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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라진다

입력
2025.01.15 18:30
수정
2025.01.15 18:51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외국어가 많은 무인 단말기. 노년층은 기기뿐만 아니라 외국어로 인한 불편함도 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외국어가 많은 무인 단말기. 노년층은 기기뿐만 아니라 외국어로 인한 불편함도 크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껏 멋을 내고 친구 딸 결혼식장에 간 일흔여섯 살 오병철씨. 어찌된 일인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한마디 내뱉는다. "환장하겠네." 친구들 표정도 심상찮다. "기계에 축의금을 내라고? 말세야 말세. 쯧쯧." 서너 명이 키 큰 기기와 마주 서서 화면 여기저기를 건드려 본다. “에이!” “젠장!” 뭔가 뜻대로 되지 않나 보다. 때마침 공대 출신 친구가 왔다. 기대도 잠시, 낯선 기기 앞에선 그도 헤매긴 마찬가지다.

#모처럼 아들과 단둘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여든여덟 살 김충한씨. 지갑에 오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챙기며 연신 싱글벙글 웃는다. "아들, 오늘 점심값은 엄마가 낼게." 식당에 들어가며 기분 좋게 목소리 높여 말한다. 그런데 식탁 위에 놓인 기기가 충한씨 기분을 망쳤다. 사람 대신 음식 주문을 받더니 계산은 카드로만 하란다. 답답한 마음에 식당 주인을 불렀지만 황당한 말만 돌아왔다. "어르신, 오늘만이에요. 다음부턴 카드로 결제하세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밥값은 물론 축의금과 조의금도 사람이 아닌 기기가 받는다. 병철씨 상황이 궁금하겠다. 결국 신랑 친구의 도움을 받아 축의금 내는 데 성공했다. 기기 화면에서 신부를 선택한 후 축의금을 넣으니 식권과 주차권이 나와서, 밥도 먹고 친구들과 웃으며 헤어졌다. 충한씨는? 그날 점심을 먹은 후 아들 손잡고 은행에 가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결혼식장과 식당에 있던 기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가는 곳마다 서 있다. 영화관 버스터미널 커피집 은행 병원 장례식장…. 이 기기, 키오스크(kiosk, kiosque)라고 부른다. 페르시아어 ‘쿠슈크’(kushk)에서 온 이름이다. 오래전엔 궁전을 뜻했지만, 지금은 신문 음료 등을 파는 작은 매점을 말한다.

키오스크. 낯선 데다 발음하기도 어렵다. 국립국어원은 무인 안내기, 무인 주문기로 쓰길 권장한다. 말하기가 훨씬 편안하다. 그런데 무인 주문기 안에도 외국어가 넘쳐나 문제다. 'sold out'은 품절, 'hot'은 뜨거운, 'ice'는 차가운, 'take out'은 포장 구매 등으로 알기 쉽게 바꿔야 한다. 은행에서 사용하는 기기엔 한자어가 너무 많다. 출금을 돈 찾기, 입금은 돈 넣기, 계좌이체는 돈 보내기 등 우리말로 안내하는 은행 기기가 반가운 이유다.

바쁜 세상, 기기가 일을 하니 좋은 점도 많다. 그런데 혼례 장례 등 친지나 이웃과 함께 웃고 우는 곳에선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붓펜으로 경조사 봉투에 마음을 담아 글을 쓰던 시절이 그립다.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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