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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집단처형 명령서에 서명한 전후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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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수족 봉기(Sioux Uprising)’라고도 불리는 다코타 전쟁이 1862년 7월 시작됐다. 미국의 군사 압력으로 미네소타 준주의 근거지에서 쫓겨나 미네소타강 상류로 이주한 다코타 수족은 전통적인 사냥터를 잃은 데다 양도조약에서 백인들이 약속한 밀가루 등 식량 보장 조항이 상원에서 일방적으로 삭제되면서 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됐다. 미국 공식 역사가 ‘전쟁’이라 부르는 수족 봉기는 미국 정부의 불의에 맞선 수족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서부대평원 ‘인디언 전쟁’의 서막에 해당되는 그 봉기로 수족은 또 한 번 무참히 희생됐다. 봉기를 진압한 미국 군사위원회는 미네소타 인디언 지도자 등 392명의 ‘포로’를 군사법정에 세웠다. 링컨에 대한 다수의 책을 집필한 해럴드 홀저에 따르면 당시 피고들은 변호인의 조력 없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검사들의 논고를 들어야 했고, 일부의 경우 재판에 걸린 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법원은 303명에게 사형을, 16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일국 차원의 민주주의 특히 강대국 정치인의 위선과 한계를 드러낸 예일 순 있지만, 일부 좌파의 주장처럼 처형 명령서를 링컨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재판 기록을 일일이 검토한 링컨은 12월 9일,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264명을 감형하고 39명에 대해서만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했고, 26일 형 집행 직전 1명에 대해 추가로 집행유예를 명령했다. 홀저는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이 링컨에게 “죽음으로 교훈을 얻게 해야 한다”며 “자비는 훗날 커다란 정치적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4,000여 명의 백인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38명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고, 시신은 약 30분 동안 교수대에 방치됐다. 미네소타 역사학회는 처형당한 이들 중 2명은 ‘카스케(장남)’ 등 수족에게 흔한 이름 탓에 잘못 불려 나와 변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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