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정지 대통령 3명, 87체제 결함 없나
개헌 필요하지만 국회에 맡겨선 또 좌절
특별 의회 구성 국민참여형 개헌 나서야
“한국 대통령 윤석열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고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에 정치 활동을 중단시키고 미디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동료들이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묻는다.”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지난 5일 게재된 ‘미국에서도 계엄이 벌어질까’라는 칼럼 첫대목이다. 칼럼 요지는 한국에서 벌어진 위험하고도 터무니없는 일이 미국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사법 체계는 대통령의 계엄 발동권을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규정하고 있고 대통령 재량권이 넓은 편이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2020년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다 국방부 장관과 군 수뇌부의 반대로 철회했던 전력이 있다는 것이 그 근거다. 대통령제 민주주의 원조인 미국조차 한국에서 벌어진 느닷없는 계엄 시도에 자국 헌법 조항을 따져보며 긴장하는 모습이다. 중국은 늘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계해 왔는데, 한국 계엄을 중국의 공산당 일당 체제의 우월성을 자국민에게 강조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 5일 “한국 정치는 심각한 당파적 반대와 극도로 치열한 정당 분쟁이 특징”이라며 정당 간 갈등이 계엄 시도의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하며 불과 50여 년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에 오르게 했던 ‘K민주주의’의 국제적 명성이 한순간에 흔들리고 있다. 14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계엄과 군사독재의 위험은 사라졌다. 하지만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37년간 계속돼 온 ‘87년 체제’의 한계는 그대로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3명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는데, 헌법 체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과 국회가 맞설 때 중재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K민주주의가 다시 세계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양당 체제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할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2016년에도 기회가 있었다.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20일 후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구성했다. 국민 80%의 개헌 찬성 속에 진행된 개헌특위는 여야의 소극적 자세와 야당 국민투표법 개정 보이콧으로 국회 개헌안 마련에 실패했다.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자체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역시 국회에서 투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산됐다. 87년 체제를 고치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여야 모두 공감한다. 하지만 헌법으로 임기와 권한이 보장된 이해당사자인 국회가 적극적이고 중립적으로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개헌을 위한 특별 의회를 구성하는 건 어떨까. 프랑스의 지성, 기 소르망이 한국 계엄 사태를 맞아 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스에 보내온 특별기고에서 내놓은 제안이다. 그는 개헌이 유일한 목적인 특별 의회 구성원은 개헌 후 4년 동안 어떤 선거도 출마할 수 없도록 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 여기서 만들어진 헌법은 국민투표로 승인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2011년 아이슬란드 헌법심의회와 2021년 칠레 제헌의회 같은 전례도 있다. 둘 다 실제 개헌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한국이 실현한다면 국민참여형 개헌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작동을 멈춘 한국의 민주주의를 제 궤도로 돌려 놓기 위해서는 시급한 과제가 많다. 하지만 급할수록 문제의 근본 원인을 고치려는 대책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전 세계가 찬탄하다 하루아침에 반면교사가 돼 버린 ‘K민주주의’를 제대로 손보고 대통령 탄핵 같은 혼란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8년 전 무산된 개헌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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