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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자 '블랙리스트'가 표현의 자유?… 피해자 외면하고 가해자 두둔하는 의사들

입력
2024.09.22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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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 "블랙리스트 작성자도 피해자" 옹호
작성자 구속에 "북한 수준 인권 유린" 주장
"의료공백 막는 의사 명단" 아전인수 해석
피해자만 800여 명, 일부 대인기피증 겪어
"심각한 범법 행위" 의사 사회 자정 여론도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진료 현장을 지키는 의사들을 '부역자'로 조리돌림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유포한 사직 전공의가 구속됐지만 의사단체들은 자성은커녕 전공의 탄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블랙리스트를 "표현의 자유" "저항 수단"이라며 옹호하는 성명까지 나왔다. 무차별적 신상털기를 당한 피해자 보호보다 가해자 구하기에 열을 올리는 행태에 의사 사회 내부에서도 비판 여론이 적지 않다.

22일 의료계와 경찰 등에 따르면 의사 집단행동에 참여하지 않은 전공의와 전임의, 응급실 근무 의사 등 800여 명의 신상 정보를 담은 명단을 작성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수차례 공개한 사직 전공의 정모씨가 20일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후 의사단체들은 연일 정부와 사법부를 비난하고 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21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정씨를 면회한 뒤 "구속된 전공의와 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분들 모두가 정부가 만든 피해자"라며 "정부가 의사들 사이를 다 결딴내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블랙리스트를 통해 출신 학교, 근무지, 개인 연락처는 물론 내밀한 개인사까지 무단 공개하는 등 수백 명에게 위해를 가했는데도 피해자라고 감싼 것이다.

이달 7일 작성된 응급실 근무 의사 블랙리스트. 독자 제공

이달 7일 작성된 응급실 근무 의사 블랙리스트. 독자 제공

일부 의사단체는 블랙리스트가 '표현의 자유'이자 '저항 수단'이라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경기도의사회는 21일 서울 이태원 인근에서 집회를 열어 "투쟁과 의사 표현의 자유는 자유민주국가의 기본 요소"라며 블랙리스트를 두둔했다. 전공의 구속을 두고 "북한 수준의 인권 유린"이라고 반발했으나 피해자 인권이나 보호 조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울시의사회도 성명에서 블랙리스트 유포 행위를 "정부의 초법적 조치에 대한 저항 수단"이라고 정당화했다.

전라북도의사회는 "블랙리스트 사건은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노력해 온 의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행위를 범죄로 몰아가는 공안 통치의 전형"이라는 아전인수식 주장까지 내놨다. 블랙리스트에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 영원히 남는다'며 사직을 종용하는 문구가 있고, 임용 포기자를 명단에서 삭제해 주는 등 복귀 방해 의도가 분명한데도 '의료 공백을 막는 의사들을 칭찬하는 명단'이라고 정반대로 해석한 것이다.

블랙리스트의 온상이었던 의사 전용 커뮤니티에서는 정씨를 후원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후원금 계좌가 안내되고 입금 내역 인증 게시물이 다수 올라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병원을 지키는 의사들을 모욕, 협박하는 행위에 대해 현재까지 42건을 수사했고, 조사 대상 45명 중 32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정씨가 구속된 후 블랙리스트 사이트에는 추가 업데이트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지가 떴지만 명단은 폐기되지 않고 여전히 공개 상태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를 면회한 이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를 면회한 이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일부 의사단체가 두둔하는 것과 달리 의료 현장에서는 블랙리스트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다고 호소한다. 개인 연락처가 노출된 복귀자가 폭언과 협박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의료진이 부족한 병원에 파견됐던 군의관은 블랙리스트에 신상이 공개된 이후 대인기피증을 겪기도 했다. 서울 지역 수련병원 관계자는 "전공의 상당수는 병원에 돌아오고 싶어 하지만 집단행동을 거부하면 '부역자' '배신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의사로 살아가는 내내 집단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는 의정 갈등 해소를 가로막은 걸림돌이었다. 정부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을 철회하거나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 수련 특례를 적용하는 등 의료 현장 복귀 기회를 제공할 때마다 어김없이 블랙리스트가 등장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의료 위기설이 제기되자 응급실 근무 의사 리스트도 추가됐다. 비상 진료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왔다.

의사 사회에서도 블랙리스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없지 않다. 다만 구속 수사를 이유로 전공의 탄압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주도하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묻히는 분위기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복귀한 제자(전공의)들이 실질적 피해를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며 "블랙리스트 작성자 구속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수는 있지만 표현의 자유이자 저항 수단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질타했다. 이어 "구속됐다는 것은 범죄 행위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라며 "의사 사회의 자정 노력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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