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벼랑에 몰린 한국 외교, 비장한 각오를 다지라

입력
2015.03.20 16:56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다음달 말 방미 기간에 의회 상ㆍ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것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합동연설 초청에 관한 전권을 지닌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방침을 정했고, 이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야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수십 차례 기립박수로 화답하는 합동연설은 미국이 외국 정상에 부여하는 최고의 예우다. 그 만큼 갖기 힘든 자리다. 미일관계가 사상 최고였다는 부시-고이즈미 시절에도 미 의회는 진주만 공격 등 일본 과거사에 대한 미 참전용사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합동연설을 불허했다.

일본 총리가 미 의회 합동연설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 태도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역사수정주의적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 미국이 합동연설을 허용한 것은 연설 내용과 관계없이 자체로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 양국이 더 이상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언하는 동시에, 미일관계가 전후 체제에서 탈피해 새로운 동맹관계로 진입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한일관계, 대일정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이 일본과 신밀월 관계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동안 우리 외교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가 연설할 자리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사태 다음날 “치욕의 날”이라고 분노를 토했던 곳이다. ‘설마 그런 자리에 아베 총리를 세우겠는가’하는 안이한 생각이나 ‘의회 소관이라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책임회피로 숨을 것이라면 더 이상 외교당국에 기대할 건 없다. 그렇다면 과거사는 한중일 공동책임이라는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 같은 미 정부 핵심 외교당국자들의 일본 편향적 태도는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한인단체들의 노력으로 버지니아주에서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법안이 통과되는 쾌거를 이뤘을 때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반대 로비에 나섰는데 우리 정부는 뭘 했느냐”는 비아냥이 터져 나왔던 게 지난해다.

미일의 유착은 남북 및 한일 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와도 직결되는 변곡점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ㆍTHAAD)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논란, 자위대의 집단적자위권 행사와 해외 수시파병을 위한 일본의 공세적인 안보법제 개정 움직임은 모두 달라진 미일관계에서 파생된 단면들이다.

올해는 종전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이 되는 해다. 과거사 청산을 통한 신한일관계 구축이라는 희망은커녕, 한국이 미일외교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치욕의 원년이 될 수도 있다. 정부, 특히 외교당국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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