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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끊은 ‘안가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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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비상계엄 사태 전개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들이 공식 절차나 규범을 무시하고 비공식적 수단에 의지해 국정을 운영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안전가옥(안가) 활용이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3시간 전 경찰 수뇌부를 서울 삼청동 안가로 불러 계엄 사실을 통보했다. 계엄 다음 날인 4일엔 장관과 수석 등이 안가에서 만났다. 장관의 국회 답변에 따르면 “평소 자주 보지만 (따로 보는) 자리를 못 해서 해가 가기 전에 보자”는 모임이었다고 한다.
□ 대통령 안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장소인 ‘궁정동’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궁정동 6곳 등 총 12곳의 안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대통령이 따로 사람을 불러 은밀하게 국정을 논의하는 ‘밀실통치’ 무대로 쓰였다. 김영삼 정부 때 다른 곳을 다 없애고 삼청동에만 안가를 남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 삼청동 안가에서 대기업 총수를 불러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 문제의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이가 윤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구중궁궐에 숨어 살면 안 된다”면서, 거액을 들여 용산 대통령실과 한남동 관저를 따로 조성한 사람이 윤 대통령이다. 그랬던 그가 다시 청와대 옆 안가에서 내밀한 모임을 가져 왔다는 사실은 매우 실망스럽다. 식당에서 하면 될 장관들 사적 모임까지 안가에서 열린 것을 보면, 이 정부에서 얼마나 안가가 광범위하게 이용됐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 우리는 안가(safe house) 하면 ‘대통령’이 바로 떠오르지만, 영어 위키피디아에는 ‘목격자, 정보원, 기타 위험에 처한 사람을 숨겨주는 집’이란 용례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통치자 등 강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공간이란 말이다. 본보가 올해 초 연재했던 범죄 피해자 기획기사에는, 추가 범행 우려에 전전긍긍하는 보복범죄 피해자들이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고충을 겪는 사례가 등장한다. 정작 안전이 필요한 이들은 떨고 있는데, 가장 안전한 이들이 안가에 앉아 술·밥을 먹으며 ‘안전’을 독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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