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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이 목적이 된 구호단체의 현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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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공연 역사상 가장 뜨겁고 성대했던 1985년 7월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이 당시 33세의 아일랜드 싱어송라이터 겸 사회운동가 밥 겔도프(Bob Geldof, 1951~) 등의 기획과 헌신 덕에 성사됐다는 건 꽤 알려진 사실이다. 에티오피아 기아 난민을 돕기 위한 저 세기의 공연으로 겔도프는 이듬해 영국 왕실 훈장(KBE, 2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저 공연의 배경에 영국 BBC TV가 84년 10월 23일 송출한 장장 7분여의 에티오피아 기아 실태 보도가 있었단 걸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저 뉴스를 특종 보도한 당시 BBC 아프리카 지국장 마이클 버크(Michael Buerk, 1946~)는 “밤의 추위를 뚫고 태양이 떠오르면(…) 지금 이 20세기에 전개되고 있는, 성서적 규모의 대기근의 비참이 함께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곳이 지상에서 가장 지옥과 가까운 곳이라고 말합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유튜브가 ‘성인 인증’을 요구하는 충격적인 영상을 소개했다.
굶주림에 기진해 숨소리조차 잦아든 아이들, 연신 들것으로 시신을 옮기는 가죽만 남은 사람들, 간신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절망의 시선들…. BBC 영상은 전 세계 425개 방송사를 통해 거듭 보도됐고, 각국 언론사는 경쟁적으로 특파원을 파견, 더 끔찍하고 적나라한 영상으로 세상을 아연케 했다. 밥 겔도프가 ‘밴드 에이드’를 꾸려 그해 12월 자선 싱글 ‘Do They Know It’s Christmas?’를 발표하고 이듬해 저 공연을 기획한 배경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보헤미안 랩소디'를 열창한 프레디 머큐리 등 세계적 팝스타들이 흔쾌히 동참한 이면에 저 보도가 있었다.
더 앞서, 아프리카 특파원들의 베이스캠프(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버크에게 에티오피아 가뭄과 기아의 심각성을 알리며 현장 취재를 요청한 국제구호활동가 패디 코울터(Paddy Coulter, 1946.7.11~ 2024.11.3)가 있었다. 반(反)빈곤-반불공정 무역 국제단체 ‘옥스팜(Oxfam)’의 홍보 책임자이자 아프리카 전문가인 코울터는 한 해 전인 84년 지구적 차원의 기상 이변-가뭄, 홍수, 사이클론 등-이 초래한 현재와 미래의 재앙에 대한 예언적 리포트 ‘기상의 배후(Behind the Weather)’로 기자들의 주목을 받던 활동가였다. “이미 광범위한 고통이 시작되고 있다. (…) 조만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최악의 지역이 어디일지 알게 될 것이다. 에티오피아가 그중 한 곳이 될 것은 거의 확실하다.”
BBC 보도 이후 수많은 국제구호단체들도 아프리카 현지로 몰려들었고, 뉴스 영상 속 활동가들의 유니폼 덕에 옥스팜은 그해에만 1,250만 파운드의 특별 기부금을 모금했다. 코울터의 전화 한 통은 NGO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펀드레이징(fundraising) 성공 사례였다.
코울터는 89년 4월 영국 진보 독립매체인 ‘New Internationalist’에, 84년의 옥스팜 사례를 비롯한 국제 국호단체의 모금 관행에 찬물을 끼얹는 칼럼을 발표했다.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조장하고 고착화하는 아프리카 및 세계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이미지들이 외면하거나 의도적으로 감춘 현지인들의 자구 노력과 인간적 존엄, 빈곤과 저개발, 재난의 궁극적 원인과 맥락들, 즉 제국주의 역사와 잔재, 냉전과 이후 국제적 수탈구조와 기형적 정치 체제 등. 그는 84년 당시 옥스팜이 채용한 에티오피아 현장 활동가 108명 가운데 100명이 현지인이었지만 뉴스 영상에 등장한 활동가는 전원 백인이었다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백인 구원자 신드롬(White Savior Syndrome)’이나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 같은 용어들이 알려지기 훨씬 전이었다.
그는 평생 수많은 국제 NGO의 출범과 지향, 활동 전략 수립을 돕고 이끌며 그들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고 수혜자의 역량 강화와 지속가능한 개발 이니셔티브의 토대를 구축했다. 또 약자의 목소리를 중시한 저널리스트이자 저널리즘 교육자로서, 전 세계 중견 언론인들을 상대로 보도 윤리와 책임의식 등을 가르쳤다. 20세기 국제 NGO의 등대 같은 존재였던 그가 별세했다. 향년 78세.
코울터는 1946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도축업자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의 쌍둥이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일랜드-북아일랜드 분단에 저항한 무장테러단체 ‘IRA임시파’가 출범(1947)하던 무렵이었다. 당연히 그는 아일랜드계 구교파와 잉글랜드계 신교파의 민족적-종교적-이념적 갈등과 불화, 테러 사태를 직간접 체험하며 성장했다. 다수파인 개신교도(장로교) 아버지와 퀘이커교도 어머니는 그에게 사도 요한을 기려 ‘John’이란 이름을 선사했다.
존 코울터는 라틴어와 유럽사를 정규 커리큘럼으로 가르치던 중등 문법학교를 졸업하고 64년 옥스퍼드대 퀸즈칼리지에 입학했다. 태어난 곳은 벨파스트지만 성장한 곳은 주민수 약 6,000명(2021년 기준)의 작은 시골 마을 발리나인치(Ballynahinch)였다. 큰 도시를 거의 가본 적이 없던 그에겐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수도 런던도, 엘리트주의를 공간적으로 구현했다고 '악명' 높은 옥스퍼드대 캠퍼스도 무척 이질적이었다고 한다.
2023년 옥스퍼드대 학보 인터뷰에서 그는 캠퍼스가 “마치 나를 못 들어오게 담장을 두른 수도원 같았다”고 회고했다. “나무로 된 문을 두드려보라”는 불친절한 안내만 받고는, 예나 지금이나 간판조차 없는 수많은 건물들을 노크하고 다녀야 했던 사연을 소개하며 그는 “런던 사설 클럽들처럼” 자격을 갖춘 사람만 들어오라는 듯 오연한 캠퍼스의 선민적 배타성을 비판했다.
그런 캠퍼스와 달리 그는, 오랜 동료인 체코 출신 국제인권변호사 바버라 부코프스카(Barbora Bukovska)의 말처럼 “어느 모임에서든 가장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탁월한 위트와 '북아일랜드 촌놈' 기질을 앞세운 자학 개그로 학창 시절부터 인기를 독차지하곤 했고, 교내 록밴드 ‘아드바크(Aardvark)’의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직업 뮤지션의 꿈을 품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69년 결혼한 아내 앤절라 코울터(Angela C.D. Coulter)와 함께 가톨릭 국제관계연구소(CIIR)가 주선한 아프리카 구호 프로그램에 자원해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부모가 준 성스러운 이름 대신 대학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패디(Paddy)'로 개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패디는 아일랜드계를 가리키는 멸칭이라고 한다. 부부는 에티오피아에서 만 2년 활동한 뒤 예멘으로 옮겼고, 코울터는 거기서 옥스팜 현장 활동가로 취업했다. 개명도 모자라 가톨릭 기관과 함께 활동하던 장남 때문에 끌탕하던 어머니는 장남의 취업을 무척 반겼다고 한다. 아프리카 국제구호활동가로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89년 ‘뉴 인터내셔널’ 기사에서 그는 국제 구호단체 모금 홍보물의 약 60%가 “슬픈 표정과 커다란 눈동자로 갈망하듯 카메라를 응시”하는 여성 및 어린이 ‘희생자’들의 사진을 쓰는 실태 및 사례들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모금 전문가들의 항변도 함께 소개했다. “의식을 고양하는 건 나중 일이고 당장 급한 건 돈”이라던, 당시 수단에서 활동하던 유엔위원회(UNA) 관계자의 말, “(모금에서) 먹히는 건 오직 (서구 부유층 백인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뿐이다. 충격을 줘야 한다”던 UNA 모금 대행업자의 말, 빠듯한 모금 예산으론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론 등.
코울터는 무기력한 구원의 대상으로 표상되는 이미지가 중장기적으로 해당 국가 및 대륙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영국 등지의 인종 소수자에 대한 백인, 특히 청소년들의 인종주의를 조장하며, 이민자들에게도 열등의식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도구일 수 있다고, 그들을 돕는다면서 오히려 그들의 존엄을 박탈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국제 구호단체의 우선순위는 재정비돼야 한다. 모금을 최우선 목표로 삼기보다 얼마만이라도 대중 교육의 책임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그가 말한 ‘교육’이란 한마디로 맥락이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개발국의 가난과 낙후, 재난 취약성의 주요 원인인 서구 제국주의 및 냉전의 역사, 그로 인해 왜곡된 정치-사회문화적 현실에 대한 홍보. 인도주의적 ‘구원자-백인’ 이미지가 감춰온 ‘우리’의 범죄자적 책임의식도 함께 일깨워야 한다는 의미이고, “가난에 대한 백인의 뻔한 관점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가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모금 단체가 최대한 많은 돈을 모으는 데 몰두하는 한 그들은 지속적으로 현지 아이들을 착취할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선 잠재적 기부자의 심리적 요구는 제3세계 수혜자의 요구보다 더 시급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썼다.
‘노팅힐’과 ‘러브 액추얼리’ 등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각본을 쓴 저명 영화감독 리처드 커티스(Richard Curtis)가 그를 찾아와, 아프리카 기아 난민 캠프에 코미디언을 파견하고 싶으니 조언을 청한 것도 85년이었다. 코울터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현장에 코미디언을 보내겠다는 발상이 처음엔 무척 역겨웠”지만 “어쩌면 그들이 구호단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들을 도왔다. 광의의 ‘사회적 서커스’ 단체로 커티스와 저명 코미디언 레니 헨리(Lenny Henry) 등이 만든 코미디방송 국제구호단체 ‘코믹 릴리프(Comic Relief)’가 그렇게 출범했고, 코울터는 85년 창립부터 10년간 이사로 동참했다. 코울터는 에티오피아 난민 움막에 모여 앉은 난민들을 방송 카메라가 차례로 비추다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던 레니를 클로즈업한, 한 프로그램 장면을 무척 인상적으로 기억했다. “시청자들이 너무나 잘 아는 레니처럼, 난민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고, 코울터는 2015년 ‘코믹 릴리프 30주년’ 특집 방송에서 회고했다.
그가 코믹 릴리프를 떠난 것도 저명 백인 배우(Julie Walters)와 함께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청소년 현실을 보여주는 영상을 제작하면서 그들이 아이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모조리 삭제 편집한 직후였다. 그는 "나는 개인적으로 모금액이 적더라도 '교육적인 성과(educated pound)'를 더 얻길 원한다"고 사임 의사를 천명했다.
64년 대학 신입생이던 그는 동창회격인 '옥스퍼드 유니언(Oxford Union)’이 주최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학내 토론회에서 당시 아랍연맹 영국사무소 사무국장 에드워드 아티야(Edward Atiyah, 1903~1964)가 발언 도중 쓰러지던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레바논계 영국인으로서, 옥스퍼드 동문이면서 제국주의 및 아랍 전문가로 유명하던 아티야는 66년 필즈 메달을 받은 수학자 마이클 아티야의 아버지다. 그는 토론회에서 시오니스트 그룹의 일방적인 야유와 고함 속에서 어렵사리 발언을 이어가다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훗날 코울터는 ’플랫폼 박탈(No Platforming, 발언 저지)’ 행위에 대한 그날의 분노가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갖게 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 세계인권선언 19조에서 이름을 따 1987년 출범한 국제 인권 및 언론 자유 옹호단체 ‘Article 19’의 창립 이사 겸 초대 의장으로 활약했고, 87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 미디어를 통한 글로벌 NGO 이슈 전문 매체인 영국 ‘국제방송트러스트(IBT)를 이끌며 100여 편의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해 BBC 등에 제공했다. 유엔 창설 50주년에 맞춰 제작한 4편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Under the Blue Flag’로 96년 유엔주재언론인협회(UNCA)가 수여하는 저널리즘 ‘골드 어워드(Gold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2001년 모교인 옥스퍼드대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 소장으로 발탁돼 2007년까지, 전 세계 중견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언론 자유와 책임에 대해 가르쳤고, 2019년까지 ‘옥스퍼드 가난 및 인간 개발위원회(OPHD)’ 홍보 책임자로도 활약했다. 방송인 겸 저널리즘 교육자로 활동하면서도 옥스팜과 유니세프, 코믹 릴리프 등 수많은 NGO들의 이사 또는 멘토로 인연을 이어갔다.
코울터는 국제 구호단체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중 하나로, 현장 경험이 아예 없거나 부족한 마케팅 전문가들이 외주 등을 통해 모금 분야를 장악한 현실을 꼽았다. 한마디로 모금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처럼 돼버린 현실이었다. 활동에 대해서도 그는 “구호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돈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그 돈을 매개로 수혜자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이며 “그 근간은 (자활의) 힘을 북돋우는 데 있어야 하고 모든 개발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고 믿었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자신의 아일랜드적 정체성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오직 럭비에서만 ‘통일’을 이룬 아일랜드-북아일랜드 단일팀의 맹렬한 팬이기도 했다. 그는 유럽 6개국 럭비 대항전 ‘식스 네이션스 챔피언십’이 열릴 때면 골수 잉글랜드 민족주의자들조차 웃게 만드는 어투와 몸짓으로 ‘반(反)연합왕국’의 민족적 열정을 쏟아내곤 했다고 한다.
그는 보건 윤리 및 정책 전문가로 활동해온 아내 앤절라와 54년 해로하며 2녀를 두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각계의 애도가 쇄도했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의 유쾌한 위트와 공감력, 드문 친화력과 용기, 추진력을 기렸다. 부코프스카는 “그가 없는 세상이 훨씬 어둡게 느껴진다"고 자신의 SNS 계정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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