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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교수 클레버링가의 저항의 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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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26일, 네덜란드 레이던(Leiden)대 법대 학장 루돌프 클레버링가(Rudolph R. Cleveringa, 1894~1980)가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인 민법학자 에두아르트 메이어스(Eduard Meijers, 1880~1954)의 강의실에 대신 들어섰다. 메이어스가 다른 유대인 교수들과 함께 나치에 의해 갑자기 해고당했기 때문이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가 그해 5월 당시 중립국을 표방한 네덜란드를 침공해 단 나흘 만에 항복을 받아내고 통치하던 때였다.
클레버링가는 나치 교육예술과학부가 보낸 한 통의 편지 내용 즉 “점령지 국무회의의 지시에 따라 정부 공직자 및 동등한 지위를 가진 국립대학 교수진 가운데 비(非)아리안의 일괄 해임을 통보”한 사실을 소개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메시지에 대한 감정적 수식을 붙이려 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든 이 메시지가 나와 내 동료들 그리고 여러분과 국경 너머의 수많은 이들에게 불러일으킨 슬프고 비통한 감정을 전달하지 못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을 해석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같은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곤 유대인 문제나 정치적 이슈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오직 국제법과 전쟁관습법적 근거를 토대로 저 행정명령의 부당성을, 법학자의 건조하고 명징한 언어로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무분별한 저항은 삼갈 것을 당부하며 자신을 포함한 다른 교수들이 동료들의 강의 공백을 메울 것이라고 밝힌 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이곳에 다시 오실 분들의 이미지와 성품을 의지와 마음으로 간직한 채, 우리는 신념과 희망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라고 끝맺었다.
그의 강의는 외부 확성기를 통해 교정으로 울려 퍼졌고, 일부 학생들이 그의 강의 전문을 복사해 대학가에 배포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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