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日 징용미수금 제대로 전달도 하지 않았다

입력
2015.03.02 15:10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강제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임금 퇴직금 연금 보험금 등을 일절 챙기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패전 후 일본기업들은 이들에 대한 미불금을 ‘거소불명, 통신불능’이라는 이유로 공탁(供託) 조치했다. 한일회담에서 한국정부는 징용노동자의 미수금 문제를 대신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 대가가 바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로 상징되는 이른바 ‘청구권 자금’이다. 한일 양국은 1965년 청구권협정 제2조에서 이로써 모든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고 이에 대해선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일본에게서 받았다는 ‘청구권 자금’을 피해 당사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한국정부가 미적거리는 사이 대법원은 2012년 5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까지 소멸됐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일본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수많은 개인의 희생을 억누른 채 구축된 ‘1965년 체제’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된 한국인들이 해저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였던 나가사키 인근의 하시마(端島). 미쓰비시가 운영했던 이 탄광섬은 군함처럼 생겨 ‘군함도’로도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징용된 한국인들이 해저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였던 나가사키 인근의 하시마(端島). 미쓰비시가 운영했던 이 탄광섬은 군함처럼 생겨 ‘군함도’로도 알려져 있다.

● ‘공탁’이라는 그늘 속에 숨은 일본기업들

패전 후 일본정부는 그 동안 지급하지 않았던 조선인 군인·군속 및 노무자의 미지급 임금, 원호금, 예금, 저금, 보관금 등 각종 미불금 가운데 일정 금액을 당사자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공탁하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공탁은 채무자가 변제하려 해도 채권자가 수령을 거부해 변제가 불가능한 경우 또는 채권자를 찾을 수 없을 때 이뤄지는 민법상의 행위이다. 공탁을 통해 채무자는 해당 채무와 관련된 법적 의무에서 해방된다. 상당수 일본기업들은 이 제도에 편승해 진작 지급했어야 했던 미불금 채무에 대한 부담에서 일단 벗어난 것이다.

물론 일본기업들이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공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일본 패전 후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은 홋카이도(北海道) 유바리(夕張) 탄광 등 일본 각지의 광산, 공장에서 본국 귀환과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특히 1945년 10월 설립된 재일조선인연맹은 일본기업을 상대로 조선인 노동자의 미수금을 위탁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당시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총사령부(GHQ)는 무엇보다 치안 유지의 차원에서 한국인 징용노동자의 본국 귀환을 서두르는 한편, 이들의 미수금을 예치토록 일본정부에 지시했다. 이때 일본정부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공탁이었고, 이러한 미불금 공탁은 199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일본이 취한 미불금 공탁에는 미덥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우선 채권자인 징용노동자에겐 알리지 않은 ‘깜깜이 공탁’이었다. 공탁 명부에는 채권자의 씨명과 본거지가 명기되어 있으므로 공탁통지서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이런 당연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 공탁 사실을 관보에 게재하는 등 공시하지도 않았다. 일본정부가 공탁 조치를 취한 것은 무엇보다 공산주의단체로 규정한 조선인연맹 등의 정치세력화를 봉쇄하기 위해서였지 징용노동자에 대한 채무를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GHQ와 남한의 미군정 당국도 일본정부의 부실한 공탁 조치에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채권자인 징용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공탁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다.

더욱이 공탁 대상을 고의로 누락하거나 공탁을 기피한 기업도 많아 공탁금의 액수가 극히 적었다. 예컨대 일철(日鐵) 오사카제철소의 경우 공탁금이 2만2,371엔이었는데, 본사 총무부장의 별도 보고에 의하면 이 제철소의 미불금은 9만7,431엔에 달했다. 미불금의 4분의 1도 공탁하지 않은 셈인데 이는 미불금의 64.5%를 차지하는 저금을 공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탁의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공탁 과정에서 일본기업들이 의도적으로 미불금을 축소하거나 아예 은폐하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사라진 징용노동자의 미수금은 전후 일본기업의 운영자금으로 전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부실한 공탁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미불금 관련 자료라는 칼자루를 쥔 채 한일회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1951년부터 한일회담이 시작되자 일본측은 “징용 당시 조선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면서 공탁명부의 제공을 거부한 채 오히려 한국측에 피해를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징용노동자의 미수금과 관련된 공탁 자료는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가 발족되고 일본에서도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같은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일본정부에 자료 공개를 요구하면서 겨우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말기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당했던 근로정신대. 일본 정부는 최근 이들 피해 할머니 3명에게 1인당 199엔의 후생연금 탈퇴 수당을 지급했다. 자료 미 국립문서기록청
일제말기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당했던 근로정신대. 일본 정부는 최근 이들 피해 할머니 3명에게 1인당 199엔의 후생연금 탈퇴 수당을 지급했다. 자료 미 국립문서기록청

● 청구권협정으로 미수금을 앗아간 한국정부

한국정부는 한일회담 초기부터 끈질기게 징용노동자의 미수금 문제를 제기했다. 가령 1953년 4월부터 열린 제2차 회담에서 한국측은 미군정 하에서 이뤄진 조사결과를 인용, 1946년 9월30일 현재 징용된 자가 약 10만5,000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약 1만2,000명, 부상자가 약 7,000명이라면서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이때 한국측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인권 유린의 차원이 아니라 미수금의 관점에서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국측은 “한국 여자로서 전시 중에 일본 해군이 관할했던 싱가포르 등 남방으로 위안부로 가서 돈이나 재산을 남기고 귀국한 자가 있다”면서 기탁금 반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측이 제시한 미수금의 근거는 채무자인 일본측이 확보한 자료와는 비교할 바가 못됐다. 한국정부는 1952년과 58년에 각각 징용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으나 이들 자료는 한일 청구권협상 당시에는 거의 이용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한국측이 한일회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자료는 1949년 12월 GHQ를 통해 건네 받은 일본정부의 미불금 관련 보고서였다. 일본 대장성이 취합한 이 자료는 공탁 및 미(未)공탁을 합쳐 일본기업 등이 지급하지 않은 2억3,700만엔에 대한 내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미수금을 대신 지급하겠다고 나서 화근을 자초했다. 1961년 5월10일 열린 제5차 한일 예비회담 제13회 일반청구권소위원회에서 일본 대장성 이재국의 요시다 노부쿠니(吉田信邦) 차장은 “우리는 미불금을 지불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원래 징용노무자가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야만 지불할 수 있지만 지금껏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불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양국 정부가 알선에 나서 바로 지급될 수 있도록 조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측 대표인 이상덕 한국은행 국고부장은 “보상금 지불 방법이 문제인데, 우리는 우리 국내문제로서 조치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원수라든지 금액의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그 지불은 우리 정부의 손으로 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일본측이 징용피해자 개인에 대한 직접 지급을 주장한데 대해 한국측은 일본정부로부터 받으면 대신 전달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왜곡할 수도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 ‘코에 걸면 코걸이’로 전락한 개인청구권

그러나 이렇게 어설프게나마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던 징용 피해자의 대일 미수금 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상이 결국 내용을 무시한 총액 논쟁과 정치담판으로 귀결되면서 아예 묻혀버렸다. 더군다나 한일협정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한일 양측은 ‘청구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놓고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내놓기 일쑤였다.

청구권협정에 언급된 ‘청구권’에 대해 한국측은 “일본이 식민지배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준 것”이라면서 개인청구권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고 이해한 반면, 일본정부는 “한국의 독립 축하와 경제협력 차원에서 돈을 줬다”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일본정부는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청구권 문제는 남아있다는 견해를 피력해왔다. 가령 1965년 11월5일 시이나 에츠사부로(椎名?三?) 외상은 일본 국회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로 외교보호권만 소멸할 뿐 개인청구권은 존재한다”고 답변했다. 물론 시이나의 언급은 일본 국민에 대한 것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게 적용하면 이는 개인청구권의 존재를 인정한 2012년 우리 대법원의 판결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최근 한국 국내에서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징용피해자의 손해배상 소송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며 압박해오자 일본측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청구권이 소멸됐다”면서 개인청구권을 부정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하지만 이는 애초부터 징용피해자의 미수금 문제 제기에 부정적이었던 한국정부의 견해와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개인청구권을 놓고 한일 양측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해석하면서 애꿎게 징용피해자만 농락당해온 것이다. 지금도 액면가로 징용피해자 2억1,514만엔, 군인·군속 9,131만엔 등 최소 3조원 이상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미수금이 일본은행에 공탁된 채 진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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