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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뉴욕 한복판서 만난 라네즈·스킨천사, 깐깐한 뉴요커 지갑 열다

입력
2025.01.02 04:30
수정
2025.01.02 07:1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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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뷰티, 지구촌 매혹하다]
<1>아마존 넘어 얼타까지 스며들다-미국
K팝·K푸드 활약 잇는 K뷰티
중국 저물고 미국이 흥행 주도
아마존·틱톡, 진출 장벽 낮춰
얼타·세포라 등 오프라인 향해
"브랜드로 커야 K뷰티도 성장"

미국에서 성공한 1세대 화장품 인디 브랜드 코스알엑스가 2024년 12월 전 세계 시장의 정점으로 통하는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광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엔 성조기, 왼쪽엔 코카콜라 광고가 있다. 코스알엑스 제공

미국에서 성공한 1세대 화장품 인디 브랜드 코스알엑스가 2024년 12월 전 세계 시장의 정점으로 통하는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광고를 하고 있다. 오른쪽엔 성조기, 왼쪽엔 코카콜라 광고가 있다. 코스알엑스 제공


미국에서 나고 자란 회사원 데비(26)가 K뷰티에 눈을 뜬 건 몇 해 전, 피부 고민이 많던 대학생 시절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쉽게 접했던 미국 브랜드의 스킨케어 화장품을 쓰다 말았다. 꾸미기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던 와중에 대체로 두껍고 뻑뻑했던 느낌의 미국 제품은 부담스러웠다.

2020, 2021년 뷰티 인플루언서들이 틱톡,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화장품 제품 후기를 꼼꼼하게 살피던 중 한국의 인디 브랜드를 만났다. 미국 제품과 달리 대부분 얼굴에 바르지 않은 듯 가볍다는 평가에 꽂혔다. 한국 인디 브랜드 스킨1004(스킨천사)가 내놓은 자외선 차단 제품 '마다가스카르 센텔라 히알루-시카 워터핏 선세럼'을 써봤더니 뷰티 인플루언서의 콘텐츠는 과장이 아니었다.

2024년 4월 다녀온 한국 여행은 관광과 'K뷰티 투어'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미리 점찍어 뒀던 CJ올리브영 서울 명동타운점과 강남점을 갈 때는 들뜨기도 했다. 아예 작은 여행용 가방을 챙겨간 두 지점에서만 20개 넘는 제품을 100만 원 가까이 들여 샀다. 미국에 돌아와 비교 사용해보곤 자신에게 잘 맞는 제품을 최근 CJ올리브영 글로벌몰에서 다시 구매해 쓰고 있다.


미국 여성 데비가 2024년 4월 한국 여행 도중 CJ올리브영 매장에서 구매한 한국 화장품. 본인 제공

미국 여성 데비가 2024년 4월 한국 여행 도중 CJ올리브영 매장에서 구매한 한국 화장품. 본인 제공


10년 전 미국에 정착한 한국계 미셸 곽(31)은 K뷰티 제품을 추천해달라는 지인들이 부쩍 많아졌다. 여드름 완화, 피부 노화 방지(안티에이징)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화장품 상담을 해 온 또래 미국인 남성 친구가 그중 하나다. 노화 방지 효과가 있다는 성분 레티놀을 강하게 쓰는 미국 브랜드 제품이 두드러기를 유발한다는 게 고민이었다.

라네즈의 워터뱅크크림 등 레티놀을 다른 성분과 혼합하거나 아예 쓰지 않으면서도 안티에이징 효과가 나는 제품을 알려줬더니 1년 넘게 꾸준히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미셸은 "K뷰티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있고 제품의 질도 좋으면서 사용 후기까지 많아 빠르게 친숙해졌다"고 말했다.

2024년 12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34번가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미국판 CJ올리브영' 얼타뷰티(얼타)에서도 K뷰티가 발돋움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농구 코트 두 개 크기만한 매장에 들어가니 얼타 특유의 서비스인 헤어살롱이 먼저 눈에 띄었다. 스킨케어, 색조, 헤어, 네일 등 다양한 화장품 브랜드 제품이 저마다 성인 여성 키 높이의 네 칸짜리 매대에 놓여 팔리길 기다렸다.

매대 2개를 차지한 '글로벌 뷰티' 코너에선 낯익은 브랜드가 보였다. 마녀공장, 메디힐, 크렘샵 등 대부분 한국 브랜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 한 직원은 글로벌 뷰티 대신 아예 '코리안 스킨케어'라는 주제 아래 K뷰티 제품만 모아 판매하는 얼타 매장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성공한 1세대 인디 브랜드인 코스알엑스는 아예 전용 매대를 배정받고 있었다.



세계 시장 정점, 미국 뉴욕서 통하는 K뷰티



2024년 12월 9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뉴욕의 화장품 편집숍 얼타뷰티, 세포라 매장. 두 곳 모두 낯익은 한국 인드 브랜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뉴욕=박경담 기자

2024년 12월 9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뉴욕의 화장품 편집숍 얼타뷰티, 세포라 매장. 두 곳 모두 낯익은 한국 인드 브랜드 제품이 판매되고 있었다. 뉴욕=박경담 기자


얼타 매장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고급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 매장 역시 K뷰티가 로레알, 에스티로더 등 글로벌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아모레퍼시픽 산하 브랜드인 라네즈, 설화수, 이니스프리가 각각 매대를 따로 갖추고 제품을 뽐냈다.

전 세계에서 찾는 도시답게 화장품을 사는 사람도 지구촌 소비자였다. 영어는 물론 인도, 방글라데시 언어인 힌디어, 방글라까지 소화 가능한 직원 파 자르나는 "설화수 제품 주 원료인 인삼을 힌디어로 아슈감다라고 하는데 이 설명을 듣고 산 뒤 너무 좋다며 다시 구매한 사람이 여럿"이라고 전했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K팝, K푸드를 이을 후속 주자로 단연 꼽히는 K콘텐츠는 K뷰티다. K뷰티는 중국, 동남아시아 등 K콘텐츠가 익숙한 지역을 넘어 글로벌 시장의 정수로 통하는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미국 시장을 공략하면서 세계로 뻗을 수 있었던 K팝, K푸드의 성공 방정식을 K뷰티도 잇고 있는 셈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수치부터 보면 2024년 화장품 연간 수출액은 102억 달러(약 14조9,500억 원)로 처음 100억 달러를 넘었다. 역대 최대였던 2021년 92억 달러를 훌쩍 넘는 수준이고 10년 전인 2014년 18억 달러와 비교하면 여섯 배 가까이 불었다. 2010년대엔 중국 시장이 한국 화장품의 수출을 키웠다면 2020년대 들어선 미국이 1등 공신이다.

2024년 1~11월 누적 대(對)미국 화장품 수출액은 17억5,100만 달러로 전년보다 57.3% 뛰었다. 같은 기간 수출액은 중국이 23억1,800만 달러로 2위 미국에 앞서긴 하나 전년 대비 10.3% 줄면서 하락세다. 미국 내 국가별 화장품 수입액을 봐도 한국은 전통의 강자 프랑스를 앞지르고 있다.

미국 내 K뷰티 성장세가 가팔라진 건 2차 열풍(Second Wave)이 분 2022년 무렵이다. 조선미녀의 '맑은쌀선크림'이 아마존에서 블랙프라이데이 기간 선크림 부문 판매 1위에 오르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K뷰티 유행은 반도체, 자동차 등 핵심 산업이 세계를 휘어잡았던 경로와는 달랐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기업이 국내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해외로 확장한 전통적 수출 방식과는 정반대였다. 중소기업·스타트업인 화장품 인디 브랜드를 주축으로 한국을 건너뛰고 아예 미국 등 해외부터 밟은 회사가 많다.

뷰티 브랜드 운영사 크레이버코퍼레이션이 소유하고 있는 스킨천사가 한 예다. 자연주의 스킨케어를 내걸고 있는 스킨천사는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정조준했다. 특히 2021년 진입한 미국 시장에 공을 들였다. 미국을 한국보다 가능성이 큰 블루오션으로 봤기 때문이다. 인디 브랜드가 아이디어만 갖고 오면 어느 시장에 내놓아도 통할 질 좋은 화장품을 생산해주는 한국콜마, 코스맥스 등 한국 화장품 제조업자 개발생산(ODM) 회사의 존재도 미국 직행을 도왔다.



전 세계 브랜드 뛰는 미국, 오히려 블루오션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얼타뷰티 매장에 '코리안 스킨케어'라는 주제 아래 인디 브랜드 마녀공장(오른쪽)과 스킨1004 제품이 놓여 있다. 각 사 제공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얼타뷰티 매장에 '코리안 스킨케어'라는 주제 아래 인디 브랜드 마녀공장(오른쪽)과 스킨1004 제품이 놓여 있다. 각 사 제공


권동준 스킨천사 글로벌마케팅본부장은 "시장 규모가 작은 국내는 오히려 경쟁이 치열하고 제품을 팔 수 있는 곳도 한정돼 있어 갈수록 이윤을 내기 어렵다"며 "조선미녀 등 한국 인디 브랜드가 거대 시장인 미국에서 흥행하면서 더 이상 국내의 성공이 해외 진출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란 게 증명됐다"고 말했다.

아마존(판매 채널), 틱톡(마케팅)은 미국 시장에 도전하려는 인디 브랜드의 진입 문턱을 확 낮췄다. 자본력이 부족한 인디 브랜드로선 TV 등 전통적 매체 광고 등에 기대지 않고 오프라인 점포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제품을 알리고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현지 화장품 소비자가 즐겨 이용하는 틱톡에서 입소문이 나는 바이럴 마케팅에 성공하는 만큼 아마존에서 거둔 매출이 정비례해서 늘어나는 K뷰티 공식이 자리 잡았다.

이는 미국에서 2015년 전후로 일어났던 K뷰티 첫 번째 열풍의 실패에서 보고 배운 면도 크다. 당시 미국 매스컴이 한류를 조명하면서 마스크팩 등 K뷰티에 대한 관심도가 커졌다. 일부 브랜드는 현지 화장품 시장 안착 여부를 가르는 기준인 양대 오프라인 업체 얼타, 세포라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2015년 미국 시장에 들어가 성공 모델로 자리 잡은 코스알엑스를 빼곤 대부분 얼타, 세포라에서 밀려났고 1차 열풍은 사그라졌다. 이 업체들이 밑바닥에서부터 소비자에게 제품 또는 브랜드를 각인시키지 못했던 탓이다.


2024년 12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고급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 매장에서 판매 중인 라네즈 제품. 뉴욕=박경담 기자

2024년 12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의 고급 화장품 편집숍 세포라 매장에서 판매 중인 라네즈 제품. 뉴욕=박경담 기자


미국 시장에서 '퓨어 클렌징 오일'로 인기를 얻은 인디 브랜드 마녀공장의 최진호 경영총괄 전무는 "K뷰티가 2010년대 중국에서 성공했을 때 현지 유통망만 잘 잡으면 됐는데 같은 생각으로 미국에 도전장을 내민 기업들이 쓴맛을 봤다"며 "미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선 현지 마케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잘 실현하고 있는 기업들이 2차 열풍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인디 브랜드들은 아마존을 넘어 미국 화장품 시장 본진인 오프라인 매장으로 향하고 있다. 미국 소비자가 화장품을 주로 사는 장소는 얼타·세포라 같은 화장품 편집숍이고 코스트코·타깃 등 대형마트가 그다음이다. 전체 화장품 구매량의 10% 정도만 아마존에서 이뤄진다. 화장품이 다른 상품과 비교해 써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미국에선 아직까지 오프라인 매장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2021, 2022년만 해도 K뷰티 인디 브랜드들은 얼타, 코스트코, 타깃 등에 찬밥 신세였다. 첫 번째 열풍이 잦아든 이후 오프라인 업체 사이에서 손절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K뷰티가 아마존에서 반짝 돌풍이 아닌 흥행을 이어가자 콧대 높던 오프라인 업체들이 먼저 찾아오기 시작했다.

얼타만 보면 스킨천사, 마녀공장 모두 2024년 7월 전체 매장의 절반가량인 650여 개 매장에 들어갔다. 스킨천사는 2025년부터 얼타의 거의 대부분인 1,392개 매장에 제품을 납품하고 마녀공장 역시 입점 매장 수를 늘릴지 협의 중이다. K뷰티 제품을 파는 매장을 미국 전역으로 늘릴 만큼 찾는 소비자가 많다는 얘기다.


이제 링 위에 올랐을 뿐, 옥석 고르기 시작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다만 K뷰티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K뷰티로 묶이는 게 이제 막 뜨는 브랜드 입장에선 미국 시장을 뚫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궤도에 오른 브랜드에는 족쇄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한국 화장품이 K뷰티로 뭉쳤을 땐 힘이 꽤 세나 개별 브랜드 파워는 아직은 약한 게 현실이다. K뷰티가 이제 링 위에 올랐을 뿐 진짜 경쟁은 이제부터라는 평가도 나온다. 옥석 고르기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모레퍼시픽이 라네즈, 이니스프리, 설화수 등을 K뷰티가 아닌 하나의 브랜드로 키운 건 후발 업체들이 본보기 중 하나로 삼을 만하다. 2002년 미국 법인을 세운 아모레퍼시픽은 라네즈를 2017년 세포라에 입점시키면서 현지 공략에 나섰다. 라네즈는 얼타 등 다른 유통 채널에 들어가지 않고 세포라를 통해서만 제품을 팔겠다는 독점 계약을 맺었다.

이는 고급 화장품 중심인 세포라와 라네즈의 고객층이 겹친다는 분석에서 나왔다. 다양한 가격대를 포괄하는 얼타, 중저가 위주인 코스트코·타깃까지 입점하느니 세포라가 독접 계약 업체에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세포라 키즈'로 불리는 미국 내 부유한 10대 후반~20대 초반 여성이 화장품 업계의 핵심 소비층으로 떠오른 점도 라네즈가 세포라를 고집한 이유다.

세포라는 현재 미국 전체인 580여 개 매장에 라네즈 매대를 따로 두고 크리스마스 등 주요 판촉 행사 때마다 밀어주고 있다. 라네즈가 글로벌 화장품 회사와 경쟁하는 브랜드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인디 브랜드 중에선 얼타 매장에 입점한 코스알엑스가 다른 브랜드와 함께 K뷰티 매대에 놓여 있는 대신 독립된 공간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라네즈처럼 얼타와 소비자들로부터 하나의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아모레퍼시픽은 코스알엑스의 가능성을 높게 사고 2023년 10월 이 회사 지분을 93.2%까지 확보했다.

강지웅 아모레퍼시픽 미국법인 전략팀장은 "라네즈는 스킨케어 브랜드 인지도 조사를 하면 5위권 안에 들 정도로 미국 소비자에게 익숙한 브랜드가 됐다"며 "최근 K뷰티 열풍은 시장 진입, 초기 인지도 확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아마존, 틱톡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결국 오프라인에서 개별 브랜드로 성장하는 곳이 많아져야 K뷰티 존재감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 박경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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