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르포]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요?"… LA 산불 일주일, 그는 하늘만 원망했다

입력
2025.01.14 15:51
수정
2025.01.14 16:01
1면
구독

팰리세이즈 화재 피해자 "종말 본 듯"
이튼 화재에 집 잃은 여성도 망연자실
주민 일상 빼앗은 LA 화재, 14일 '고비'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의 한 건물이 처참히 무너져 있다. 이튼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의 한 건물이 처참히 무너져 있다. 이튼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마치 종말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1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만난 앙투안 잭슨(25)에게 '그날'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지난 7일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집으로 가는데 잭슨이 타고 있던 버스를 경찰이 막아서며 "산불이 나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멀찍이 보이는 동네에 시뻘건 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가 본 불에는 이후 LA 최악의 산불, '펠리세이즈 산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캘리포니아주 퍼시픽 펠리세이즈에 집이 있던 잭슨은 그날부터 LA 시내의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살고 있다. 이곳은 비영리 구호기구인 적십자사가 LA에 마련한 임시 대피소 네 곳 중 하나다. 이날 기준 250명 넘는 사람이 이곳에 살고 있다. 모두 잭슨처럼 산불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날 전까지 잭슨은 퍼시픽 펠리세이즈 산지에 방 하나를 빌려 살고 있었다. "하우스메이트가 두 명 더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며 "어딘가 잘 있을 거라고만 믿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잭슨은 "아직 집 근처에 진입할 수 없다. 경찰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그래서 집이 완전히 불에 탔는지, 잔해만 남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전했다. 센터에서 같이 지내는 한 이웃이 "내 집은 모두 불에 탔다"고 말한 것으로 미뤄 자신의 집도 비슷한 상황이겠거니 짐작만 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 센터 앞에서 앙투안 잭슨이 센터 측에서 나눠 준 도시락을 들고 있다. 팰리세이즈 산불 피해자인 그는 산불이 발발한 지난 7일부터 화재 피해자들을 위한 임시 대피소인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이서희 특파원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 센터 앞에서 앙투안 잭슨이 센터 측에서 나눠 준 도시락을 들고 있다. 팰리세이즈 산불 피해자인 그는 산불이 발발한 지난 7일부터 화재 피해자들을 위한 임시 대피소인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이서희 특파원


그는 전날 미국 연방 재난관리청(FEMA)에 재난 지원금을 신청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LA 일대를 중대 재난 지역으로 선포하고, 산불 피해자들에게 임시 주거를 위한 보조금, 재산 손실 보전을 위한 저금리 대출, 치료비 등을 FEMA를 통해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12일 기준 2만4,000여 명이 FEMA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잭슨은 "신청자가 많아서 서류를 접수하는 데만 2주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안내받았다"며 "아직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원래 살던 것처럼 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평범한 일상이 지금 그에게는 가장 절실해 보였다.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 센터 앞의 모습. 이곳은 로스앤젤레스 화재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된 임시 대피소다. 대피소 앞 벽면에 다른 언어와 함께 한글로 '보호소'라고 적힌 게 눈에 띈다. 로스앤젤레스=이서희 특파원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웨스트우드 레크리에이션 센터 앞의 모습. 이곳은 로스앤젤레스 화재 피해자들을 위해 마련된 임시 대피소다. 대피소 앞 벽면에 다른 언어와 함께 한글로 '보호소'라고 적힌 게 눈에 띈다. 로스앤젤레스=이서희 특파원


서울시 4분의 1 태운 매정한 산불

미 서부 대도시 LA 일대를 동시 다발로 덮친 산불이 13일로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다. 가장 기세가 무서운 두 산불, LA 서부 해변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발생한 팰리세이즈 산불과 동부 내륙의 이튼 산불은 이날까지 약 153.1㎢에 이르는 땅을 태웠다. 서울시 면적(605.2㎢)의 4분의 1 정도가 사라진 셈이다. 화재에 소실된 건물은 1만2,000여 채로 추산된다. 이날까지 최소 24명이 희생됐다.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의 무너진 건물터만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차량이 서 있다. 이튼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의 무너진 건물터만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차량이 서 있다. 이튼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이날 낮 찾은 이튼 산불 지역 알타데나에서는 화재의 흔적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전날 밤에도 지났던 곳이지만, 날이 밝으니 화마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건물들과 잿더미가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검게 그을린 잔해들이 눈치 없이 새파랗게 맑은 캘리포니아 하늘과 대비돼 비현실적이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알타데나는 이튼 산불이 시작된 지역으로, 화재 발생 초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가 지금은 검게 그을린 잔해만 있는 상태다. 지역 경찰은 잔불 등에 따른 위험 때문에 알타데나로 향하는 주요 길목을 막아뒀지만 거주민과 기자 등에게는 낮 시간대에 한해 신원 확인 후 길을 터주고 있었다.

이날 화마에 무너져 내린 건물 앞에서 만난 한 남성은 잿더미 속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 차로 옮기고 있었다. 조심스레 말을 건네려 하자,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다. 날이 좋을 때 빨리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딱딱하게 말했다. 알타데나 주민이라는 한 중년 여성은 차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집을 확인하러 왔다"는 그는 멀쩡한 게 하나도 남지 않은 집터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에서 한 거주민이 화마에 무너진 건물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 차로 옮기고 있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1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 주택가에서 한 거주민이 화마에 무너진 건물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골라 차로 옮기고 있다. 알타데나=이서희 특파원


18만 명이 집 떠나거나, 떠날 준비

이들 알타데나 거주민과 잭슨처럼 대피 명령을 받고 화재 지역을 떠나 있는 이들은 현재 9만2,000여 명에 달한다. 여기에 추가로 8만9,000명 정도가 '대피 경고'를 받은 상태다. 대피 경고는 언제든 위험이 닥칠 수 있으니 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지시다. 이들 모두가 화재 위협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LA의 상황은 더디지만 나아지고 있다. 이날 오전 8시 기준 팰리세이즈 산불 진압률은 14%, 이튼 산불은 33%을 기록해 전날(각각 11%, 27%)보다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고비도 남았다. 14일 오전 4시부터 15일 정오까지 일부 지역에서 시속 89~113㎞의 강풍이 불 것이라고 미국 기상청은 예보했다. 조금씩 진전을 보이던 산불 진화 작업은 '악마의 바람'이라는 '샌타애나'로 인해 다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커졌다.

로스앤젤레스= 이서희 특파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