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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 남편 보고 나온 말 “이기 미칬나 보다”… 눈물도 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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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사별자(Suicide Bereaved)'.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를 자살로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살 사별의 아픔이 비단 가족에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내포한 말이기도 합니다. 자살은 원인을 단정할 수 없는 죽음이라 남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고인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왜’라는 질문에 맴돕니다. 죄책감이나 원망이 들어차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애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입니다. 한국일보는 올해 자살 사별자들의 그 마음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 '애도'입니다.
“당신 죽고 개명도 했어, 내 이름 탓일까 봐”
8개월 만에 처음 울었다 ‘당신 외로웠겠네’
10년이 걸린 작별 인사 “자기야, 잘 가”
그날은 겨울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새벽부터 바람이 불어 유난히 추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뒤면 동지였다.
“규야, 아빠 밥 먹으라 해라.”
오전 7시 40분까지 등교해야 하는 첫째 봉규 때문에 아침 식사는 늘 오전 7시다. 끼니 준비를 마친 명빈(58)씨는 둘째를 챙기고 있었다. 봉규보다 세 살 아래인 형주는 열한 살. 또래보다 손이 많이 간다. 형주는 다섯 살 때 발달장애 1급 진단을 받았다.
남편을 부르러 간 큰아들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엄마, 아빠 없는데?” “응? 화장실에도 없나?” “그렇지. 화장실은 좀 전까지 내가 썼는데.”
‘바람이 이래 부는데 어딜 갔노? 추위도 마이 타는 사람이.’
집 안 곳곳을 살피던 명빈씨의 눈이 남편 책상 위로 향했다. A4용지 네 장이 횡대로 펼쳐져 있었다. 첫 장 맨 위에 쓰인 말이 명빈씨의 눈길을 잡았다.
‘유서’
유서? 무슨 유서? 명빈씨는 종이를 들어 읽었다. 남편이었다. 글자가 도무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이 생각만 분명했다. ‘어디 갔어, 어디로 간 거야? 찾아야 돼.’
“규야, 119! 119에 신고해라. 이모, 이모한테도 전화해서 오시라 해.”
119에선 “112에 실종 신고를 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다시 112로 신고했다.
바로 옆 동에 사는 시부모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아버님, 아범이 유서를 써놓고 나갔어요.” “그기, 무슨 소리고? 니 장난치나.”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님, 그 사람이 이런 장난칠 성격인가요.’ 전화를 끊은 명빈씨는 다리가 떨려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자 초인종이 울렸다. 경찰이었다. 경찰은 이미 새벽 5시 반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시신을 확인한 터였다. 가족을 찾던 중 신고가 들어오자 명빈씨의 집으로 온 거다.
남편이 발견된 곳은 뒷산이었다. 집에서도 내다보이는 곳이다. 믿기지 않았다. 유서에 있던 말이 떠올랐다. “나 멀리 안 갔어. 가까운 데 있으니 빨리 찾아 줘.”
남편을 보러 갈 자신이 없었다. 신원 확인은 형부에게 부탁했다. 명빈씨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절차는 그것대로 흘러갔다. 경찰은 명빈씨를 간단히 조사하고 돌아갔고,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했다. 시신은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그사이 시가에서도, 친정에서도 가족이 다급히 모여들었다.
장례식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명빈씨뿐이었다. 오후가 다 되도록 거동 없는 그에게 언니가 말했다. “가자. 가봐야 하지 않겠나.” 명빈씨가 되물었다. “내가 그기를 왜 가노?”
갈 수가 없었다. 장례식장에 발을 디디면,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들어선 장례식장엔 조문객이 먼저 와 있었다.
남편의 친구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한탄했다. 급기야 명빈씨에게도 말을 얹었다.
“연수가 힘들 때 좀 살뜰하게 챙겨주지 그랬어요.”
참을 수가 없었다.
“연수씨만 힘들었을 것 같아요? 나도 힘들었어요!”
명빈씨는 핏대를 세웠다.
‘그간 동고동락한 세월이 있는데. 함께 잠들고 함께 눈뜬 시간이 얼만데.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하지. 나는 괜찮았는 줄 알아. 나도 죽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걸 실행에 옮긴다고? 나를, 우리 애들을 두고?’ 배신감이 치밀었다. 그런 마음이 애먼 남편 친구들에게 표출됐다. 누구를 생각할 겨를이 그때의 명빈씨에겐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내겐 애들이 있다, 애들이.’ 장례식장에서 그는 무사(武士)였다.
입관까지 보지 않을 순 없었다. 시부모는 봉규를 불러 앞세웠다. ‘와, 아까지 데리고 들어가는데.’ 말리고 싶었지만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관 속에 누운 남편의 얼굴은 의외였다.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화가 났다.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 이기 미칬나 보다.”
시아버지는 남편 몸의 상흔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떨궜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게 연수씨 살아있을 때, 연수씨 힘들 때 마음 좀 써주시지 그러셨어요.’ 자식 보낸 부모의 애달픈 마음을 살피기보다 원망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시부모가 매몰차게 대했던 순간만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단단히 비뚤었던 때다.
장례식 내내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조문객은 남편의 영정 사진을 보며 “불쌍해서 어떡하냐”며 울었다. 지금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 명빈씨는 혼란스러웠다.
화장장으로 가는 운구 버스 안에선 정신을 잃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가도 참 좋겠네.’ 아찔한 생각이 아득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병원에 실려 갔다가 뒤늦게 간 화장장. 우는 가족 틈에서 오로지 아이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열네 살짜리 큰아들이 제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달려가 끌어안고 말했다. “괜찮아, 규야. 괜찮아.”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 새끼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가 보다.”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이제 명빈씨에겐 자식뿐이었다.
남편과는 동갑내기였다. 2년 교제하고, 16년을 함께 살았다. 남편 친구가 주선한 자리에서 셋이 본 게 첫 만남이다.
나이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 명빈씨는 8남매 중 막내, 남편은 3남매 중 막내였다. 남편은 자신과 달리 추진력도,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다. 남편을 보면 그래서 오뚝이가 떠올랐다. 같은 나이인데도 존경스러운 면모가 보였다.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 남편의 매력이다.
결혼 뒤에도 집안의 대소사는 남편이 챙겼다. 돈 관리도 남편 몫. 명빈씨는 매주 남편이 주는 돈으로 살림을 했다. 처음엔 불만도 있었지만, 덜렁대는 자신보다 꼼꼼한 남편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적응했다.
그런 남편의 성격은 유서에도 고스란했다. 네 장 중 세 장이 당부였으니까. 이를테면, ‘차가 고장이 나면 어디 카센터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 ‘타이어는 어디서 갈면 된다’, ‘배수관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라’….
그걸 보며 명빈씨는 기가 막혔다. ‘이런 것까지 걱정되면서 왜 갔는데!’ 명빈씨는 유서를 다시는 읽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았다. 전날 저녁만 해도 온 가족이 함께 ‘삼겹살 외식’을 했다. 식사를 한 뒤엔 남편과 차를 한잔 마시며 미래를 얘기했다. 그래 놓고 왜?
되짚어 보니 이상한 일이 있긴 있었다. 시어머니 흉을 봤는데도 남편은 여느 때처럼 버럭 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이 오십이 다가오니까 철이 드나 보네. 이제 나 귀한 줄 아는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날 남편은 생전 찍지 않던 ‘셀카’도 찍었다. 혼자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더니 명빈씨를 불러 “자기야, 이리 와 봐. 이 사진 어때? 잘 나왔어?” 했다. 몰랐다. 그게 영정 사진이 될 줄은. ‘하다 하다 영정 사진까지 미리 준비해 두고 갔네.’ 나중에야 안 거지만, 전문가들은 그것이 ‘자살 전 경고 신호’라고 했다. 다시 그 상황이 되면 과연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남편은 전업 주식 투자자였다. 원래 사업을 했지만 잘 되지 않자, 시부모가 자영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3, 4년은 잘됐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가게를 접었다. 그즈음 시부모와도 거리가 멀어졌다. 남편은 대신 전업으로 주식 투자를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망했다. 남편은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듯하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 메시지는 자신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만 남겨두고 그렇게 가버린다고? 명빈씨의 마음엔 분노가 들어찼다. 남편의 자살은 명빈씨의 삶 앞에 난데없이 떨어진 거대한 공이었다. 분노로 단단히 둘러싸인 그 공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그땐 들여다볼 엄두가 안 났다. 표피를 한 꺼풀씩 벗겨내 들어가 본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명빈씨는 계속 울지 못했다. 언니마저 “니 좀 울어야 안 되나”라고 할 정도였다. 우는 대신 아이들을 챙겼다. 오로지 아이들을 잘 먹이고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광고를 봤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심리부검센터(현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가 자살자 심리부검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심리부검은 자살의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가족이나 주변인의 진술을 통해 고인의 사망 전 심리 상태나 변화를 재구성해 가능성이 높은 요인을 추정한다.
명빈씨는 ‘이거다’ 싶었다. 심리부검이 뭔지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이건 알았다. 남편이 왜 죽었는지 꼭 알아야겠다는 자신의 마음. 남편이 죽은 뒤 자살과 관련된 책이란 책은 다 찾아서 읽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리부검을 신청하고 얼마 뒤, 집으로 상담전문가들이 찾아왔다. 심리부검 면담에서 상담사들은 물었다. “고인이 잠은 잘 잤나요.” “사망 전 우울함을 보이진 않았나요.” “경제적 어려움은 어느 정도였나요.”
대부분 남편에 관한 질문이었다. 명빈씨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남편의 마음, 남편의 시간, 남편의 삶을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남편의 자살을 누군가에게 얘기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물음에 답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수씨 참 외로웠겠네. 힘들었겠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겠네.’
남편이 죽은 뒤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상담사들이 돌아간 뒤에도 명빈씨는 밤새 목 놓아 울었다. 남편을 보낸 지 8개월 만이었다. 그리고 그건, ‘애도’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다. 명빈씨는 말하기 시작하고, 만나기 시작했다. 자살 사별자에게는 같은 경험을 한 다른 자살 사별자가 전문가 이상의 위로와 치유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절감했다. 자살 사별자들끼리 통하는 ‘주파수’, 그것이었다.
2015년 9월 처음 그 힘을 느꼈다. 남편을 떠나보낸 지 10개월쯤 됐을 무렵이다. 명빈씨는 미국을 방문했다가 처음으로 다른 자살 유가족을 만났다. 언어가 달랐지만,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통역자의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전하려는 뜻이 곧장 명빈씨의 마음에 와 꽂혔다. 자살 사별자끼리 주고받는 감정은 통역보다 빨랐다.
‘아, 이 사람들은 나와 같다. 내가 되어 들어준다.’ 마치 서로에게만 전달되는 주파수가 있는 것 같았다. ‘나, 위로받네. 인정받네.’ 남편의 죽음 이후 처음 느끼는 따뜻함이었다.
그때 만난 한 자살 사별자의 말은 지금도 마음에 남는다. 명빈씨처럼 남편을 자살로 잃은 여성이었다. “남편이 너무도 원망스럽다”는 명빈씨의 말에 그는 당부했다.
“그래도 아이들 앞에서는 남편을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안 돼요.”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아마 책에서 그런 얘기를 봤거나, 상담사가 그런 조언을 했더라면 흘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교과서의 한 구절이라 여기며. 그런데 그의 얘기는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 받아들여졌다. 어떤 뜻인지 단박에 이해가 됐다. 나에겐 남편이지만, 아이들에겐 아버지니까. 그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까지 간과하고 있었다.
명빈씨가 다른 자살 사별자를 만나게 된 건 한 다큐멘터리 촬영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EBS ‘다큐프라임-감정시대’였다. 명빈씨가 애도에 이르는 길을 좇고 돕는 취지였다. ‘애도상담’ 전문가인 고선규 임상심리학 박사가 그 길을 인도했다. 촬영도 수개월에 걸쳐 이뤄졌다. 그때 미국자살예방재단(AFSP)의 자살 유가족 걷기 행사와 AFSP의 자살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여했다.
이 경험이 명빈씨를 바꿔 놓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다른 자살 사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의 자살유족 지원 활동가로 강연을 다니고, 자조모임을 이끌었다. ‘내게 나 같은 자살 유가족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구나.’
무엇보다 명빈씨에게 도움이 됐다. 다른 자살 유가족을 만나는 일은,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나한테 이런 감정도 있었구나. 지금까지 내 안에 숨어 있었는데 몰랐구나.’ 사별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늘 과거의 자신이 새롭게 보였다.
명빈씨는 깨달았다. 자살 유가족의 애도를 도우면서, 자신 역시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그래서 명빈씨는 바란다, 이런 자살 사별자 자조모임이 전국에 모세혈관처럼 뻗어 나가기를.
명빈씨와 12일 마주했다. 10년의 겨울을 그는 마치 방금 본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듯 얘기했다.
-요즘은 어떠신가요.
“2년쯤 전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너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죠. 제가 여섯 살 아이가 돼 발가벗은 채 동굴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동굴 안은 온통 끈적끈적한 검은 흙이 가득했어요. 그 끈끈한 젤리 같은 흙이 나를 붙잡아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스스로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어떡해, 어떡해’라면서. 좀 지나니 멀리 동굴 끝에서 빛이 보이더라고요. 몸에 힘도 좀 생기고요. 나를 붙드는 흙을 떼어내면서 나갈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겨우 기어 나왔죠. 동굴 밖은 산등성이였어요. 발가벗은 채 저 아래 마을을 보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누군가 제게 담요를 덮어주면서 ‘마을로 내려가라’라고 하는 거예요.”
-신기한 경험이네요.
“그 뒤로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꿈도 달라졌어요. 그전까진 꿈에서 자주 쫓기거나 숨어 다녔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꿈에서도 당당해졌어요. 마치 마음이 개안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개명도 하셨더라고요.
“네, 2016년에 했어요. 그즈음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로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제 전 이름을 보곤 남편이 죽는 이름이라고요. 지금 같으면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랬을 텐데 그때는 그러지 않았죠. 절박했거든요.”
-어떤 절박함인가요.
“죄책감 때문이죠. ‘혹시 내 이름이 아니었으면 살 수도 있었던 거야’ 하는 생각이 탁 건드려진 거예요. 벗어나고 싶었어요. ‘이 죽음에 내가 영향을 미친 건 없어’라고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법원에 개명 신청했어요. 신청 사유에도 적었어요. ‘남편이 자살했다. 그런데 지인이 내 이름 때문이라고 하더라. 이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남편의 죽음이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대책 없이 살고 있겠죠. 마치 우리 둘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철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듯이. 처음엔 아이 때문에 매우 힘들었는데, 그 상황을 인정하고 이겨내니까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남편의 사고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해석하기가 어려웠죠. 너무 힘들었고요. 그런데 아이 덕에 남들의 시선 따위는 상관하지 않을 힘이 저한테 있었죠. 그 시선을 차단하고 나니 내면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남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내 남편이 아닌 정연수라는 한 사람의 자살로 받아들여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고. 요즘 ‘아, 이제 나의 애도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그런 말을 처음 꺼내게 되네요.”
-혹시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자기야. 봉규는 심리학과를 나왔어. 그리고 스스로 ROTC(학군사관후보생)에 지원했다. 그래서 놀랐어. ROTC가 된 봉규 모습이 얼마나 늠름한지 몰라. 보면서 정말 행복했다. 바른 성인으로 잘 컸어. 형주도 키워보니 그렇게 힘들지 않아.
자기가 왜 먼저 갔을까…. 정말 고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모습도 못 보고. 용용 죽겠지? (만약 살아있었다면) 그때 생겼던 문제가 지금 더 커졌을까. 내 생각엔 다 사라졌을 것 같아. 그런 것도 모르고… 왜 그렇게 짧게 생각했을까.
거기서도 잘 살아. 그리고 잘 가. 나는 벌써 이별했거든! 이제는 자기가 꿈에도 안 나타나니까 정말 좋다.”
남편에게 말을 건네는 동안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눈빛은 차분했다.
-남편이 꿈에 많이 나왔나 봐요.
“네. 집 안 청소를 해주고, 꽃다발을 사 오고… 꿈에서 그랬다니까요. 꿈인데도 속으로 ‘생전에 그렇게 좀 해주지’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요즘엔 안 나와요. 한 번씩 나올 땐 젊을 때 모습이나 연애할 때 감정으로 나오고요. 남편의 자살로 인한 트라우마가 많이 옅어졌다는 생각이 들죠.”
-자살 사별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손 내밀어도 된다는 거요. 저도 그랬어요.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창피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꺼려지고요. 그런데, 그래도 되더라고요. 나의 상태를 알리고 도와달라고 해도 돼요. 그렇게 해도 이웃은 그리고 친구들은 좋은 마음으로 들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손 내밀면 좋겠어요.”
-오늘 어떠셨나요.
“좋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애도가 끝났다’고 말한 건 처음이에요. 생각은 했지만 말로 내뱉고 보니 ‘아, 진짜 끝났나 보다’ 싶네요. 제게도 그 세월을 정리하는 시간이 됐어요.”
명빈씨에게도 눈뜨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끝까지 가볼까’ 하다가 아이들이 떠올라 정신을 차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런 마음이 과거에 쓴 이런 시에 담겨 있다.
“눈뜨기가 싫어서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원망스럽고
저녁 잠자리에 들면
그냥 자는 잠에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감당하지도 못하는
멍에를 씌운 신에게
허락되기를 거부했던 하루하루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누군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정말 무심히 저에게 손 내밀어주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냥
무심한 듯...
툭
그렇게...”
그랬던 명빈씨가, 이젠 편안한 눈빛으로 남편에게 진정한 작별 인사를 건넨다.
명빈씨가 육성으로 기록한 이 10년의 세월이 누군가에겐 ‘통역’이 필요 없는 위로의 주파수로 가닿을 것이다. 명빈씨가 또 다른 자살 사별자를 만나 처음 느낀 그 주파수처럼 말이다.
※오디오로 듣기 : ‘자살 사별자들이 마음으로 쓰는 부고-애도’ 시리즈는 오디오 콘텐츠로도 제작됐습니다. 이곳을 클릭하면 오디오 콘텐츠로 이동합니다. 링크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다음 주소(https://grief.hankookilbo.com/)를 복사해 붙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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