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고비 넘기고 두 번째 삶" 엄정화·차정숙 닮은꼴의 기적

지난겨울, 순조롭게 이뤄지던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촬영이 중단됐다. 서이랑 역을 맡은 이서연이 아버지 서인호(김병철)가 반대한 미대 진학을 준비하다 들켜 호되게 혼나는 장면에서 펑펑 울어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상황. 그때 극 중 이랑의 엄마 차정숙 역을 맡은 엄정화(54)는 딸에게 다가가 두 팔로 20여 초 동안 부둥켜안았다. 대본에도 없는 엄정화의 돌발 행동에 중견 배우 박준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다. "액션!" 엄정화에 안긴 뒤 다시 카메라 앞에 선 이서연의 눈에선 거짓말처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촬영이 몇 번 중단되니 눈치가 보여 서연이가 포기하려고 하더라고요. 어떤 마음으로 이 장면을 준비했고, 그 감정이 제대로 안 나오면 얼마나 괴로운지 전 아니까요. 가서 만져주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소재 사람엔터테인먼트에서 만난 엄정화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진짜 이랑 엄마 같았다. 차정숙은 의대생 시절인 젊은 나이에 임신해 두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로 살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이젠 뻔뻔하게 살겠다"며 20년 만에 레지던트를 시작한다. 엄정화가 차정숙의 경력 단절의 설움과 '워킹맘'의 강인함을 실감 나게 보여주자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첫 회 4.9%로 출발했던 시청률은 4일 종방 직전 20% 문턱까지 치솟았다. "젊은 친구가 잘못하면 실수지만 나이 먹은 사람의 잘못은 무능"이란 쓴소리를 들으며 차정숙처럼 직장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게 현실. 절망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려는 차정숙에게 시청자들은 TV 앞에 몰려들어 그를 응원했다. 엄정화는 "어떤 주부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는데 다시 도전해 보겠다고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냈다"며 "드라마를 통한 작은 공감이 누군가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거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엄정화와 차정숙은 묘하게 닮았다. 엄정화는 2010년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뒤 8개월 여 동안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원인은 왼쪽 성대 신경 일부 마비. 그는 "꿈을 좇아왔던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숨소리를 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던 시절, 엄정화는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고 목소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차정숙도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 꿈을 다시 좇는다. 엄정화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차정숙과 제 인생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뭉클했고, 그런 일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더 '차정숙이 어떤 감정일까'에 몰입하며 촬영했다"고 말했다. 엄정화가 지난해 12월 '닥터 차정숙' 촬영을 끝낸 후 가장 자주 찾은 곳은 춤 연습실이다. 그는 tvN 예능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으로 요즘 전국 각지를 누비며 무대에 선다. 김완선, 이효리, 보아, 화사 등이 그의 유랑 동료다. 그에게 유랑단 활동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다. 1993년 '눈동자'가 실린 1집을 낸 뒤 올해로 가수 활동 30년. 다시 일어선 엄정화는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가수로서 발라드부터 디스코, 힙합까지 아우른 엄정화는 스크린에서도 연쇄살인범(영화 '오로라 공주')과 탈북 요원('오케이 마담')으로 쉼 없이 변신했다. 배우와 가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의 신조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자"이다. "2016년 앨범 '드리머'를 냈을 때 (차트) 100위 안에서 노래를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충격이 컸죠. 하지만, 노래도 연기도 내가 하기 편한 장르만 고집했다면 이렇게 오래 활동하지 못했을 거예요. 돌아보니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게 없어요. 그러니 시도하지 않을 이유도 없고요. 나이에 갇히지 않으려고요. 차정숙이 준 '시작하기 늦은 나이는 없다'는 메시지를 품고서요."

[아이돌 마케팅의 진화]콜라병 없애고 뉴진스만 노출했는데 코카콜라 제로 대박났다

지난달 걸그룹 뉴진스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된 신곡 '제로'(ZERO)를 두고 온라인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콘텐츠 수준을 생각하면 오랜 기간 작업한 정식 타이틀곡 같은데 '코카콜라 맛있다'라는 가사가 나오는 걸 보면 광고 방송용 노래(CM송)처럼 비치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콘텐츠는 한국코카콜라와 회사의 글로벌 뮤직 플랫폼 '코크 스튜디오' 등이 함께 만든 CM송 뮤직비디오로 2일 기준 유튜브 조회수 1,544만 회를 돌파했다. 정식 음원까지 나오면서 CM송으로는 드물게 지니뮤직 등 음원차트 1위까지 찍었다. 시선끌기에만 그친 게 아니라 대다수 편의점에서 제로슈가 제품 '코카콜라 제로'의 점유율이 상승해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1일 서울 종로구 한국코카콜라 사옥에서 만난 권정현 마케팅팀 상무와 이정민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매니저는 "브랜드 노출은 최대한 줄이고 뉴진스의 감성을 극대화해 광고라는 거부감을 줄인 것이 통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마케팅팀은 애초 뉴진스가 K팝의 틀을 깨고 독보적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이번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뉴진스의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는 판단이었다. 나아가 세계 무대에 진출해서 해외 팬들로부터 호응을 얻겠다는 계산도 깔렸다. 코카콜라가 200개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만큼 애초 글로벌 프로젝트로 이번 협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다. 뮤직비디오는 빨간 문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 코카콜라의 슬로건인 '리얼매직'을 구현한다는 스토리로 진행된다. 이 매니저는 "연출의 초점은 스토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겨진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재미를 넣어보자는 것"이었다며 "K팝 콘텐츠처럼 팬들이 다양한 문화나 콘텐츠를 2차 생산하도록 기회를 열어놓았다"고 설명했다. 이를테면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버스 번호(0722)를 뉴진스의 데뷔일(2022년 7월 22일)로 적어두고 팬들이 찾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콘텐츠를 '스즈메의 문단속'에 빗대어 해석하는 글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는 빼기 위해 노력했다. 애초 뉴진스가 춤을 출 때 활용하는 빨간 소파에 브랜드 이름을 새기려고 했지만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로 이를 배제했고 광고의 단골 동작이었던 캔 따는 클로즈업 장면도 일부러 빼면서 제품의 직접 노출을 줄였다. '청량감', '긍정'이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꾸준히 전해왔는데 이번엔 같은 메시지라도 모델이 가진 힘을 최대한 끌어내면서 신선한 느낌을 자아내려 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무엇보다 이미 후렴구에 '코카콜라 맛있다'라는 유명 가사가 들어가 있어 홍보 효과가 줄어들 걱정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 상무는 "광고에 브랜드를 욱여넣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세련되게 표현할까 고민했다"며 "소파, 문 등 일부 소품에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입혀서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K팝의 성공 DNA를 이식시키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다. 메인 뮤직비디오 공개 날 음원을 풀고 며칠 후 퍼포먼스 비디오를 공개하는 등 K팝의 마케팅 방식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다. 뮤직비디오는 코카콜라 공식 유튜브 채널이 아닌 뉴진스 채널에만 공개해 실제 타이틀곡처럼 느끼게끔 만들었다. 이 매니저는 "유명한 CM송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잊혀지는 곡이었는데 뉴진스의 활약으로 다시 부활한 분위기"라며 "이제 추억이 아니라 트렌디한 음악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고 말했다. 코카콜라는 뉴진스의 광고 영상을 재편집해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등에 공개한다는 계획이다. '코카콜라 맛있다'라는 중독성 강한 멘트를 한국어로 노출해 외국인이 그대로 따라 부르도록 이끈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제로 뮤직비디오에는 한글보다 외국어 댓글이 더 많을 정도로 글로벌 팬들의 관심이 크다. 보통은 각국 지사에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광고를 끌어다 쓸 때 현지 성우를 구해 목소리를 입히는 식으로 송출하는데 영어가 아닌 광고 콘텐츠가 원어 그대로 노출되는 경우는 이례적이라는 설명이다. 이 매니저는 "그만큼 해외에서 뉴진스라는 모델 자체의 힘을 크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 상무는 "뉴진스의 글로벌 파워를 인정한 여러 나라 지사에서 한국에서 만든 제로 광고를 쓰고 싶다는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며 "조만간 외국인 입에서 '코카콜라 맛있다'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한편 코카콜라는 지난달 31일 뉴진스와 손잡고 글로벌 무대를 공략할 또 다른 신곡도 공개했다. '그래미 어워즈 5관왕'의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 라틴 팝 아티스트 카밀로, 미국 래퍼 제이아이디(J.I.D) 등 다섯 팀의 아티스트와 함께한 '비 후 유 아'(Be Who You Are)다. 뮤직비디오는 공개 직후인 2일 기준 유튜브 조회 수가 37만2,000회를 돌파했다. 코카콜라는 이 음원을 앞세워 전 세계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마케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청양고추 왔어요" 용달차로 호객한 K팝 아이돌의 정체

"청양고추가 왔습니다." 지난 3일 오전 11시 50분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인근에 세워진 작은 용달차는 확성기로 이런 소리를 토해냈다. 주택가도 아니고 도심 유흥가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청양고추팔이라니. 일부 행인들은 신기한 듯 잠시 멈춰 트럭을 둘러봤다. '청양고추 신속 배달'이란 현수막이 걸린 차엔 땡땡한 고추들이 빨간색 바구니들에 담겨 있었다. 수북이 쌓인 청양고추 박스 위엔 밀짚모자가 한가롭게 얹어져 있다. 이제 막 밭에서 딴 고추를 차에 가득 실어 팔러 나온 분위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10·20대를 중심으로 이 '청양고추 용달차' 목격담이 속속 올라왔다. 옛 주부들이 집 근처에서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란 정겨운 소리가 울려 퍼지면 집안일을 하다 말고 계란 사러 몰려나왔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이 '청양고추 용달차'를 찾기 위해 정보를 교환한다. 이 트럭의 고추 상자엔 'ATEEZ'란 영문이 적혀 있었다. 청양고추팔이 행상은 바로 아이돌그룹 에이티즈. 2018년 데뷔해 지난해에만 150만 장의 앨범을 팔아치운 K팝 신흥 강자다. 에이티즈의 청양고추 호객은 16일 발매될 새 앨범 관련 이벤트다. KQ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6일 "타이틀곡이 '바운시-K 핫 칠리 페퍼스'"라며 "곡명 등에 청양고추가 중요한 소재로 쓰여 청양고추 세계관을 공유하기 위해 고추팔이 용달차 운행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깜짝 이벤트를 위해 에이티즈 여덟 멤버는 "청양고추 화끈한 청양고추"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청양고추가 왔어요" 등의 호객 문구를 따로 녹음했다. 이 녹음 파일은 도심 곳곳을 누비는 여덟 대의 용달차 확성기를 통해 서울 곳곳에 퍼졌고 팬들은 이를 재확산시켰다. K팝 아이돌이 팬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쌓아 세계관을 공유하고 넓혀가는 방식이다. K팝 팬덤에서 이 청양고추 용달차가 화제를 모은 배경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이돌과 팬덤은 가수의 신비주의 전략 중심으로 만났지만 이젠 180도 달라졌다. 요즘 추세는 쌍방향으로 친밀함을 쌓는 방식. 방탄소년단이 서울 이태원동의 공중전화박스 등에 격자무늬 QR코드를 붙여 놓고 팬들이 그 QR코드로 인터넷에 접속해 그룹과 팬덤의 역사를 기록하는 '아미피디아'(2019)가 대표적 사례.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아이돌과 팬덤의 상호작용은 K팝 산업으로 깊숙이 들어왔다"며 "5,000만 명이 넘게 가입한 하이브의 팬덤 플랫폼 위버스 등 팬덤을 기반으로 한 팬더스트리(팬+인더스트리)는 이제 K팝 산업의 화두"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12일부터 25일까지 한강 세빛섬과 남산 서울타워,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월드컵대교 등 서울의 명소는 보라색(방탄소년단 팬덤 상징색)으로 물든다. 13일 방탄소년단 데뷔 10년 기념일을 맞아 하이브와 서울시가 손잡고 K팝 팬덤을 상대로 약 2주 동안 진행하는 축제 일환이다. 관광업계는 팬더스트리의 후광을 톡톡히 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외국인 팬들이 서울로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기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객실 예약률은 80%를 웃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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