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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피’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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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임을 알고도 목숨을 바치는 이에겐 필연의 외로움이 있는데, 그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노동 투쟁에 대한 고전 텍스트를 보자면,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전태일)와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영혼의 한 조각”(미국 소설 ‘분노의 포도’)이란 표현은 동서를 가로질러 무척 닮았다. 또 군부 쿠데타 후 죽음을 앞둔 칠레 아옌데 대통령은 “이 라디오는 끊어지겠지만, 여러분은 제 목소리를 계속 듣게 될 것,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산자여 따르라”고 한다. 즉, 죽음을 넘어 동료·후대와 같이 하겠다는 결의가 외로움을 밀어낸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가 숨 쉬듯 당연해지면,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듯 이들의 동행을 인식하긴 어렵다. 그러니까 12·3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는 그 당연했던 공기(민주주의)를 일거에 없앰으로써, 과거 인물들을, 내 옆에 서 있는 피투성이 동지의 모습으로 불러낸 사건이라 하겠다. 살과 피가 있고, 두려움에 떨고, 매 순간 각오를 다지는.
유튜브에서 내란 사건 뉴스를 보다가, 알고리즘의 안내로 5·18민주화운동 영상이 담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보게 됐다. 계엄 사건 후 최근 댓글로 가득했다. “오늘 우리는 40년 전 피를 흘려 세운 민주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또 다른 피를 막아내는지 지켜봤다” “‘자유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을 이제 이해한다” “내 인생 전체를 이분들에게 빚졌다” “고립된 상태에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이 슬픔과 원한과 트라우마의 역사가 차고 넘치는데도, 국회를 봉쇄해도 되고, 언론과 출판을 막아도 되고, 나아가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 또는 이를 굳이 막거나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세력을 더 가르칠 수는 없다.
부자감세를 하느냐 마느냐, 근로시간을 늘리느냐 마느냐, 국정농단이 단죄 대상이냐 아니냐, 일본과의 굴욕외교가 이익이냐 아니냐로는 토론할 수 있지만, 12·3 사건은 토론의 영역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뭐가 틀렸는지 따져보자는 사람은, 한두 단계 논리만 거치면 국민을 사살하는 것도 합리화할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계엄은 해제됐고, 한 명의 희생도 없었으니 “해프닝(홍준표 대구시장)”인가. 5·18의 분노에서 시작해 6·10항쟁으로 이어진 그 경험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 기억이 국민을 국회로 달려가게 했고, 오늘의 피를 막았다.
그러니 필요한 건 기억이다. “1년 뒤엔 다 찍어주더라”(윤상현 의원), “대통령 담화 곱씹자”(나경원 의원)며 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 정치인은, 국회에 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보낸 내란죄 현행범을 부패·권력형 비리(국정농단,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와 등치하는 궤변을 토한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탄핵을 막기 위해 헌법재판관 임명까지 반대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정치인이 무섭다. 탄핵을 반대한 이가 권력을 잡으면, 또 계엄을 계획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보수나 진보가 아니라, 국민의 피에 대한 문제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영상 첫 장면에, 44년 전 광주시민들이 들고 행진하는 현수막 글귀가 보인다. ‘독재없는 민주의 땅.’ 그때의 요구 사항은 지금과 놀랍도록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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