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못 챙긴 '갈팡질팡 反日'… 日 역청구권 공세에 무력

입력
2015.03.09 11:44

이승만, 日에 대해 모순적 태도… 정부수립 후 日과 통상 재개 적극적

美와 한일관계 놓고 줄다리기 '반공' 결합해 반일정책 강경화

이승만(왼쪽) 대통령이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일본 총리의 개인 특사자격으로 경무대를 방문한 야쓰기 가즈오(오른쪽)를 맞고 있다. 일본의 낭인 정치가인 야쓰기는 일본 정재계와 한국 및 대만 간의 브로커 역할을 했다. 자료 국가기록원
이승만(왼쪽) 대통령이 1957년 기시 노부스케 일본 총리의 개인 특사자격으로 경무대를 방문한 야쓰기 가즈오(오른쪽)를 맞고 있다. 일본의 낭인 정치가인 야쓰기는 일본 정재계와 한국 및 대만 간의 브로커 역할을 했다. 자료 국가기록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모두 잡아가버려 지금은 한 마리도 없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1월5~7일 마크 W.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에 호랑이가 있는지를 묻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일본 총리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가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의 선봉장으로 특히 호랑이 사냥에 능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요시다의 같은 질문에 대해 이승만은 “이제 한 마리만 남았다”면서 스스로를 일본에 맞설 호랑이에 비유했다고도 전해진다. 일본측 외교문서에 따르면 수년 후 요시다는 호랑이 이야기의 진위에 대해선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은 채 “그때 내가 이승만과 좀 더 잘 해 뒀으면 그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 늙은이는···”이라고 혀를 찼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에 관한 한 이승만은 한 치 양보 없는 강경주의자로서 한일 양측에서 각인되어 왔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승만은 국내에서 반일을 주창하면서도 오히려 친일파를 중용하는 이중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일본에 대해서도 매우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때는 식민지배의 울분조차 초월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다, 이후에는 고집불통의 극렬한 반일투쟁가로 변신했다.

1953년 1월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오른쪽) 대통령이 미국 측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다. 요시다는 전후 일본의 설계자로 통한다. 자료 국가기록원
1953년 1월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오른쪽) 대통령이 미국 측이 마련한 만찬장에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다. 요시다는 전후 일본의 설계자로 통한다. 자료 국가기록원

“우리는 과거를 망각할 것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에 정상적인 통상관계가 재확립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하려 할 것이며, 또한 망각할 것이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22일 발표한 이승만의 성명이다. 일본에 사과조차 요구하지 않다니 식민지배로부터 갓 해방된 국가의 초대 대통령의 대일 인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관용’을 보인 것이다. 실제 이승만은 정부수립 직후부터 무엇보다 일본과 통상을 재개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가령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총사령부(GHQ)가 개입하는 가운데 1949년 10월 서울서 열린 한일 무역협정에 대한 평가회의에서 윤보선 상공부장관 등은 일본인 기술자 등 전문가를 한국에 다시 불러 경제부흥에 기여토록 하겠다는 이승만의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모두에서 언급한 일본 방문에서도 이승만은 “나는 한일 양국이 과거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양국을 위협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 신문은 클라크 장군 관저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승만은 요시다가 한국이 이웃관계에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자 대단히 흡족해 했다고 전한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청산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9월30일의 시정연설에서 그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강화회의에 참여해 (대한)민국이 대일 배상을 요구하는 정당한 권리를 보유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특히 미국을 설득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대받지 못했고 한일관계는 배상은커녕 청구권을 다투는 관계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이승만 정부는 내부적으로는 일찌감치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 요구를 접었다. 이승만 정부가 한일회담에 대비해 1949년 9월에 작성한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일제 식민지배 전체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 행위, 즉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한국 및 한국인의 피해 보상만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실제 한국 정부는 1952년 2월 시작된 제1차 한일회담 벽두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보상 요구를 포기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자의든 타의든 한일회담이 그야말로 민사적인 청구권을 다투는 장으로 전환되자 일본측은 거꾸로 일본도 한국에 대한 청구권이 있다고 맞섰다. 1953년의 ‘구보타 망언’이 상징하는 일본의 이른바 역(逆)청구권 제기를 계기로 한일회담은 이후 4년여 동안 공백 기간을 맞는다. 1953년 이후 퇴임할 때까지 이승만의 대일 정책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관철하기는커녕 일본의 역청구권 역풍을 막아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일본이 지불할 청구권을 미국에 요구

일본의 역공에 당황한 이승만이 기댄 곳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청구권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의도는 이승만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다. 미국은 일본의 청구권 주장이 부당하다면서도 일본이 청구권을 포기하는 만큼 한국의 대일 청구권도 삭감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미국은 이렇게 한일관계가 꼬이게 된 주된 원인이 이승만의 맹목적인 반일정책에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자국이 중재한 한일 간의 물밑교섭이 잇따라 무산되자 한국에 제공해온 원조를 무기로 이승만의 기를 꺾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1954년 7월 이승만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처음부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했고, 한일관계가 논의된 3일째의 29일에는 회의 중에 서로 뒤질세라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살풍경이 연출됐다. 존 F.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을 위해 반일정책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일본은 아직도 한국을 식민지로 간주한다”고 비난하면서 미국의 ‘부당한’ 압력에 저항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미국측의 이승만 설득은 물거품이 되는 듯싶었지만, 1954년 11월17일에 타결된 한미 합의의사록에는 휴전협정의 준수, 원조물자의 대일 구매 불배제 등 거의 모든 쟁점에서 미국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됐다. 다만 이승만의 강력한 거부로 한일회담 재개를 원조 제공의 조건으로 명기하고자 했던 미국의 시도만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한일관계를 둘러싸고 미국측과 줄다리기를 하는 가운데 이승만이 대일 청구권을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 대신 갚을 것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한국측은 1954년 10월 제출안 합의의사록안 제7항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한 금괴를 반환하지 않으면 미국이 원조 2억8,000만 달러를 한국에 제공해 상환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측 대일 청구권의 상당 부분을 미국의 경제원조로 대체해 달라는 발상인데, 국제관계나 실현가능성을 무시한 일방적 요구였다.

유일한 대일 압박수단은 일본어선 나포

미국의 강한 견제를 받아온 이승만의 반일 정책은 반공 노선과 겹치면서 더욱 강경해졌다. 요시다의 뒤를 이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일본 총리가 중국 접근 정책을 펴고 그것이 소련과의 국교정상화 및 북한 접근으로 이어지자 이승만의 일본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승만은 반공 전도사를 자임하며 태평양동맹이나 아시아민족반공연맹 등 지역안보기구의 결성을 추진했는데, 이때 일본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새로운 군국주의자들이 공산주의 독재 군대와 합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주장도 마구 쏟아냈다. 하지만 일본은 재일교포의 북송을 강행하면서 이승만의 심기를 더욱 자극했다. 이승만은 1959년 2월10일 “일본이 이제는 인도주의를 운위하며 10만명 이상의 한국인을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으로 보내려 한다”고 일본을 맹비난했다. 이승만의 반일은 반공과 맞물리면서 극대화됐지만, 북송을 막지 못했다. 이는 다만 국내적으로 이승만 정부의 실정과 부패, 비민주성에 대한 국민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정권유지책으로는 유용했다.

일본과 미국에 대해 정치공세 이외에는 대항 수단이 없었던 이승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물리적인 협상카드가 바로 ‘이승만 라인’을 넘어온 일본어선을 나포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평화선’으로 불려온 이승만 라인은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미 극동군사령관이 1945년 10월 일본인의 어로 범위를 획정한 ‘맥아더 라인’을 근거로 한국이 1952년 일방적으로 설정된 수역으로, 이승만 정부는 이 안에 들어온 일본어선을 엄격히 단속했다. 이승만 정권 내내 부산, 목포항 등에는 나포된 일본어선으로 넘쳐났고, 최대 1,000명이 넘는 일본어부들이 한국 국내법에 따라 수감됐다. 이에 맞서 일본측은 재일한국인 수천명을 강제퇴거 대상자로 분류해 오무라(大村)수용소 등에 가둬놓고 한국측에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한일 모두 사실상 ‘인질 외교’를 벌이는 마당에 청구권 등 현안을 논의하긴 어려웠다.

이승만은 일본 문제에 관한 한 일일이 챙겼다. 때문에 대일 외교를 전담했던 주일대표부는 외교부와는 별도로 경무대에 사사건건 영문서한을 보내 이승만의 승낙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공식 외교라인이 일본측과 간신히 합의한 것도 막판에 뒤집기 일쑤였다. 이승만 정권 9년 6개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한일회담이 열렸지만 시종 내실 없는 ‘빈손 회담’의 연속이었다. 전후 한일관계의 출발점이 제대로 설정되지 못했기에 반동도 컸다. 그 결과가 바로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청구권은 물론 과거사마저 봉합한 박정희 정부의 그릇된 정치담판이었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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