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세상을 보는 균형

10년 무명 뒤 '3억 가구'가 알아본 이 배우

아파트 단지 옆 상가 건물 5층 미술학원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재였다. 매캐한 연기에 놀란 아이들은 고사리손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그때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젊은 여성이 껑충 뛰어올라 화재 폭발로 깨진 유리창을 통해 학원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구했다. JTBC 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강남순')에서 주인공 강남순을 연기한 이유미(29)는 4~5층 건물 높이의 공중에서 줄(와이어)에 매달려 화재 현장으로 비상하는 이 장면을 찍었다. 할리우드 영화 '원더우먼' 주인공처럼 강남순은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시내 한복판 건물 옥상을 훌쩍 뛰어넘어 사고 현장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줄줄이 잡힌 이 고공 와이어 액션 장면 촬영은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에게 큰 부담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죠. 그런데 찍어야 하는 고공 액션 장면이 너무 많아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줄 튼튼하겠지'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와이어에 몸을 맡겼죠. 나중엔 와이어 없이 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거 같은 착각에 빠지더라고요". 27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유미가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시청률 10%를 웃돌며 26일 종방한 이 판타지 드라마에서 이유미는 괴력을 타고난 밝고 당찬 청춘 강남순을 구김살 없이 연기했다. 어머니와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를 죽인 '오징어게임'(2021)과 기초생활수급자를 '기생수'라며 비하했던 '지금 우리 학교는'(2022)에서와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9개월 동안 '강남순'을 찍으며 밝아졌다"는 이유미가 요즘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 진짜 힘세?"란 질문이다. "저 보기보다 힘세요. 1.5리터 생수병 서너 개씩 넣은 장바구니 꽉꽉 채워 양손에 들고 혼자 장 보러 가기도 하고요." 그렇게 힘센 이유미는 드라마에서 어머니(김정은), 할머니(김해숙)와 함께 신종 마약을 유통하는 세력을 통쾌하게 소탕한다.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마약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줬다는 점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준 드라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자평했다. 밖에서 '큰일' 하는 세 여성 영웅을 차분하게 내조하는 건 남자들이다. 이유미는 "여성들이 사랑에 당당하고 그렇게 직진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고 색다른 설렘을 줬다"고 말했다. 이런 여성주의적 서사와 엉뚱한 이야기에 반한 걸까. 영국 출신 유명 모델인 나오미 캠벨은 최근 한 패션지와의 인터뷰에서 '강남순'의 마니아라고 '인증'했다. '강남순'은 넷플릭스에서 7주 동안 비영어권 드라마 톱10에 머물려 해외에서도 입소문을 탔다. 이유미에게 지난 2년은 인생의 불꽃놀이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드라마 통틀어 역대 최다 시청 톱10에 오른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1위·2억6,000만 가구)과 '지금 우리 학교는'(8위·5,500만 가구)에 연달아 출연해 세계에 얼굴을 알렸다. 애초 4만 명 수준에 불과했던 그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두 드라마가 공개된 뒤 667만 명(27일 기준)으로 폭증했다. '오징어게임'으로 지난해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게스트 여배우상도 받았다. 이유미는 "받을 거라는 상상도 못 해 (시상식에 갔을 때) 딱히 긴장되지도 않았다"며 "앉아 있는 데 갑자기 화면에 후보들 얼굴이 나오고 한국말로 내 대사가 소개돼 정말 신기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시상식이 끝난 후 그는 집에서 혼자 트로피를 꺼내 보며 눈물을 쏟았다. 2009년 시트콤 '태희혜교지현이'에서 고등학생 단역으로 나와 10여 년 동안 "언젠가는 될 거야란 믿음으로 버틴" 기다림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오징어게임'이 공개되기 전 조·단역을 전전했던 그는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오징어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이 공개되기 전 일을 쉬면 힘드니까 용돈 벌자는 심정으로 음식 배달 일을 했어요. 걸어 다니며 배달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이번에 '강남순'에서 물건 배달 업체에 잠입해 창고에서 일했는데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오징어게임'은 비연예인들이 출연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오징어게임: 더 챌린지')으로도 제작돼 최근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이유미가 연기한) 지영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분들을 찾고 응원하게 되더라"며 "구슬 게임이 나와 옛 생각도 났다"고 말했다.

얼마 만의 100만 관객?… ‘서울의 봄‘이 앞당긴 ‘극장의 봄’

한국 영화와 극장가에 봄은 오는 걸까. 황정민 정우성 주연의 ‘서울의 봄‘이 상영 첫 주 관객 189만 명을 모으며 극장가에 흥행 훈풍이 불고 있다. 한국 영화가 첫 주 관객 100만 명 이상을 기록한 것은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9월 27일 개봉, 첫 주 117만 명) 이후 두 달 만이다. ‘천박사 퇴마 연구소‘가 추석 연휴 전날 개봉한 점을 감안하면 ‘서울의 봄’의 흥행 수치는 의미가 더 크다. ‘서울의 봄‘은 여름에 공개됐던 ‘밀수’(172만 명)와 ’콘크리트 유토피아‘(154만 명)보다 첫 주 관객이 더 많다.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로는 ‘범죄도시3’(451만 명) 다음으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 ‘범죄도시3’의 최종 관객 수는 1,068만 명, ‘밀수’는 514만 명,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384만 명을 각각 기록했다. ‘서울의 봄’의 관객이 토요일(25일, 59만 명)보다 일요일(26일, 62만 명) 더 늘어난 점도 예사롭지 않다. 보통 극장 관객은 일요일이 토요일보다 줄어든다. 월요일 출근과 등교 등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저녁 이후 관객이 많지 않아서다. 일요일 관객이 늘었다는 것은 ‘서울의 봄‘이 시간이 지날수록 흥행 뒷심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신호다. ‘서울의 봄‘은 1979년 발생한 12·12 사태를 소재로 삼고 있다. 군사반란을 획책하는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일당과 군의 정치 불개입이라는 신념에 따라 반란을 저지하려는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의 대결을 그렸다. 44년 전 발생한 사건이 소재라 중장년층의 관심을 많이 끌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서울의 봄’ 관객은 20, 30대 비중이 크다. 27일 멀티플렉스 체인 CGV에 따르면 22~26일 기준 ‘서울의 봄‘ 관객 중 29.4%가 30대였고, 28.5%는 20대였다. 관객 57.9%가 2030세대로 40대(21.8%)와 50대(12.9%), 60대 이상(3.5%)보다 더 많다. 황재현 CGV 전략담당은 “언론배급 시사 이후 과연 2030 관객이 ’서울의 봄‘을 볼까 의문이 들었다“며 “특히 20대 비중이 이렇게 높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서울의 봄’은 CGV 관객 선호도 지표인 ‘에그지수’가 98%다. 황 전략담당은 “100명 중 98명이 만족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매우 이례적인 수치”라고 설명했다. ‘서울의 봄‘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의 최은영 이사는 “젊은 층이 잘 몰랐던 내용을 영화로 알고선 다들 분노하며 꼭 봐야 할 영화로 입소문을 내는 걸로 보인다“고 밝혔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영화 관람 중 스트레스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측정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실화에 허구를 보태 영화적 재미를 증폭시킨 점이 흥행 요인으로 분석된다. 영화 속 전두광은 전두환, 이태신은 장태완을 각기 밑그림 삼아 만들어진 인물들이다. 노태우는 노태건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최한규로 등장한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했으나 이름을 바꿔 캐릭터에 상상력을 더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 현대사의 물길을 바꾼 정치적 사안을 소재로 했음에도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을 액션 영화처럼 보이도록 꾸며 긴장감을 빚어내기도 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누가 먼저 서울을 점령하느냐의 싸움 등을 긴박감 있게 표현해냈다”며 “정치 영화가 아니라 군 액션영화처럼 느끼게 만든 점이 젊은 층에게 소구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황금주’ 김정은이 ‘파리의 연인’으로 갈증 느낀 이유

"애기야, 가자!" 20여 년간 입에 오르내려 온 이 명대사를 낳은 SBS '파리의 연인'(2004)은 배우 김정은(49)을 명실공히 로맨틱 코미디 퀸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당시 20대였던 김정은은 기쁨과 함께 남 모를 갈증을 느꼈다. "여성 캐릭터가 스스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고 '백마 탄 왕자'에 의해 선택되어지잖아요.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여성 캐릭터가 이렇게밖에 못 쓰이나' 목 마르더라고요." JTBC '힘쎈여자 강남순'(이하 '강남순')은 "여성이 (스토리상) 곁다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기다려온 김정은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드라마이기도 하다. 김정은이 연기한 강남순(이유미)의 엄마 황금주는 힘이 세고 돈이 많다. 게다가 '강남순'은 강남순과 그의 엄마 황금주, 그의 할머니 길중간(김해숙) 세 모녀의 이야기였다. 최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정은은 "출연 제안을 받고 세 모녀가 만나는 장면을 대본에서 본 순간,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어 '무조건 할게요'를 외쳤다"고 돌아봤다. 황금주는 역대 여성 캐릭터 중 가장 파격적이다. 가죽 슈트를 입고 오토바이를 즐겨 타며, 괴력을 발휘하는 것도 모자라 자수성가해 번 어마어마한 돈으로 문제를 척척 해결한다. 그는 "황금주가 너무 좋다"면서 "마음 한 구석이 여린 것도, 중요한 순간마다 삐끗하는 B급 감성마저도 내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배우 김정은의 주특기인 코미디 연기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정은은 '가문의 영광' 등 2000년대 초반 코미디 영화로 크게 주목받았다. "어릴 땐 '코미디가 네 전공이야'란 말이 칭찬인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잘 하는데요'라며 발끈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그는 이제 "나만이 할 수 있는 코미디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20~30대를 지난 뒤 결혼 이후 일과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소중함을 더욱 깨닫게 됐다는 그는 "좋은 드라마를 보면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극 중 황금주의 엄마인 길중간이 "늙으면 심장이 안 뛴다고? 가슴이 처지지 심장이 처지니?"라고 반문한 대목을 거론하며, "심장이 처지는 건 정말 아니더라"고 말했다. 어느덧 데뷔 27년차를 맞은 김정은은 인터뷰 동안 "'올드'해 보이면 안 되는데"란 걱정을 자주 내비쳤다. 그래서 3년 만의 복귀작이던 '강남순' 현장에서 감독의 디렉팅이나 젊은 스태프들의 피드백을 최대한 받아들이려 했다. 김정은은 "일부러 편집실에 자주 놀러 가 모니터링도 하면서 황금주가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했다"고 말했다. 26일 종영한 '강남순'은 판타지 코믹물이지만, 힐링물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거악과 맞서 이기는 '정의'를 보여주는 세 모녀의 이야기가 통쾌해서다. 김정은 역시 "'강남순'을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이유는 각자 삶이 퍽퍽해서가 아닐까 싶다"면서 "잠시나마 위로받으셨으리라 생각했고, 작품으로 나 역시 위로받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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