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진흙탕에 파종"… '유럽의 식탁' 프랑스 농부 '식량 위기' 걱정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이 지역 연평균 강수량은 약 700㎜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1,500㎜였어요. 기존 배수 시스템으로 감당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어요. 지난 2년간 지독한 가뭄을 견뎠는데 홍수라니, 어느 장단에 맞춰 농사를 지어야 하나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50㎞ 떨어진 중북부 센에마른주(州)의 크레시라샤펠 코뮌(행정단위). 이곳에서 밀 농사를 짓고 있는 장 필리페(54)는 한국일보에 이같이 토로했다. 1997년부터 농사를 지어 온 '베테랑'이지만 최근 몇 년간의 극단적 기후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할아버지가 정착한 이곳에서 아버지에 이어 제가 농사를 계속하고 있어요. 각별한 곳이고 농사는 특별한 직업인데, 이상기후 탓에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나마 저는 땅이 물을 잘 흡수하도록 개량해 둔 터라 작황이 나았어요. 주변 농부들 상황은 최악입니다. 땅이 온통 진흙탕이라 흥건한 물 위에 파종한 이들이 숱합니다."
유럽연합(EU) 27개국 중 가장 많은 작물을 수확하는 '유럽의 곡창' 프랑스의 농민들이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으로 신음하고 있다. 프랑스국립통계청(INSEE)의 '2024년 농업 계정 1차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작물 수확량은 6.8% 감소했다. 최다 비중을 차지하는 밀 생산량은 27%나 줄었다. 필수 작물의 수확 부진은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프랑스가 '특이 사례'는 아니다. 전 세계에서 이상기후는 잦아지고, 그 강도도 높아지며, 식량 공급 불안이 야기되고 있다. 이에 프랑스 곡창 지대를 찾고, 현지 전문가를 인터뷰해 기후위기가 인류의 식탁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봤다.
프랑스 농업부에 따르면 이 나라 국토 절반가량인 28만 ㎢가 농경지로 분류된다. 농장 개수만 약 45만6,000곳, 그야말로 '농업 대국'이다. 그러나 작황 걱정에 한숨을 쉬는 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파리 남쪽 약 130㎞ 지점에 위치한 루아레주의 코트랏 코뮌에서 밀, 옥수수, 보리 등을 재배하는 '40년 경력 농부' 올리비에 살로슈(56)도 그렇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2024년 수확량이 최저치를 찍었어요. 물이 넘치면 작물이 썩거든요. 보리는 평년 대비 절반만 수확했고, 밀은 씨도 못 뿌렸죠."
실제 지난해는 정말 비가 많이 왔다. 프랑스 농업 데이터 분석 기관 '핀레스' 보고서에 따르면 농경 시즌(1~7월) 강수량은 평균 612㎜로, 1991~2020년 같은 기간 대비 45% 많았다. 기상 관측 이래 2001, 2016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프랑스 대표 곡창 지대 6곳의 연간 수확량과 강수량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농사철 강수량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수확량이 감소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16년과 지난해 6개 지역의 밀 수확량은 각각 1,925만 톤과 2,378만 톤. 2010년 이래 수확량 2,500만 톤 미만은 이때뿐이다.
문제는 더 있다. 극단적 고온, 가뭄 등도 잦아졌다. 지난 40년간 프랑스 연간 밀 생산량의 '상징적 기준'인 3,000만 톤 아래로 떨어진 연도를 보면 유형은 두 가지다. 2003년과 2020년에는 '많은 비'가 흉작 원인이었고, 2016년과 2024년은 반대로 '적은 비'가 문제였다. 핀레스의 플로랑 바르시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일보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홍수나 가뭄이 아니라 두 극단 상황에 모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상이변 주기는 빨라지고 있어요. 2016년과 지난해 극도로 습한 현상은 2050년까지 약 30% 더 자주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극단적 기후 조건에서 어떤 날씨가, 언제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프랑스 남부 누벨아키텐주 지역농업회의소 베르트랑 뒤마 예측경제연구관·프랑크 미셸 예측연구관이 전한 상황도 비슷했다. "(온화한 기후인 프랑스 남부) 누벨아키텐은 보통 연 300만 톤의 밀을 생산해 왔어요. 그런데 2024년엔 190만 톤에 그쳤습니다. 2023년 가을부터 습한 날씨가 계속돼 파종을 할 수 없었거든요. 전체 농경지 약 4,750㎢ 중 파종이 가능했던 땅은 3,600㎢뿐이었습니다. 2019년에는 폭염과 장마, 2020년에는 폭염과 서리, 2021년에는 서리, 2022년에는 서리와 가뭄. 해마다 지구온난화 영향을 더 체감하고 있어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작년 11월 EU 집행위원회 농업·농촌개발부 회의에서 간사 피에르 바스쿠는 EU의 그해 작물 생산량을 2억5,560만 톤으로 예상했다. 평균보다 9% 적은 수치였다. 옥수수 추정 생산량(5,800만 톤)과 밀 추정 생산량(1억1,260만 톤)이 각각 12%, 11% 감소했다고 한다. 그는 "유럽 남동부의 가뭄, 과도한 가을 강우가 작물의 양과 질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유로뉴스는 "EU의 곡물 생산이 2007년 이후 최소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며, (농업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필요 식량'보다 '생산 식량'이 적은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은 기우라는 시각도 있다. 기후위기에 따른 식량 생산량 감소를 기술 발전으로 보정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식량난 가능성을 결코 배제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기후변화 파급력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데다 전 세계적 인구 증가, 작황 불안에 따른 가격 상승, 농민들의 직업 포기 등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50년까지 식량 생산량이 최대 30% 감소할 수 있고, 가격은 최대 50%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식량난 우려는 기후위기 최전선에 있는 농민들이 가장 크게 느끼고 있다. 이에 이상기후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농민들도 적지 않다. 필리페는 "물을 더 잘 흡수할 수 있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흙을 개량하고, 여러 농산물을 동시에 재배하고 있다"고 했다. 살로슈는 "농사를 지을 때 '최대치'를 욕심 내는 대신, 흙에 회복력을 주도록 적당량만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개인의 대응은 쉽지 않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뚜렷해지는 기후변화를 본다면 '먹을 밀이 없는 시대가 온다'는 말을 '한가한 소리'로 치부할 수 없을 겁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