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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도 보이도록 ‘어린이’ 써 놓았는데...이곳을 정조준한 러시아군

입력
2022.03.17 19:32
수정
2022.03.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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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폴에서 주민 1,000명 대피한 극장 피격
체르니히우에선 빵 사던 주민 10명 몰살 '참변'
英 "러시아군 대공 무기 소진… 구형 무기 의존"
우크라, 납치된 점령지 시장 구출 "끝까지 저항"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에서 어린이를 포함해 수백 명이 대피한 극장이 16일 러시아군 공습을 받아 파괴됐다. 공습 이틀 전인 14일 미국 상업위성업체 맥사(Maxar)가 촬영한 마리우폴 극장 모습. 건물 앞과 뒤 공터에는 어린이가 있음을 알리는 '어린이(дети)'란 러시아어 글자가 보인다. 마리우폴=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에서 어린이를 포함해 수백 명이 대피한 극장이 16일 러시아군 공습을 받아 파괴됐다. 공습 이틀 전인 14일 미국 상업위성업체 맥사(Maxar)가 촬영한 마리우폴 극장 모습. 건물 앞과 뒤 공터에는 어린이가 있음을 알리는 '어린이(дети)'란 러시아어 글자가 보인다. 마리우폴=AP 연합뉴스

“어린이(Дети)”

머나먼 하늘 위에서도 건물 앞마당에 쓰인 글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아이들이 있으니 이곳만은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호소였다. 러시아군이 한눈에 알아보도록 러시아어로 적혔다. 그러나 그들은 무자비하고 잔혹했다. 글자를 표적 삼아 도리어 조준 폭격했다. 명백한 ‘집단학살’이자 ‘전쟁범죄’다.

건물 앞 공터에 러시아어로 '어린이'라고 적어 놓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극장. AP 연합뉴스

건물 앞 공터에 러시아어로 '어린이'라고 적어 놓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극장. AP 연합뉴스


17일(현지시간) 주요 외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남동부 마리우폴을 포위하고 있는 러시아군은 전날 주민 대피소로 쓰고 있던 극장까지 공격했다. 어린이와 노인 등 1,000여 명이 몸을 숨긴, 마리우폴에서 가장 큰 대피소였다. 포탄이 쉼 없이 빗발치는 탓에 구조대는 한동안 접근하지 못했고, 주민들은 밤새 폐허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출구를 막은 건물 잔해가 치워지면서 생존자들이 하나둘 빠져 나오고 있지만, 정확한 인명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미국 CNN방송은 “건물 내 모든 사람들이 생존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우려했다.

이번 공격은 인명 살상 의도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특히 경악스러웠다. 미국 위성업체 맥사가 14일 찍은 위성사진을 보면 극장 앞과 뒤 공터 두 곳에는 큼지막하게 러시아어로 ‘어린이’라고 적혀 있다. 우주에서도 보이는 이 글자를 러시아군이 못 봤을 리 없다. 마리우폴 시의회는 “항공기가 건물 위에서 포탄을 떨어뜨렸다”고 밝혔다. 대피소라는 걸 알고도 공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시의회는 “러시아군의 잔학행위를 묘사할 만한 단어조차 찾을 수 없다”며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주민들이 대피해 있던 극장이 포격으로 훼손된 모습. 마리우폴=AP 뉴시스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주민들이 대피해 있던 극장이 포격으로 훼손된 모습. 마리우폴=AP 뉴시스

같은 날 극장에서 4㎞가량 떨어진 수영장도 포격을 당했다. 이 건물에는 어린이와 여성, 임산부만 있었다. 다행히 구조대는 곧바로 도착했지만,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환자와 의료진, 주민 400여 명을 가둬 놓은 병원에서도 인질극에 가까운 억류가 계속됐다. 한 병원 직원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러시아군은 총을 쏘고 우리는 지하실에 있다”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세르히 오를로프 마리우폴 부시장은 14일 하루 동안 떨어진 미사일 개수만 100기가 넘는다고 CNN에 말했다.

전날 또 다시 닫혔던 주민 대피로는 17일 어렵사리 열렸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포격을 멈추지 않아 주민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마리우폴을 간신히 떠난 피란 차량이 공격을 당해 어린이 2명을 포함해 5명이 다쳤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마리우폴에서 현재까지 민간인 사망자 수가 최소 2,5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물과 식량, 의약품이 떨어진 지도 이미 오래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포위돼 러시아인 100만 명 이상이 숨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전’을 언급하며 “마리우폴 봉쇄가 레닌그라드 봉쇄와 뭐가 다른가. 러시아는 테러리스트 국가가 됐다”고 비판했다.

마리우폴뿐 아니라 북부와 동부, 남부 등 주요 격전지에서도 참변이 속출했다. 북부 체르니히우에서는 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던 주민 10명이 몰살당했다. CNN은 “현장 영상 분석 결과 포탄 또는 로켓이 주민들을 명중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폐허가 된 기숙사 건물 잔해 더미에서 어린이 3명 등 시신 5구도 발견됐다. 체르니히우에서 16일 하루 동안 확인된 사망자만 무려 53명에 달했다.

미국 위성업체 맥사가 16일 공개한 사진.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민간인 거주 지역이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체르니히우=AP 뉴시스

미국 위성업체 맥사가 16일 공개한 사진.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 민간인 거주 지역이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불타고 있다. 체르니히우=AP 뉴시스

러시아군의 공격 행태는 갈수록 광폭해지고 있다. 정밀성이 떨어지는 구형 무기들까지 전장에 투입되고 있는 탓이다. 영국 국방부는 17일 보고서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영공 장악에 실패하면서 계획보다 훨씬 많은 대공 무기를 소진했을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군사적으로 덜 효과적이고 민간인 사상자를 초래할 위험이 큰 구형 무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토록 무수한 포탄을 쏟아 붓고도 러시아는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영국 국방부는 “육지, 해상, 공중에서 미미한 진전을 이뤘을 뿐”이라며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여전히 강력하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빼앗긴 땅을 되찾기보다는 러시아군 병력과 군사장비를 최대한 많이 파괴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반격을 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군이 점령한 헤르손에서 러시아 헬기를 격파하는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러시아군 사망자를 최소 7,000명으로 집계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에 끌려갔던 이반 페도로우 멜리토폴 시장도 구출해 냈다. 2002, 2003년생 러시아 징집병 9명과 맞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페도로우 시장은 러시아에 협력하라는 압박을 끝까지 거부했다”며 “우리 모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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