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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문학 질서 일변도에서 탈출… '세계 문학'으로서의 한강 소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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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배경에는 우리 국력의 꾸준한 성장이 있다. 한강의 영광은 해외로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활약, '기생충'을 비롯한 한국 영화의 국제적 성공, BTS 또는 K팝의 세계 대중음악 시장 제패 등과 많든 적든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것은 기적이다. 한국 문학 종사자 중 누구도 한강의 수상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30년 남짓 작가로 살아오는 동안 자주 외국어로 번역되는 행운을 누렸고, 근래에 맨부커(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상,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 경력이 올해에 그와 같은 쾌거로 이어지리라는 예상은 상식 밖이었다.
한강의 수상이 어째서 기적인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 문학이 문학의 세계 공화국에서 많은 소수 중 하나라는 사정에 있다. 한국어가 다른 언어와 대화적 관계를 맺으며 문학의 매체로서 의식되고 탐구된 역사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세기를 약간 초과할 정도다. 게다가 그동안 한국 문학은 한국어를 모어로 하는 작은 부족의 은어와 속담의 범위를 대체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셰익스피어 또는 괴테를 산출하지 못했고, 다수 문학의 취미와 규범을 뒤흔드는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국 문학이 세계 문학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말이 들린다. 이것은 경사를 환영하는 수사로서는 그럴듯하나 그 의미에 대한 논평으로서는 터무니없다. 세계 문학이라는 말은 단순히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국민 문학의 총합을 뜻하지 않는다. 세계 문학이 국민 문학 사이의 관계를 내포한다면 그 관계는 국민 국가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불평등하다. 실은 세계 문학이라는 말의 '세계'와 '문학' 모두 개념상 서양 중심적이다. 세계라는 비전은 16세기 이후 유럽의 경제 도약, 세계 무역 체제 성립, 유럽 제국들의 식민지 정복 등과 함께 출현했다. 문학이라는 관념, 말이 아니라 글을 수단으로 삼고, 상상적인 것을 핵심 성질로 가진다. 시, 소설, 희곡을 주요 장르로 하는 문학이란 관념은 18세기 유럽에 처음 등장했다.
세계 문학을 하나의 체제 혹은 레짐이라고 본다면 그 내부에는 중심과 주변의 서열 구조가 존재한다. 중심을 차지하는 국민 문학은 국민 문학의 특수 사례에 그치지 않고 초국민적 혹은 보편적 문학을 구현함으로써 세계 문학의 질서를 수립하고 지탱한다. 주변을 차지하는 국민 문학은 코스모폴리터니즘(세계 시민주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국민적 전통의 발양에 기운다. 비평가 파스칼 카자노바가 저서 '문학의 세계공화국'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세계 문학의 중심은 프랑스, 구체적으로는 파리다. 그 빛의 도시는 탈국민화한 보편의 장소, 최고급의 본거지, 아방가르드의 호스트를 자처하며 오랫동안 우위를 점했다.
한국 문학은 일군의 젊은 문사들이 '신문학'이라는 기치를 올린 20세기 초반부터 국제적 문학 질서에 진입했다. 그들은 언어의 경계를 넘어 편력하는 문학 개념을 알고 있었고 세계 문학의 정전 작품을 접하고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후배는 주변부 작가가 하는 일 중 가장 일반적인 것 하나를 주로 했다. 중심부로부터 전파된 형식을 배워 익혀 주변부의 경험을 표현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유럽산 형식을 한국산 재료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궁금하다면 한국 현대문학사에 등장하는 분류 용어를 떠올려보면 된다. 낭만주의, 자연주의, 프롤레타리아문학, 모더니즘, 파시즘 문학, 실존주의문학 등등.
세계 문학의 형식 중 대표적인 것은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200자 원고 1,000매 이상 길이의 픽션을 생각하거나 '겐지 이야기' , '삼국지' , '안나 카레니나', '백 년의 고독' 같은 긴 이야기라면 모두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 문학 형식으로서의 장편소설은 일반적으로 '돈키호테' 아니면 '로빈슨 크루소'를 효시로 한다고 여겨지는, 유럽인의 현대적 세계관을 기저에 깔고 있는 형식이다. 그 세계관의 요점은 세계로부터 신(神), 영(靈), 귀(鬼), 마(魔) 같은 힘과 그 힘이 상징하는 도덕적 질서를 축출하는 동시에, 세계에 대한 인식과 통제의 주체 자리에 인간을 놓는 사고이다. 장편소설의 양식적 특징을 이루는 리얼리즘은 그러한 탈마법화의 원리에 따라 인간 세계를 재현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다.
유럽 장편소설은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는 제국의 첨단 또는 자본의 루트를 따라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그 지역의 국민 문학 형성과 국제적 문학 질서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계 문학의 형식으로서의 장편소설은 근본적으로 유럽적인 만큼 비유럽 지역의 현실과 만나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비유럽 지역의 장편소설 작가들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는 그 외래 형식과 현지의 재료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고, 그들의 작품 중 의미 있는 성과는 그 둘 사이의 말끔한 통합이 아니라 해소되지 않는 긴장을 노출했다. 예컨대, 미낙시 무커지의 '인도의 장편소설과 사회'에 따르면, 인도 장편소설의 혁신은 산스크리트어의 유산, 서열적 사회 구조, 식민지 교육이 만들어낸 인도 현실의 요구에 따라 그 유럽적 모델을 변형시킨 데서 일어났다.
한강의 장편소설은 외래 형식과 현지 재료를 조화시키려는 한국 작가들의 오랜 노력에 이어져 있다. 이것은 한강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에 이미 역력하다. 이 소설은 한국소설이 유럽과 러시아 소설로부터 배운 리얼리즘의 양식 요소, 즉 사회 하위 계층의 불행에 대한 관심을 강원도 탄광촌 사람들의 고난을 둘러싼 관찰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투쟁에 멜로드라마적 활기를 부여하는 대신, 그 사람들의 경험을 그들과 사회적 처지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중첩시키고, 그 경험들의 미묘한 유비 관계를 발전시킨다. 그 중요한 수단이 어둠 이미지다. 탄광의 지하 동굴로부터 개인의 감추어진 내면에 이르기까지 사람 안팎에 편만한 그 어둠의 만다라는 세속적 리얼리즘을 넘어 가히 신화적인 우주의 비전을 창출한다.
한강의 장편소설은 한마디로 현대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은 사라진 듯했던 신, 영, 귀, 마를 불러들이는 일, 즉 세계의 재마법화(re-enchantment)에 관여하고 있다. 최근작으로 오면 올수록 그 작업의 색채가 뚜렷하다.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광주 5·18과 제주 4·3에 관한 작품으로서 주목되곤 했지만 그 트라우마적 사건들의 문학적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가, 이를테면, 임철우와 현기영을 능가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작품들의 장점은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의 표현에 적합한 형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재마법화라는 한강 자신의 미적·윤리적 방법을 더욱 단련한 데에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특히 비범한 성과다. 눈 밝은 독자라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눈의 이미지, 꿈의 모티프, 환각의 테마 등에서 샤머니즘의 유산을 찾아낼 것이다. 살아갈 의욕을 잃고 악몽에 시달리던 여주인공이 제주 섬에 있는 친구의 외딴집을 찾아가는 길에 홀로 폭설에 갇혀 죽음 직전에 몰리고 그 집에 이르러 망각된 4·3의 진상과 만난다는 이야기는 무당 되기 과정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적 죽음과 재생의 구조이기도 하다.
한강 소설이 수행한 리얼리즘으로부터의 탈출은 어떤 독자에게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샤머니즘의 극복은 과거 한때 한국 비평의 표어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은 한강의 재마법화 작업이 계몽 이전으로의 회귀와 다르다는 점이다. 그것은 보편성의 허울을 두른 문학 형식을 혁파하려는 의지와 자국민의 기억과 경험에 충실하려는 의지 양면을 하나로 합쳐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마음의 작용이다. 한강이 기적 같은 성공을 계기로 다시 일깨운 한국 문학의 과제는 명백하다. 그것은 세계 문학 변방 출신으로 그 중심의 기준을 바꾼 대작가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주었던 교훈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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