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독일 라디오극 '꿈'은 "톱니바퀴 속 모래"여서 거부당했고, 그래서 가장 오래 남았다

입력
2024.12.13 11:00
25면

배수아의 [ 다시본다, 고전2 ]
귄터 아이히의 라디오극 '꿈'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독일의 작가 귄터 아이히. 위키미디어 커먼스

독일의 작가 귄터 아이히. 위키미디어 커먼스

겨울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커다란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두툼한 겉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머니가 좋은 이유는 산책을 나설 때 따로 가방을 챙길 필요 없이 언제라도 손에 잡히는 책을 한 권 쓱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책길에 어디에서건 앉아 책을 펼쳐 들고 한두 페이지라도 읽을 수 있도록, 햇빛이 비치는 공원의 벤치나 독서하기 좋은 음악이 흐르는 카페, 혹은 뒷산의 바위 위에서라도.

길 위의 짧고 간헐적인 독서를 위해서 내가 자주 들고 다니던 책 중에는 독일 작가 귄터 아이히의 짧은 시-산문인 '내 사무실의 티베트인 - 49편의 마울뷰르페(Maulwürfe)'가 있었다. 원래 “두더쥐들”이라는 뜻의 마울뷰르페는 아이히가 1968년 발표한 산문집인데, 각 단편은 대부분 한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 반 정도로 짧아서 한 번 산책에 나설 때마다 한두 편씩 읽고 돌아오기에 적절한 길이였다. 하지만 마울뷰르페는 단지 그 길이로만 특징적인 산문은 아니다. 어렴풋한 이야기를 갖고는 있으나 그 형식이 전통적인 서사의 구조가 아니라 독특하게 탈중심적이며 시나 퍼즐, 정확히는 아직 완전히 맞추어지지 않은 흩어진 퍼즐에 더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아이히 자신은 이런 사문 형태를 직접 “두더쥐(마울뷰르페)”라고 명명했다. “입(마울)”과 “내던짐(뷰르프)”을 조합한 단어 두더쥐는 아이히의 산문이 입에서 흩어져 나온 조각들, 파편적 언어로 구축된 문학임을 암시한다.

알라신의 마지막 이름(외)·귄터 아이히 지음·김광규 옮김·종합출판범우 발행·270쪽·8,000원. 귄터 아이히의 방송극 3개를 묶은 이 책에 '꿈'이 수록돼 있다.

알라신의 마지막 이름(외)·귄터 아이히 지음·김광규 옮김·종합출판범우 발행·270쪽·8,000원. 귄터 아이히의 방송극 3개를 묶은 이 책에 '꿈'이 수록돼 있다.


오직 언어로만 내면 풍경 그려낸 아이히

1907년 독일 레부스에서 태어난 아이히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법학과 경제학, 중국학을 공부했으며 전쟁 중에는 라디오극 작가로 일했고 전후에는 작가 모임인 47그룹에 합류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포로로 수용소에 감금된 시절에 쓴 의도적으로 단순한 시 '재고조사', 산문 '마울뷰르페'도 유명하지만 아이히를 독문학에서 더욱 독보적으로 만든 것은 바로 라디오극이다. 라디오극은 라디오 방송용으로 탄생한 장르로 전파를 매체로 하는 청각예술이다. 초창기에는 연극을 라디오 방송용으로 각색하며 시작되었지만 곧 라디오극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구축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는 각 연방주마다 자체 라디오방송국이 생겨났고, 전쟁으로 극장이 모두 파괴된 데다가 텔레비전의 보급률도 아직 낮았으므로 라디오극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매년 500여 편의 라디오극이 방송되고 160여 편이 책으로 나왔다.

물론 시각예술의 시대로 들어선 뒤 독일에서도 라디오극의 인기는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으나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쟁 맹인을 위한 라디오극 상”은 아직까지도 수여되고 있으며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는 여전히 국제라디오극 경연대회가 열린다. 또한 라디오극은 희곡과 마찬가지로 책으로 출간되어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았다. 라디오극이 연극용 희곡과 다른 점은 배우의 동작이나 배경, 무대 위에서의 시각적인 연출 설명이 없이 오직 대사만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보다도 더욱 배우의 목소리와 언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아이히는 음향 효과를 최소화하고 오직 언어로써 내면의 풍경과 회상 등을 그려낸 소위 “언어라디오극”이라고 표현되는 작품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1953년 출간된 아이히의 방송극 '꿈'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라디오극 중 하나이다.

두려움 자극한 '꿈'은 15년간 묻혔다

'꿈'은 다섯 편의 꿈으로 이루어졌다. 각 꿈마다 꿈을 꾼 자가 명시되는데, 각각 독일인 호주인 러시아인 중국인 미국인인 그들은 꿈 내용 자체와는 무관해 보이는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꿈들은, 꿈을 꾼 자에게는 어서 잊고 싶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엉뚱한 악몽으로만 느껴질 것이다. 단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고 죽을 때까지 결코 볼 일이 없을 나라,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 그러나 설명할 수 없이 가까운 불안들로 가득한 꿈. 꿈에서 깨어난 그들은 생각한다. 사람이 악몽을 꾸는 이유는 순전히 위장 때문이다. 너무 가득 찼거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비어있는.

1951년 4월 19일 저녁 8시 50분, 대개의 가정에서 통상적으로 어린아이들은 잠자리에 든 다음이라고 간주되는 시간, 오늘날 라디오극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이히의 '꿈'이 독일에서 처음 방송되었다. 그날 함부르크의 북서독 라디오 방송국에는 수많은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방송된 라디오극 내용이 너무 어둡고 무거우며 심하게 불쾌한 장면이나 암시를 담고 있다는 거였다. “이 정도면 경찰이 개입해야 한다, 누구나 다 생존하느라 분투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구역질 나는 방송이라니”라고 한 청취자는 말했다. 어떤 청취자는 심지어 “라디오극 작가를 잡아 가두라”고 요구했다.

당시 한국전쟁의 발발로 독일인들은 다시금 전쟁의 화마가 전 세계를 뒤덮게 될까, 이제 잿더미 위에서 막 시작된 경제적 부흥이 무너져 내릴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공포, (핵)전쟁, 인간의 심연 등 '무정부적 재앙의 예감'이 주요 모티브인 작품 '꿈'은 사람들을 경악시키다 못해 불쾌하게 만들었다. 실존주의와 실험성, 불안에 기초한 미학과 나치의 악몽을 기억나게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암울한 시선이 과거의 상흔을 벗고 막 새로운 도약을 시작한 젊은 국가에 부적절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방송사는 이미 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방송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첫 방송 이후 '꿈'은 이후 15년간 라디오에서 방송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히가 오스트리아 작가 일제 아이힝어와 결혼한 1953년에 책으로 출간된 '꿈'은 문학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꿈'은 오늘까지도 라디오극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센세이셔널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1983년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한 책 '귄터 아이히 연구'. 예스24 캡처

1983년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한 책 '귄터 아이히 연구'. 예스24 캡처


"톱니바퀴 속 기름이 아닌 모래가 되어라"

첫 번째 꿈. 한 가족이 가축운반용 화물 열차를 타고 기나긴 여행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추방자들이다. 열차는 창을 열 수 없고, 이들은 절대로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한다. 고대의 노인으로 표현되는 늙은 부부는 아주 오래전 어느 새벽,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남자들이 그들을 침대에서 끌어내 기차에 싣기 이전의 세상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자식과 손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노인들의 말이 실체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바깥 세상을, 노인들이 말하는 민들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기차가 속력을 올리는 것이 느껴진다. 고대의 노인은 불운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불안에 떤다.

두 번째 꿈. 한 중국인 부부가 어린 아들을 부잣집에 팔기 위해 데려간다. 부잣집의 늙은 주인은 깊은 병이 들어 어린아이의 신선한 내장을 정기적으로 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꿈. 행복한 가족이 어느 날 밤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고 집을 떠나 도피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린 딸이 인형을 가져가려고 하자(“사랑하니까”) 이웃들은 모두 가족을 숨겨주기를 거부한다. 절망에 빠진 가족은 도시를 떠나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오른다.

네 번째 꿈. 아프리카 탐험에 나선 두 명의 러시아 연구자는 현지인 요리사가 끓여준 비밀의 야채수프를 먹은 뒤 기억을 잃는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두 망각하고 만다.

다섯 번째 꿈. 뉴욕의 한 가정, 어머니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딸을 방문한다. 그러나 곧 밝혀지는 사실은, 이들 역시 뉴욕의 다른 모든 건물,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부터 흰개미에게 갉아먹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소파에서 평화롭게 잠든 어머니는 사실상 껍질만 남은 상태로 죽어있는 것이다. 딸은 달아나기를 원하나 그녀의 남편은 그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창밖으로 거대한 번개가 지상을 내리친다.

아이히는 1972년 잘츠부르크의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유해를 스위스 베른에 있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바쿠닌의 무덤에 뿌려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묘지는 이 요청을 허가하지 않았고 아이히의 유해는 대신 베른에서 가까운 빌러 호수 인근에 뿌려졌다. 아이히의 라디오극은 현재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아무도 네 입에서 기대하지 않는 노래를 불러라! / 불편한 존재가 되어라, 세상의 톱니바퀴 속 기름이 아닌 모래가 되어라.” ('꿈'의 마지막 구절)




배수아 작가

관련 이슈태그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