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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들의 술 이야기가 쏟아진다…"중독자·외톨이·병자의 책이 더 많이 나타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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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외면받는 시대에서도 곳곳에서 영업을 이어가는 다채로운 독립서점은 독서를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전혼잎의 독립서점’에서는 한국일보에서 문학을 담당하는 전혼잎 기자가 ‘문학’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큐레이션합니다. 자주 들러서 읽어주세요.
산문집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임유영)와 ‘취중 마음 농도’(설재인·이하진) ‘술꾼들의 모국어’(권여선). 그리고 장편소설 ‘친애하는 나의 술’(김신회). 제목만으로도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이 책들은 모두 여성 작가가 썼다. 다양한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각자 풀어놓은 술 이야기다. 술에 관한 애호뿐 아니라 중독과 치유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은 주제를 다룬다.
술과 문화예술, 그중에서도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문학계에도 작품 원고료를 술값으로 모두 탕진했다거나 며칠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술을 마셨다는 문인들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문예지 문학세계가 술과 문학을 특집 주제로 삼은 적 있고, 언론이 문단의 주당(酒黨)을 꼽는 기사를 쓰는 등 과거에는 이를 진지하게 다루기도 했다. 물론 남성 문인들만의 이야기였다. 문학계의 술자리에 여성은 주객(主客)이 아니었다.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를 쓴 임유영(38) 시인은 “여성의 과도 쾌락 탐닉은 징벌이나 교화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며 “예술의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아서 술이나 담배, 성(性)을 탐닉하는 여성 작가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면이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음주와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늦었지만, 지금은 여성 작가가 중독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까지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최근 여성 작가들의 술에 관한 책도 이런 흐름으로 서점가에 잇따라 등장할 수 있었다.
산문집 ‘오늘 뭐 먹지?’(2018)를 올해 ‘술꾼들의 모국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으로 낸 소설가 권여선(59)은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고 책에 썼다. 그의 말대로다. 한국 사회에서 작가가, 특히 여성 작가가 ‘그런 이미지’가 되어선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권 작가는 과거 산문집 출간 당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점을 숨기면 구차하니까 상이용사처럼 '이거 봐라' 한 거다.”
여성과 술은 20세기 들어 성평등 인식 확산과 맞물려 이전과는 다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여성의 음주를 연구하는 패치 스태던 영국 울버햄프턴대 교수는 저서 ‘여성과 알코올’에서 “여성이 더 공개적으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은 여성에게 강요된 절제에 맞서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성이 술에 대해 쓰거나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열두 살 차이의 설재인(35)·이하진(23) 작가가 술을 마시며 서로에게 쓴 편지를 묶은 산문집 ‘취중 마음 농도’를 기획한 출판사 밝은세상의 김민희 편집자는 “처음부터 여성 작가를 필진으로 고려했다”며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사회적인 시선이나 관계 등 여러 이유로 마음속에만 품는 여성이 아무래도 남성보다 많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취기를 빌려 거침없이 푸는 이야기의 화끈함, 세상을 향한 날 선 시각 등은 발화자가 여성일 때 그 쾌감이 더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덧붙였다.
사회에서 여성의 음주를 당당함과 연결 지어 소비하면서 생긴 부작용도 있다. 바로 중독이다. 여성의 과음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문제를 겪는다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타인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스태던 교수의 진단이다. 여성의 음주가 더 이상 금기는 아니라지만, 여성의 술 이야기가 여전히 드물고 나아가 중독 이야기는 더욱 드문 이유다.
17년 차 에세이스트 김신회(46) 작가의 첫 소설책이기도 한 ‘친애하는 나의 술’은 여성 알코올중독자 ‘재운’이 주인공이다. 프리랜서 번역 작가로 삶을 꾸려나가던 재운은 “이까짓 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끊을 수 있어”라고 여기지만, 그럴수록 그의 일상은 수렁에 빠진다. 실제로 술을 끊으려 단주모임에 가는 등 여러 일을 해봤다는 김 작가는 소설을 통해 “알코올중독자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면서 “주변 사람, 혹은 바로 책을 읽는 당신이 중독자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전했다.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는 알코올에 의존하는 이들의 치유와 자립을 위한 미국 공동체인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A.)에서 여성의 중독 여부를 진단하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 시인은 “여성은 보여지되 ‘여성 중독자’는 보이지 않아야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라면서 친애한다는 중독자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읊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진 리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최승자…. “이들의 작품을 대할 때 훨씬 더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임 작가는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중독자, 외톨이, 병자들의 책이 나타나고 읽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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