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쌀 적게 거둔 아시아·아몬드 크기 줄어든 미국'… 비어가는 세계 식탁

입력
2025.01.15 04:30
8면
구독

중국·일본·베트남 등 쌀 생산 줄어 '시름'
작년 미국 산불 발생에 땅 4000㎢ 소실
"식량난 악화, 저개발국 빈곤 문제 이어져"

지난해 6월 중국 중부 하남성 화셴현의 저수지가 오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화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해 6월 중국 중부 하남성 화셴현의 저수지가 오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화셴=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난 수준의 기후변화는 인류의 먹거리마저 위협한다. 국경을 초월한 극한 기온과 이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각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자연의 경고는 직관적이다. 이상 기후에 발 빠르게 나서지 않는다면 결국 전 세계 식탁이 텅 비게 된다는 것. 주요 국가들은 자국 식량 안보를 지키려 부심하지만 갈수록 악화하는 환경에 식량 위기 그림자만 짙어지는 분위기다.

식량난 예방 사활 건 중국·일본

중국은 식량 위기에 특히나 민감한 국가다. 전 세계 경작지의 8%를 보유하고 있지만, 세계 인구의 18%에 달하는 14억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만큼 식량난 예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은 폭염·가뭄이 지속됐던 지난 2022년 쌀 생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중부 지역 농경지의 ‘용수로’ 격인 양쯔강 수위가 낮아지며 118만 헥타르 농경지가 가뭄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7월 중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같은 달 대비 2.7% 상승,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으로 돼지 사료값과 신선 야채 가격이 폭등한 게 주요 원인이었다. 식량 물가가 기후변화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이상 기후로 중국에 폭염이 찾아온 2022년 8월 충칭에서 시민들이 말라붙은 양쯔강을 따라 걷고 있다. 충칭=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상 기후로 중국에 폭염이 찾아온 2022년 8월 충칭에서 시민들이 말라붙은 양쯔강을 따라 걷고 있다. 충칭=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1981~2010년 오존 오염 등 기후변화로 중국 작물 수확량이 10% 감소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지난해 3월 내기도 했다. 적은 경작지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구조 탓에 기후변화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중국은 식량 위기를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규정하고 전방위적 식량난 예방 사업을 벌이고 있다. 농경지 확대 사업만으로는 식량난 위기를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 지난해까지 200여 개의 국가급 시범 해양 목장을 설립해 수산물 양식량을 늘리기로 했다.

이웃 국가 일본 상황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여름 일본 전국에서는 쌀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쌀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마트가 햅쌀이 들어오기 전인 지난해 7, 8월 한 사람당 5㎏짜리 쌀 1개만 살 수 있게 구매 제한을 걸 정도였다.

지난해 7월 일본 도쿄 시내 한 슈퍼마켓 쌀 매대에 쌀이 비어 있다. 매대에는 '한 가구당 쌀 한 점만 구매 가능'이라는 안내 문구도 걸려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지난해 7월 일본 도쿄 시내 한 슈퍼마켓 쌀 매대에 쌀이 비어 있다. 매대에는 '한 가구당 쌀 한 점만 구매 가능'이라는 안내 문구도 걸려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주요 원인은 폭염이다. 이상 고온에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좋은 품질의 쌀 생산량이 크게 줄면서 시장에 내보낼 수 있는 쌀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고시히카리 같은 일본의 고품질 쌀은 더위에 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상 기온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쌀 품질도 떨어지는 상황이다. 지난해 7월 일본 전국 평균 기온은 26.2도로, 관련 조사를 시작한 1898년 이후 역대 가장 더운 7월로 기록됐다.

두 달 뒤(9월) 햅쌀이 유통되면서 쌀 품귀 현상은 해소됐다. 그러나 이례적인 쌀 구매 대란을 겪은 탓에 쌀값은 크게 폭등했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달 발표한 11월 쌀류 가격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63.6%나 상승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쌀값 상승률은 1971년 이후 역대 최고”라고 평가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평균 기온이 섭씨 53도까지 치솟았던 지난해 7월 데스밸리 국립공원에서 관광객들이 온도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데스밸리=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캘리포니아주 평균 기온이 섭씨 53도까지 치솟았던 지난해 7월 데스밸리 국립공원에서 관광객들이 온도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데스밸리=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멸종 위기 처한 미국산 호두

기후변화에 시름하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긴 재배 기간을 담보하는 지중해성 기후, 비옥한 토양, 용수 접근성 등에 힘입어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많은 농산물 생산량(약 13%)을 자랑하는 캘리포니아주는 최근 몇 년 사이 폭염과 가뭄, 홍수가 번갈아 일어나는 극단적 날씨로 특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해지는 캘리포니아 산불 소식은 기후의 극단화를 방증한다. 캘리포니아에서만 지난해 7,930여 건의 산불이 ‘자연적으로’ 발생했고 축구장 59만5,000여 개와 맞먹는 약 4,250㎢ 규모의 땅이 화마에 희생됐다. 발생 건수와 소실 면적 모두 지난해까지의 5년 평균을 웃돈다. 지난 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화한 산불은 역대급 피해를 낳고 있다.

미국 산림청 소속 소방관이 지난해 6월 캘리포니아주 고먼 지역에서 대형 산불 '포스트 파이어' 불길을 잡기 위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고먼=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산림청 소속 소방관이 지난해 6월 캘리포니아주 고먼 지역에서 대형 산불 '포스트 파이어' 불길을 잡기 위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고먼=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캘리포니아는 400여 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미국산 아몬드, 호두, 복숭아, 포도 등의 독점 공급원 혹은 주 생산지다. 국 농무부는 뜨겁고 메말라가는 기후 탓에 아몬드, 피스타치오, 복숭아 등의 열매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후변화 영향을 연구하는 비영리단체 하이타이드 파운데이션의 마르시아 델롱 디렉터는 “온도 상승으로 2045년이면 (미국에) 토마토, 당근 같은 여름 작물 재배 면적이 거의 없어지고, 2060년부터는 피스타치오와 호두가 더 이상 재배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바닷물에 말라가는 베트남 곡창지대

아시아 최대 곡창지대이자 ‘쌀 광주리’로 불리는 베트남 메콩 델타(삼각주)는 육지까지 밀려든 바닷물로 말라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가뭄이 잦아지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바닷물이 저지대 경작지까지 밀려들었고, 높은 염도에 농작물이 고사한 탓이다. 2023년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이 지역 농작물 피해액은 70조 동(약 4조 원)에 이른다.

베트남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던 2016년, 기후 환경학자인 레안투안 껀터대 교수가 껀터시에서 말라버린 저수지를 확인하고 있다. 레안투안 교수 제공

베트남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던 2016년, 기후 환경학자인 레안투안 껀터대 교수가 껀터시에서 말라버린 저수지를 확인하고 있다. 레안투안 교수 제공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적정 염도는 리터당 염분 1g(1,000ppm) 수준. 그러나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던 2020년 5월에는 하구에서 40~50㎞ 떨어진 농지에서도 4g의 염분이 확인됐다. 바닷물이 메콩강 지류를 타고 내륙까지 스며들었다는 얘기다. 거리로만 따지면 인천 앞바다 바닷물이 서울 강남구까지 흘러간 꼴이다.

짠물의 역습에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땅도, 생산량도 줄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메콩 델타 전체 면적(400만 헥타르) 중 쌀 재배 면적은 200만 헥타르가 넘었고, 연간 쌀 생산량도 2,500만 톤에 달했지만 지금은 150만 헥타르의 경작지에서 2,100만 톤가량만 생산할 뿐이다.

2023년 4월 베트남 껀터시 끄롱 벼 연구소에서 쩐응옥탁 소장이 휴대폰으로 메콩 델타 하류 염수 침해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껀터=허경주 특파원

2023년 4월 베트남 껀터시 끄롱 벼 연구소에서 쩐응옥탁 소장이 휴대폰으로 메콩 델타 하류 염수 침해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껀터=허경주 특파원

베트남 정부가 높은 염도에도 견딜 수 있는 쌀 품종을 개발하는 등 대응에 부심하지만, 바닷물은 이보다 더 빨리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다. 현지 환경부는 2021년 보고서에서 “해수면이 1m 상승하면 쌀 생산량은 연간 760만 톤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메콩 델타 수확량 감소는 베트남 국내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베트남은 태국, 인도와 함께 세계 3대 쌀 수출국이다. 필리핀, 스리랑카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 아프리카까지 이 쌀이 간다. 세계인의 밥상마저 뒤흔들 수 있다는 의미다.

베트남 기후·사회학자 레안투안 껀터대 교수는 한국일보에 “기후변화와 이에 따른 식량 문제는 개별 국가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구 증가로 세계 쌀 수요는 늘고 있는데 공급량이 줄어들 경우 식량난이 악화하고 국제 쌀 가격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특히 저개발 국가와 취약계층의 빈곤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23년 4월 베트남 껀터시 끄롱벼연구소에서 한 연구원이 염해에도 잘 견디도록 개량된 벼 품종 샘플을 살피고 있다. 껀터=허경주 특파원

2023년 4월 베트남 껀터시 끄롱벼연구소에서 한 연구원이 염해에도 잘 견디도록 개량된 벼 품종 샘플을 살피고 있다. 껀터=허경주 특파원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도쿄= 류호 특파원
베이징= 조영빈 특파원

관련 이슈태그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