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무시한 키신저의 조언

입력
2023.12.20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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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외교 현인' 키신저, 균형외교 강조
미국 외교 노선 이단아 트럼프, 막무가내
'아메리카 퍼스트' 강화...한국, 대비했나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당시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0월 1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당시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0월 1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만나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최근 타계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70년대 미국 외교정책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닉슨·포드 행정부를 거치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국무장관으로 8년 가까이 일했고, 미중 국교 수립, 구소련과의 데탕트 추진 등 많은 업적도 남겼다.

그는 역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에서 미국 외교의 길도 제시했다. 미국식 예외주의 외교정책에 내재돼 있는 두 가지 유혹을 지적하면서다. 키신저는 “미국이 반드시 모든 불의를 시정하고 모든 혼란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인식과 자신의 내부로 시선을 돌리려는 잠재적 본능 사이 균형 잡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776년 독립선언 이래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를 선호했다.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천혜의 자연 해자를 바탕으로 자체 안정과 번영을 추구할 수 있었다. 특히 1823년 선포한 먼로독트린은 복잡한 유럽 전쟁에 미국이 휘말리지 않는 것은 물론 유럽의 미주 지역 진출까지 경계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을 현대의 십자군이자 세계경찰로 이끌면서 처지는 급변했다.

냉전이 막 끝난 1994년 이 저작을 내놓은 키신저는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적 요소와 전략적 요소 간 정확한 균형’을 강조했다. 윌슨식 이상주의와 세력균형을 인정하는 현실주의 사이에서 적절한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냉전 종식 후에도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걸프전,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모두 ‘민주주의의 확대’ 명분 아래 미국의 이익을 꾀하는 식이었다. 그런 흐름을 거슬러 극단적 고립주의로 돌아가겠다던 이단아가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 집권 4년 대서양 동맹 유럽은 물론 한국, 일본 등이 모두 ‘아메리카 퍼스트’에 시달렸다. 집권 당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5배 인상 요구 등 압력을 가하던 트럼프는 미군 철수 카드도 손바닥 뒤집듯 쉽게 펼쳤다.

지난 9월 공개된 미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외교안보 제언 보고서 ‘프로젝트 2025’에는 트럼프 재집권 후 걱정되는 대목이 그대로 담겼다. “한국이 (한국) 방어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국제기구와 협약에서 탈퇴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사전 공약 성격의 ‘어젠다 47’ 발표에서도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 유럽 배상, 대만 방어 공약 철회 등을 언급하고 있다.

현직 조 바이든 대통령을 앞서 나가는 트럼프가 내년 11월 당선된다면 한국 외교안보는 어떻게 될까. 미국이 윌슨 이래 100년 넘게 유지하던 외교정책 기조는 흔들리고, 가치에 기반한 외교 원칙 대신 ‘이익이 될 때나 동맹’이라는 거래 외교가 다시 주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미국 외교의 현인’ 키신저가 주문했던 균형외교는 무시당하고, 트럼프식 막무가내 외교가 판을 칠 게 분명하다. 설령 바이든이 재선에 성공한다 해도 경제안보 등에서 ‘미국 우선주의’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다수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은 천하태평이다. 대미 정보전 첨병인 국가정보원 미국 책임자는 윤석열 정부 등장 후 수시로 교체됐고,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를 전후해 외교안보라인 수뇌부는 안팎에서 흔들렸다. 워싱턴에선 트럼프 측 인사를 마크하고 1년 뒤 대선에 대비하느라 고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국이 이리 어수선한데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겠는가.

정상원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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