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심판론 꺾은 임신중지권”…차기 대선도 흔든다

입력
2022.11.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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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권 공약, 경합주 민주당 승리 견인
5개 주 주민투표서 임신중지권 보장 지지
2024년 대선 앞두고 핵심 의제로 급부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압승이 무산된 중간선거 결과를 평가하면서 웃음 짓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압승이 무산된 중간선거 결과를 평가하면서 웃음 짓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경제도 중요하지만, 내 몸도 중요하다.’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기대했던 ‘레드 웨이브’는 없었다. 치솟는 물가와 퍽퍽해진 살림살이에 호소한 공화당의 ‘경제심판론’이 예상보다 먹혀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공화당의 ‘KO승’이 무산된 이유 중 하나로 진보 가치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임신중지권(낙태)’ 문제가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다. 임신중지권 침해로 위기감을 느낀 여성들과 민주당 지지층이 투표소로 쏟아져 나왔고 결과적으로 선거 판도를 바꿨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주(州)에서 중간선거와 함께 치러진 임신중지권 관련 주민투표에서도 유권자 다수가 ‘임신중지권 보호’에 표를 던졌다. 2024년 차기 대선을 앞두고 임신중지권 이슈가 정치 지형을 재편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 예상 밖 선전… 유권자 “임신중지권 중요”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주 주지사가 8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디트로이트=로이터 연합뉴스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주 주지사가 8일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디트로이트=로이터 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은 경합주로 분류됐던 펜실베이니아, 미시간주, 공화당 성향이 강한 캔자스주에서 실시된 주지사 선거 등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결정적 요인으로 임신중지권 보장 공약을 꼽았다.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는 선거운동 기간 “임신중지권 수호자”를 자처하며 표심을 파고들었고, 로라 켈리 캔자스 주지사도 임신중지권 지지 여론이 승리를 견인했다고 자평했다.

실제 유권자들도 임신중지권이 투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CNN 등 방송사 의뢰로 실시된 에디슨리서치 출구조사에선 “임신중지권이 미국에 가장 중요한 이슈”라는 답변이 29%로 인플레이션(31%)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또 임신중지권 합법화에 60%가 찬성하며 반대(37%)를 압도했다.

올해 6월 헌법에 보장된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폐기한 연방대법원 판결에 대해서도 ‘분노’(39%)와 ‘불만족’(21%) 등 부정적 의견이 60%에 달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다수가 민주당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 문제 못지않게 임신중지권 이슈가 이번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선거운동 막바지에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념적 의제 대신 국민적 관심사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팟캐스트 방송에서 “우리는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2020년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던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임신중지권은 중요하지만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신중지권의 파급력이 약해졌다는 평가 속에 선거 전략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데이비드 코언 애크런대 정치학 교수는 “임신중지권 폐기 판결은 민주당원들을 투표소로 이끈 동기부여 요인이었다”며 “많은 미국인은 민주주의 위기를 우려했지만 전략가들은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진보·보수 불문 임신중지권 지지… 공화당 전략 수정 불가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투표소에서 나오고 있다. 팜비치=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투표소에서 나오고 있다. 팜비치=AP 뉴시스

5개 주에서 실시된 임신중지권 관련 투표는 하이라이트였다. 캘리포니아주, 버몬트주, 미시간주 주민들은 주헌법에 임신중지권 보장을 명시하는 법안에 각각 65%, 77%, 57%가 찬성 표를 던졌다. 공화당 텃밭인 켄터키주는 임신중지권을 박탈하는 주헌법 개정안을 투표에 부쳤는데 52.4%가 반대 표를 행사했고, 몬태나주도 임신중단 시술을 하는 의료진을 규제하는 방안을 52.6%가 거부했다.

임신중지권 옹호 단체 가족계획연맹은 “메시지는 분명하다. 임신중지권은 정당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임신중지권이 선거 판도를 바꿔놓았다”고 평했다.

이번 중간선거가 2년 뒤 치러질 차기 대선의 전초전이라는 점에서 임신중지권 이슈가 향후 미국 정치 지형을 재편하는 핵심 의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음 선거를 노리는 정치인들에게 임신중지권 문제가 다른 무엇보다 호소력이 강한, 이른바 ‘잘 팔리는’ 이슈라는 깨달음을 줬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권 관련 논의가 달아오를수록 민주당에는 유리하다. 공화당 입장에서도 ‘임신중지 규제·처벌 강화’를 비롯한 극단주의적 의제로는 지지층 결집에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만큼 선거 전략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분석기관 파이브서티에이트는 “임신중지권 문제가 부각되면 민주당은 더 많은 탄약을 얻겠지만, 공화당은 지지기반인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에게 발목 잡힐 수 있다”며 “임신중지권은 다음 대선까지 결정적 정치 이슈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표향 기자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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