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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참는 게 버릇인 나...회사 사람이 괴롭히면 참다가 퇴사를 해버려요

입력
2024.12.02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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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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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구원 기자

그래픽=박구원 기자

전자 부문 연구소에 다니다 공황 증상으로 잠시 일을 쉬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연구소에 다닐 때 저를 함부로 대하던 상사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사실 들어가는 직장마다 ‘빌런’들이 괴롭혀서 참다 못해 관둔 적이 많아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 일을 당한 듯해서 앞으로는 단호하게 대처하려 합니다. 오랫동안 화를 참고 지내다 보니 웃으며 살려고 해도 웃는 게 웃는 것 같지 않아요. 7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어 처방 약을 복용 중인데 이따금 화가 솟구쳐 다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게 힘듭니다.

저는 조용하고 개인적인 편이어서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싫어하고 누가 제 사생활에 왈가왈부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감정도 잘 억제하는 편입니다. 사람 사이에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저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늘 존대하고 존중하려 노력해요. 예민한 성향 탓인지 누가 나를 신경 쓰게 만들면 금방 몸이 나빠지고 공황 증세가 오더군요. 그래서인지 직장에 다닐 때는 이런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면 대충 웃어 넘기지 말고 단호하게 내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이죠.

저의 가족사는 조금 복잡합니다. 아버지는 화를 속으로 삭이는 성격인데 사업상 문제로 거래처와 소송을 오랜 기간 진행 중이어서 좀 지치신 듯합니다. 어머니는 술을 드시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질 정도여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술을 줄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돈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셨고 제게도 짜증을 많이 냈어요. 제가 아버지를 닮아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정이 안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동생과 저를 차별하셨고요. 지금도 어머니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아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아버지가 어렵게 버티셨겠구나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제가 겪은 가난이 아버지의 사업 탓이었기 때문에 원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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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셰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어요. 올해 새로 입주한 아주머니 때문에 골치가 아픕니다. 제게 잔소리를 하고 사생활까지 간섭하며 잔소리를 합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들어와 피곤한 상태에서 물을 마시러 주방에 나갔더니 "젊은 애가 늘어져서 기운 없이 다니는 게 보기 싫으니 웃고 살라"고 한 적도 있어요. 회사에서 감정노동을 하다 왔는데 집에서까지 그래야 하나 생각하니 화가 나더군요. 다른 분들이 무시하라고 해서 서너 달 참고 지냈지만, 다시 간섭과 참견이 반복됐습니다. 가족사로 머리가 복잡한데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받으니 힘듭니다. 인생이 안 풀리는 것 같아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열심히 살았는데도 제 인생에는 걸림돌만 많은 것 같아 화가 쌓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쌓였던 화가 당장 치밀어 올라올 땐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적당한 직장에 다시 들어가 더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싶고요. 이런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 수 있을까요.

유진희(가명∙33∙시간제근로자)

진희씨가 오랫동안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솟구치는 화로 인해 고생하셨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요. 비슷한 종류의 어려움이 반복된다면 관련된 심리적 요인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에게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화를 참으며 지내는 진희씨의 성향과 최근 셰어하우스에서 겪는 불편한 마음 사이에는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감정 표현을 못하는 성격과 참견을 싫어하는 성격은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타인에게 간섭받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감정 표현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참견을 받으면 내가 그어 놓은 경계를 타인이 넘어 오는 느낌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대와 거리가 어느 정도 있으면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경계를 지킬 수 있는데, 경계를 넘어 가까워지면 감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게 마련이니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감정을 표현하다 보면 관계가 나빠질 수 있고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상대의 평가가 좋지 않을 수도 있죠. 내 감정 표현이 좌절되거나 무시당할 수도 있습니다. 표현하더라도 바뀌지 않으면 무력감이 들 수도 있고요. 이런 다양한 이유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회피를 선택하곤 합니다. 여러 리스크를 피하려다 보면 결국 참는 게 낫겠다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이지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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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표현에 대한 두려움으로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피하려 하는 진희씨 성향의 원인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진희씨는 기질적으로는 부모님을 닮아 화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이 화내는 모습을 보면서 진희씨는 화를 내는 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거예요. 어머니에게 "네가 아버지를 닮아 기분이 나쁘고 정이 안 간다"는 식의 심한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 동생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경험 때문에 진희씨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기피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나 싶습니다.

가족 안에서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지내면 더 독립적인 성격의 사람으로 자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해결되지 않은 의존 욕구 때문에 오히려 의존적 성격이 되어서 가족을 굉장히 신경 쓰고 의식하게 됩니다. 진희씨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수 있어요. 실은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의존했다가 상처를 받거나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표면적으로는 독립성을 추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타인과의 경계를 뚜렷하게 긋고 감정 표현도 가급적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한 거죠.

사람에겐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진희씨처럼 가족 안에서 두려움을 겪은 경우엔 감정 표현을 주저하게 될 수 있어요. 진희씨에게는 감정을 표현했다가 무시당하거나 혼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표현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요. 결국 화가 나도 억누르고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패턴이 되어서 우울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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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씨가 화가 쌓이지 않도록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적절히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내가 왜 이렇게 감정을 속으로 쌓는 사람이 됐는지'를 이해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희씨가 아버지를 닮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어머니가 말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화가 많은 부모님을 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내 감정을 억압했는지, 그때 진희씨 안에서 어떤 두려움이 있었는지, 그런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피했는지 등을 제대로 인식하려 노력해 보세요.

진희씨에게선 불편한 감정을 '내 성격이 예민해서'라고 취급하며 스스로 억압하는 패턴도 보입니다.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진짜 이유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내 감정을 섣불리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하지 마세요. 자기 감정을 우선은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감정 표현이나 거절을 잘 못하는 성향을 바꾸겠다면서 갑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주의하세요. 자칫 수위 조절이 안 되고 정도가 지나친 표현을 하게 되어 사람들과 갈등이 커질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다시 감정을 억누르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죠. 감정에 대해 즉각 반응하지 말고 시간을 끌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시간을 번 다음 진희씨의 감정을 찬찬히 살펴본 다음에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를 결정하는 것이지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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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감정을 느낄 때 웃어 넘기거나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진희씨를 불편하게 한 사람에게 정색하는 표정을 짓거나 최소한 무표정으로 대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은밀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부터 해보는 것이죠. 사소한 상황에서부터 조금씩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세요. 예를 들어 날씨가 추우면 가만히 참고 있기보다 문을 닫아 달라고 요청하는 식으로 가벼운 표현부터 연습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진희씨 감정에 맞춰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을 해보겠단 마음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기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진희씨의 감정 표현 패턴이 오랫동안 굳어졌기 때문이죠. 그럴 때는 ‘또 감정을 속으로 삭였구나’ 하면서 자책하기보다는 ‘그때 내가 표현은 못 했지만 이런 감정이 들었다’ 하고 되짚으면서 나중에라도 감정을 살펴보고 그 감정이 든 이유를 하나씩 써보는 감정일기 쓰기도 추천합니다.

진희씨가 스스로 진희씨 편이 되어서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하기를 응원합니다. 감정을 표현해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더 부드러워지고 자연스러워지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오래된 마음의 어려움들이 점차 해결될 테니까요.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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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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