가 다른 이름도 좋다”

이케다 전 총리와의 단독회담에서 박 전 대통령은 우선 청구권 문제에 대한 대략의 테두리를 정해 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이케다 전 총리는 청구권 문제에는 남한 지역에 있던 일본인 재산을 몰수토록 한 미군정령 제33호를 어떻게 해석해 할지, 또 큰 틀에서 해결 방안을 제시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에 대한 미국 정부의 해석을 어떻게 봐야 할지 등 복잡하게 고려할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대장성 관료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의 바통을 이어받은 일본 보수본류의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일본 측 외교문서는 이 같은 이케다 전 총리의 장황한 설명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인상이었다고 적었다.

이때 박 전 대통령이 협상카드를 흔들었다. “요컨대 법률상 근거가 있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비록 정치적 레토릭의 성격이 강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던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전면 부인한 것이다. 앞서 과거사를 접기로 했으니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 청구도 포기한 셈이어서 이제 남은 것은 일본이 치른 전쟁에 따른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청구권, 그것도 법률상 근거가 있는 것으로 제한된 것이다. 이는 한국은 일본과의 전쟁 당사국이 아니므로 배상을 요구할 수 없고, 다만 영토의 분리로 인한 민사상 청구권을 명확한 근거를 갖춰 청구해야 한다는 일본 측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 발언이기도 했다.

당연히 회담에 탄력이 붙었다. 이케다 전 총리는 “개인 청구권에 대해서는 일본인 수준으로 취급한다는 원칙을 갖고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서 “은급(恩級), 귀환자 위로금, 우편저금, 간이보험금 등을 생각하고 있고, 또 소각한 일본은행권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군인·군속의 유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고려하겠다”고 화답했다. 박 전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반출된 지금은(地金銀)에 대해서도 청구권이 있다”고 말하자 이케다 전 총리는 “그것은 조선은행이 업무상 통상적인 매매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일본 측은 청구권으로 5,000만달러 운운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자 이케다 전 총리는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郞) 외상이 그렇게 말한 모양인데 나의 의도는 아니다”고 안심시켰다. 이케다 전 총리가 “청구권이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상쇄(相殺) 사상(일본의 한국에 대한 청구권(역청구권)과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상계한다는 의미)이 나온다”고 지적하자 박 전 대통령은 “청구권이라고 말하지 말고 뭔가 적당한 이름이라도 괜찮다”고 답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2일 일본 도교에서 주최한 만찬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시절의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 일제 예비역 중장과 건배하고 있다. 자료 NHK '한일관계는 이렇게 구축되었다'(2010년 8월1일 방영)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1월 12일 일본 도교에서 주최한 만찬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시절의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 일제 예비역 중장과 건배하고 있다. 자료 NHK '한일관계는 이렇게 구축되었다'(2010년 8월1일 방영)

“국교를 맺어 일본의 지도를 받고 싶다”

예상 이상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이케다 전 총리는 “청구권 문제의 해결은 어업 문제와 동시에 해결했으면 한다”면서 골칫거리였던 ‘이승만 라인’(평화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일본이 청구권 문제에서 납득할 만한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도 신축성 있게 평화선 문제를 다룰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승만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사실상 유일한 대일 압박 카드로서 기능했던 평화선이 청구권 금액과 연동된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한국, 사실상 이승만 라인 포기”라고 대서특필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경제관료 출신답게 한국 경제에 대한 조언을 쏟아 냈다. 박 전 대통령이 “미국 원조 40억달러가 전혀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고민을 털어놓자 이케다 전 총리는 전후 미국의 대일 원조자금을 경제발전에 활용했던 자신의 성공담을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농업문제와 관련해 이케다 전 총리는 농지개혁의 필요성, 미개간지의 목초 조성 등을 언급한 후 “한국의 인구는 재산”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의장은 “빨리 국교를 정상화해 농업에 대해서도 일본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20만㎾ 정도의 전력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전력을 확장하면 한국만으로도 훌륭한 공업국가가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일본이 청구권으로 지불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국의 경제회복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다만 일본으로서는 무상원조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저리의 경제원조를 고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은 “한국도 자존심이 있으므로 무상원조는 바라지 않는다. 경제협력 등의 명목으로 장기저리 차관이 좋을 것”이라고 동의한 후 “소비재가 아니라 자본재를 희망한다”고 부언했다. 이케다 전 총리는 “자본재가 좋을 것이다, 소비재는 한국 국내에서 생산하면 된다”고 화답했다. 이렇게 경제협력을 빙자한 일본 자본의 한국진출과 청구권 문제의 봉인이라는 한일관계의 새 틀이 무르익고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왜곡된 한일관계는 한국 국민감정상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같은해 12월 7일 기자회견에서 대일 청구권을 차관도입으로 대체하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나는 경제협력은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국교가 정상화된 후에나 생각할 수 있다고 이케다 전 총리에게 말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한일 양국이 공개한 박 전 대통령 이케다 전 총리 회담록을 참조하자면, 박 전 대통령은 대일 청구권에서 크게 양보하면서까지 일본 자본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이 같은 박 전 대통령의 태도는 이케다 전 총리가 “양측이 99% 합의했다”고 발표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일본 측을 만족시켰다. 이케다 전 총리는 “앞으로 한일회담과 관련해 국내적으로 문제가 생겨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으면 비밀리에 연락을 달라”며 정치적으로도 적극 협력할 뜻을 밝혔다. 회담 직후 이케다 전 총리는 측근들에게 박 전 대통령을 “참 좋은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일본 외교문서는 전한다.

“메이지 유신의 지사와 같은 마음이다”

과거를 따지지 말고 미래만을 생각하겠다던 박 전 대통령은 그러나 정상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느덧 자신만의 ‘과거사’로 회귀하고 있었다. 12일 낮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및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 전 부총리가 주최한 환영회에서 박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젊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미숙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은 구국의 념(念)에 불탔기 때문으로, 메이지(明治) 유신 때 지사(志士)의 마음으로 해 볼 것이다”라고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은 기시의 고향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통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존경한다면서, 국가건설과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스스로 ‘만주국의 설계자’를 자임해 온 기시는 “국민의 박수를 받는 조약을 만들려 하면 진정한 국교정상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100년 후에 되돌아봤을 때 좋았다고 평가받는,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현재의 국민감정에 영합하려 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고 회고했다. 이를 지켜본 아카기 무네노리(赤城宗德) 자민당 총무회장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겸손하고 성실하다, 꾸준히 순조롭게 할 것 같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통산상은 “용맹하다기보다는 온후하고 교활함을 모르는 것 같다”고 각각 높게 평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저녁 본인이 주최한 만찬에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 일제 예비역 중장과 동기생들을 특별히 초대해 회포를 풀었다.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 대표로서 뵙게 된 것에 감사 드립니다.” 박 전 대통령이 과거의 은사에게 깍듯하게 보은의 술잔을 올리자 동석한 이케다 전 총리를 비롯한 참석자 전원이 박수를 보냈다. 이케다 전 총리는 “동양의 예의 사상으로서 은사를 섬기고 선배를 존중하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극찬했다.

“정치라든가 외교는 이것이 전부 인간이 행하는 일이라면 인간 대 인간이 무릎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30시간 동안의 일본 방문을 마친 박 전 대통령은 이처럼 강렬한 소회를 남긴 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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