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보상 요구권 있다" 집요한 망발에 숨겨졌던 노림수

입력
2015.02.23 11:47

한국 측 격분시킨 日 구보타 "일제 36년간 많은 은혜 베풀어"

협상전략으로 계산된 망언, 한국의 대일 청구권 깎아 내려 활용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1945년 10월 어선을 이용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항구로 귀환하고 있다. 자료 : 미 국립문서기록청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1945년 10월 어선을 이용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항구로 귀환하고 있다. 자료 : 미 국립문서기록청

“일본 측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었고, 철도를 깔았고, 수전(水田)을 늘리는 등 많은 은혜를 한국인에게 베풀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차 한일회담 재산청구권위원회 회의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하는 망발을 쏟아 냈다. 이에 맞서 한국 측은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고 맞섰다. 구보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구보타의 잇단 망언으로 한일회담은 이후 4년6개월간 중단됐다. 구보타 개인은 끝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 한국 내정에 개입할 것을 일본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일 양측의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구보타는 결코 한순간의 격정에 휩싸여 폭언을 내뱉은 게 아니었다. 당시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男) 외상은 “구보타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뿐”이라고 공언했다. 구보타의 언급은 이후 일본 정치인들이 수없이 반복해 온 과거사 관련 망언의 시작에 불과하며, 여기에는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왜곡된 역사인식, 즉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과 원래 일본 것이었던 한국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황당한 피해의식이 혼재돼 있다. 특히 구보타 망언의 이면에는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 요구를 최대한 억제, 봉쇄하기 위한 일본 측의 집요한 협상전략이 숨겨져 있다.

‘역청구권’ 주장에 말려든 한국

일본 측은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 때부터 90억~120억엔으로 추정되는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 보다 많은 120억~140억엔의 대한국 청구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발 더 나가 일본 측은 “한국전쟁으로 훼손·멸실된 한국 내 일본 재산을 원상회복하고 변상하라”고까지 요구했다.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 요구에 맞서 이른바 ‘역(逆)청구권’을 제기한 것이다. 식민지배와 관련해 일본 자신도 손해를 보았고 더욱이 일본이 한국에 남겨 놓은 자산이 오히려 더 많다고 강변하면서 사실상 양측 모두 청구권을 포기하자고 회유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이 강하게 반발하자 수석대표인 구보타가 한국 측의 민족감정을 거스르는 망언을 의도적으로 쏟아 내 아예 회담 자체를 파탄내도록 유도한 것이다.

격분한 한국 측은 1953년 10월 21일 회담 결렬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같은 날 일본 외무성은 “한국 측이 우리 측의 비공식적인 사소한 발언을 고의로 왜곡해 회담을 일방적으로 파괴했다”고 맹비난했다. 회담이 결렬된 후 미국이 일본에 발언 철회를 권유하며 회담 재개를 종용하자 일본은 구보타 망언을 취소하기는커녕 한술 더 떠 망언을 취소하는 조건으로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초기 한일회담은 한국 측에 엄청난 감정적 상흔만 남긴 채 깨지고 말았다. 더욱이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관철하기는커녕 회담 결렬 후 오히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청구권 주장을 저지하기 위해 외교력을 소진해야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측 관계자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일본이 한국 재산의 85%가 자기 것이라고 빼앗으려 한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고압적이고 모욕적인’ 일본을 막아달라고 매달렸다. 일본의 도발에 의해 회담이 결렬된 이상, 한국 측은 일본이 자발적으로 구보타 망언을 취소하고 역청구권 주장을 철회할 때까지는 협상을 재개할 명분이 없었다. 반대로 일본은 이 두 가지 조건을 틀어쥔 채 상당기간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 요구를 저지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 측은 일본 측의 계산된 ‘망언 전략’에 말려든 것이다.

이른바 '구보타 망언'으로 초기 한일회담을 경색시킨 구보타 간이치로 일본 외무성 참여.
이른바 '구보타 망언'으로 초기 한일회담을 경색시킨 구보타 간이치로 일본 외무성 참여.

계산된 망언

애초부터 일본 측은 역청구권을 요구하면 한국 측이 격한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본 측이 제1차 한일회담에 임하기 직전에 작성한 정책보고서는 “궁극적으로 남한 지역에 존재하는 일본 재산은 무상 양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역청구권 주장이 사실상 교섭수단에 불과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은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 b항을 통해 미국의 조치, 즉 미군정이 재한 일본인 재산을 몰수해 이를 한국 정부에 이양한 행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이미 약속한 터였다.

일본 측의 역청구권 주장은 당시 나고야대학에서 국제법을 담당하던 야마시타 야스오(山下康雄)의 법리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야마시타는 1945년 9월 재한 일본재산을 귀속시킨 미군정령 제33호와 관련, “적산(敵産) 관리조치에 불과하므로 이에 따른 재산 처리는 최종적인 소유권 이전이 아니다”면서 원래 소유권자인 일본 측에도 청구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최종적인 전후처리인 강화조약의 규정을 사유재산 존중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교묘하게 왜곡,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 정부 스스로도 1962년 작성한 ‘회담경위기록’에서 “법이론으로서 입론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왜 한국에 남긴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해 한국을 자극한 것일까.

첫째, 그것은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 요구와의 상쇄 혹은 대폭적인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대항적인 청구권 혹은 정치적 교섭을 위한 폭탄”이었다. 이와 관련, 니시무라 구마오(西村熊雄)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은 “일본에 있는 한국 재산에 대한 한국 측의 과다한 요구로부터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일본은 양측이 청구권을 상호 포기하길 기대하며 한국 측이 이에 호응하도록 몰아붙일 생각”이라고 미국 측에 털어놨다. 요컨대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을 깎아내리기 위한 정치적 압박수단이었던 셈이다.

둘째,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패전 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의 사유재산 보상 요구 운동을 감안한 것이기도 했다. 해방 당시 한반도에는 약 70만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사실상 한반도의 ‘지배계급’으로서 재산을 축적해온 이들은 그러나 일본 패전 후 점령군 미군의 통제 하에 거의 빈손으로 일본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일본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뭉친 이들은 사유재산 불가침의 원칙을 내세워 한반도에 남긴 재산에 대한 조사와 보상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많은 보탬이 됐다”는 구보타의 언급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견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재한 일본인 재산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을 배려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57년 5월 ‘귀환자 급부금 등 지급법’을 제정해 미흡하나마 이들의 국내보상 요구를 봉합했다.

셋째, 일본이 난데없이 한국에 남겨 둔 재산에 대해 청구권을 주장한 것은 한국으로 재진출하기 위한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청구권 문제를 남겨 두겠다는 전략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관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에 남겨 둔 공장 등을 재가동하길 희망하며 궁극적으로는 한국과의 경제 재통합이 이뤄질 때까지 청구권 문제를 보류하고자 했다. 실제 강화조약 체결 후 일본은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과 배상 협상을 잇달아 전개했는데 한결같이 일본 경제의 아시아 재진출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추구했다. 일본은 한국과의 청구권 협상도 식민지배 배상 형식이 아닌 경제 재진출 및 재통합이라는 맥락에서 때를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망언은 현실이었다

결국 한일회담은 1957년 말 일본이 미국 측의 강화조약 해석과 중재활동을 매개로 ‘구보타 발언’을 취소하고 역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약속함으로써 재개됐다. 그렇다면 구보타 망언은 정말 취소된 것일까. 돌이켜보건대 우선 1965년 한일협정이 일제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사실상 불문에 부쳤다는 점에서 구보타의 식민지배 옹호론 또한 제대로 취소되지 못했다. 오히려 한일협정에 직접 서명했던 일본 측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는 1965년 1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은 좋은 일을 하려고, 조선을 더 낫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일본의 노력은 결국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20년쯤 더 조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고 말하며 사실상 구보타 망언을 반복했다.

더욱이 한일 청구권 협상이 결국 경제논리에 기초한 정치담판으로 귀결되면서 일본 측의 역청구권 주장은 사실상 당초 의도한 전략적 목표를 이룬 셈이 됐다. 한일협정에서 청구권 문제 자체가 희석됐다는 점을 상기하면, 역청구권 주장을 통해 한국 측의 대일 청구권을 봉쇄하려 했던 일본 측의 노림수가 결과적으로 통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측은 역청구권 주장을 통해 식민지배 청산 문제를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경제 재진출의 길을 열 수 있었다. 구보타 망언은 망언이 아니라 현실이 된 것이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