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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TNT공장 여성 '카나리아'들

입력
2024.09.2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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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 여성 평등 임금

1963년 6월 10일, 성평등임금법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배경의 여성들은 미국 여대협회 회원들이다. JFK 대통령 박물관 사진

1963년 6월 10일, 성평등임금법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배경의 여성들은 미국 여대협회 회원들이다. JFK 대통령 박물관 사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 정부는 단숨에 여성 노동자의 최대 고용주가 됐다. 1917년 기준 미국은 영국군 무기와 포탄의 80%를 공급했고 노동자 다수가 여성이었다. TNT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보호복도 없이 작업하는 바람에 유독성 화학물질로 인해 피부까지 노랗게 변색되곤 했다. 광부들이 갱도의 유독가스를 감지하기 위해 휴대하던 카나리아 새장을 빗대 자칭 타칭 ‘카나리아(Canaries)’라 불렸던 그들 중 최소 400명이 전쟁 기간 유해물질 과다 노출로 숨졌다. 미군이 참전하고 노동력이 달리면서 여성들은 민간 부문에도 대거 진출했다. 버스-전차 차장, 우편배달부 경찰 소방관 은행 텔러, 중장비 기사 등등. 1914년 23.6%였던 노동연령 여성 고용률은 18년 46.7%가 됐다.

여성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가 처음 제기된 것도 1차대전 때였다. 파업이 잇따르자 전시내각은 1917년 여성임금실태 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 제안을 수용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천명했다. 다만 “숙련된 남성을 완벽하게 대체한 여성에 한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수혜자는 극소수였고, 그나마 전시에 국한된 조치였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일이 재연됐다. 군수물자의 안정적 공급과 노사분규 통제, 임금 인상에 따른 인플레 억제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전쟁노동위원회(WLB)는 1942년 9월 25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재천명하고 11월 일반지침을 통해 법제화했다. 거기에도 ‘비례적 노동에 대한 비례적 비율’ 원칙, 즉 “유사 직종에서 유사한 양과 질의 작업에 한해 동일임금을 지급한다”는 전제가 달렸다. 물론 입증 책임은 여성들 몫이었다.

여성 노동력이 체력과 생리 등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남성 노동력에 못 미친다는 정부와 사용자, 시민 대중의 인식은 2차대전 때도 달라진 게 없었던 셈. 저소득 직종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도 그 인식은 차별의 근거로 남아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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