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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인 것만은 틀림없다"...가부장제와 싸워 온 여성이 복수를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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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이사벨 아옌데는 세계 최고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후보 베팅 사이트인 나이서 오즈(Nicer Odds)의 목록에 ‘아직’은 그의 이름이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조사해 보니 가장 큰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먼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라틴 아메리카 대표 작가 자격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니 지역 안배 차원에서 볼 때 또다시 수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12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91명이나 배출한 유럽 출신 작가들에게는 상당 기간 동안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인가? 지금까지 라틴 아메리카 작가는 겨우 6명이었다.
또 하나는 대중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대단히 감각적이고 쉽게 읽히며 재미있지만 세계고전문학전집에 포함될 정도의 문학성을 의심하는 평론가는 없다. 그게 아니라 수천만 부가 판매될 정도의 상업적 성공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는 뭔가? 그의 소설 ‘백년의 고독’(1967)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5,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마지막 하나가 이사벨 아옌데 역시 마르케스와 같은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에 속하기 때문에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에 또다시 노벨상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용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전부일 리도 없다. 의미부터 짚어 보자.
‘현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마술적 요소를 통합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문학 및 예술의 스타일 또는 장르다. 현실적 세부 묘사가 대부분이지만 마술적 요소를 통해 현실에 대한 특정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면 판타지 문학은 현실과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용어의 기원은 독일의 미술평론가인 프란츠 로가 1920년대 후기표현주의 회화를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때 ‘마법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일상 세계의 ‘마법’(일상의 사물들이 환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은가)을 강조한 것이지 사물이 환상적인 것으로 변하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다. 일상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상징적이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보면 이런 스타일은 프란츠 카프카나 샐먼 루시디,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모옌(2012년 노벨상), 올가 토카르추크(2018 노벨상)의 작품들에서도 자주, 많이 발견되는 특성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더 많은 작가들과 작품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그랬고, 그 영향을 받아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고딕소설도 그랬다. 유령이 등장하고 예언이 현실을 규정하는 신비와 초자연적인 요소가 중요한 모티브였다. 환상의 영역이 현실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침범하고 채우는 줄거리는 로맨티시즘 시대의 리얼리즘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 아메리카 작품들 성격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고, 그들에게만 한정할 것도 아니다. 현대 작가의 모든 작품은 광범위한 독서를 거쳐 이루어진 상호텍스트성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 작품들이 비록 ‘마법적 사실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모두 하나의 범주에 가둘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에 등장하는 ‘마법적 사실주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그것과 다르다.
극명하게 갈리는 점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거대 담론을 위한 신화적 판타지로 느껴질 만큼 과장된 마법성을 보인다면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미시적 삶의 ‘마법적 사실성’을 드러낸다. 특히 그의 첫 번째 소설인 ‘영혼의 집’(1982)에는 초자연적인 요소라고 해야 약간의 염력과 예언 능력을 가진 클라라의 등장이 전부다. 그리 길지도 않고 전체 스토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이후 유령으로 잠깐씩 등장하지만 현실을 다른 세상으로 바꿀 정도의 마법은 아니다. 아주 다른 방식이다.
게다가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1920년~1973년까지 칠레의 현대사가 영향을 미친 한 집안의 변화에 대한 기록임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계급 질서가 강조되던 시기를 지나 민주주의 국가를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되었다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독재국가가 된 시점까지의 역사가 배경인 미시사인 셈이다. 군사 쿠데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행방불명되고 체포 감금되어 고문을 받는 장면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의 집’은 4대에 걸친 여성들이 자신의 지혜와 의지를 바탕으로 극단적인 가부장제 가족 문화와 사회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준다. 스토리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다. 네 사람의 여자 주인공을 세대순으로 보면 1세대는 니베아, 2세대 클라라, 3세대 블랑카, 4세대 알바다. 이들 이름은 모두 흰색과 밝음을 상징한다.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니베아는 눈(雪)이고 예지력과 염력을 가진 클라라는 밝음, 금지된 사랑으로 가부장제에 저항하며 가문의 흐름을 바꿔내는 희생자인 블랑카는 순수와 희생의 상징인 ‘흰’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여성인 알바는 이 소설이라는 기록을 마무리하는 화자이며 과거 역사의 원한과 복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인공이다. 그런 역할에 걸맞게 알바는 ‘새벽’이라는 의미이다.
스토리 변화의 주역은 이 네 여자 주인공이지만 변화의 대상은 가부장제의 상징인 클라라의 남편 에스테반 트루에바다. 그의 이름도 역할에 걸맞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에스테반은 왕관이고 트루에바는 진실 또는 정직함이다. 자신의 생각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인 것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거나 의도를 거스르는 사건을 맞닥뜨리면 끔찍할 정도로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늘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정직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가끔 그가 이런 극단적인 폭력의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가부장제의 지독한 방어 기제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애정도 지극한 데가 있다. 그 애정이 세상을 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가장 큰 변화의 요인 가운데 하나는 가정 폭력이었다. 딸인 블랑카가 마을 소작인의 아들과 깊은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는 미친 듯이 폭력을 행사한다. 사랑하는 딸을 피투성이가 되어 진흙탕 속에서 꼼짝도 못할 때까지 채찍을 휘두른다. 그것에 항의하는 부인 클라라에게도 곧바로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러면서도 곧 후회하고 사과한다. 그리 낯설지 않은 장면이 아닌가. 이 사건 이후 딸과 아내는 그에게서 멀리 떠난다. 이런 전개는 그럴듯하지 않다. 필자가 아는 한 가부장제의 강압과 폭력은 그렇게 멈추지 않는다.
감동적인 장면은 알바의 마지막 기록에 담겨 있다. 알바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대상이 되어 군부에 끌려가 고문받고 강간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지만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많은 강간을 당하면서 생긴 아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겔(애인)의 아이일 수도 있지만 내 딸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자신은 아이를 기다릴 뿐, 더 이상 복수하지 않음으로써 그 원한의 고리를 끊겠다고 결심한다. 이후에 쓰일 두 편의 장편소설, ‘운명의 딸’(1999)과 ‘세피아 빛 초상’(2000)을 예고하는 마무리다.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은 페미니즘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마무리에서 보이는 것처럼 배타적이기보다는 화해와 포용의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따뜻한 페미니즘이 더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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