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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의 노예? 현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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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생몰, 황제 즉위와 폐위, 워털루 전투 등을 기준으로 ‘OO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문화 행사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정신을 배반하고 유럽 전역을 전쟁터로 만든 전쟁광을 기념하는 건 시대착오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한편에 있다. ‘나폴레옹 지우기’ 혹은 ‘넘어서기’라고 할 수 있는 그 비판은 옛 영광을 팔아 지금의 권세를 사려는 일부 뒤틀린 프랑스 국수·민족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 우려에도 나폴레옹은 대혁명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을 매듭지은 주역으로서 거듭 환기될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역사적 인물이다. 그가 확립한 군사·외교전략과 근대적 중앙집권체제, 민법을 포함한 방대한 법, 교육 시스템 등 굵직한 공적 행적과 더불어 사적이고 미시적인 분석들, 예컨대 여성 차별주의 등에 대한 새롭고 논쟁적인 사례와 주장과 반박들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예컨대 그의 성패를 ‘성격적 결함’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그건 마치 출구에서 시작하는 미로 찾기처럼 억지스럽고 편의적일 때가 많지만, 또 그래서 꾸준히 읽히는 아이템이다. 그가 출생신분과 작은 키 등 수많은 열등감의 노예여서, 전술적으로 훨씬 이득인 외교적 유화책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며 오직 무력을 고집했고, 적을 제압한 뒤에는 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고, 사소한 이견조차 용납하지 않고 전제적 독선을 일삼았다는 것. 한마디로 황제가 되고도 온전히 화해하지 못한 열등감 탓에, 1814년 4월 11일 폐위돼 엘바섬으로 유배됐다는 해석.
하지만 그는 한 왕족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왕좌에서 태어난 너네 왕들은 스무 번을 지고도 돌아갈 수도(首都)가 있지만, 나는 벼락출세한 군인일 뿐이어서 단 한 번만 패배해도 되돌아갈 곳이 없다.” 적어도 때로는,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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