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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800년 걸쳐 만들 신소재, AI는 2년 만에 찾았다... 글로벌 공급망 변혁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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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 기술이 정치와 외교를 움직이고 평범한 일상을 바꿔 놓는다. 기술이 패권이 되고 상식이 되는 시대다. 한국일보는 최신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들의 숨은 의미를 찾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는 '테크 인사이트(Tech Insight)'를 격주 금요일 연재한다.
“리튬황 전지 자체가 차세대 배터리다 보니 관련 데이터가 거의 없었어요. 최적의 전해질을 찾고 싶어도 직접 실험을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가능한 화합물의 조합은 무한대인데 이걸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공지능(AI)을 이용하게 됐습니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서구 LG AI연구원에서 만난 한세희 MI(Materials Intelligence Lab) 랩장은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 LG에너지솔루션과 협력한 리튬황 배터리 전해질 탐색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리튬황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가 높으면서도 가볍고 저렴해 도심항공교통(UAM)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차세대 전지로 꼽힌다. 그러나 양극재인 황 화합물이 전해질에 쉽게 녹는 특성이 있어, 과도한 용해를 막고 출력은 높일 수 있는 전해질을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적절한 화합물을 찾기 위해서는 실험을 반복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이 방법으론 빠른 상용화는 불가능했다. MI랩은 대신 기계학습 기반 AI 모델을 만들어 약 4만 건의 소재 데이터를 분석해 6개의 전해질 후보를 도출했다. AI 모델 개발부터 분석에는 약 6개월, 유망 소재의 실험과 검증에는 약 4개월이 걸렸다. 수년이 걸릴 과정을 1년도 안 돼 마친 것이다. 현재 LG에너지솔루션은 이를 바탕으로 2027년 상용화를 위한 연구개발(R&D)을 진행 중이다.
올해 노벨화학상의 영예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모델 ‘알파폴드’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연구진에게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전 세계가 놀랐지만 이는 AI가 일으킨 변혁의 일부에 불과하다. 신약개발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은 물론, 각종 신소재 연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AI까지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신소재 개발은 R&D 기간을 단축하는 것을 넘어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친환경 대체 소재를 상용화하기 위한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기존의 신소재 연구 과정은 ‘수작업’이다. 화학자가 이론과 직관을 바탕으로 선행 연구를 검토해 적절한 원재료를 찾고, 이를 일일이 합성하면서 기능과 안전성을 실험하기 때문이다. 물질 하나를 합성하는 데만 수년이 걸리는 데다 실패 위험도 높다. 무엇보다도 과학자가 신소재를 찾기 위해 무한한 경우의 수를 탐색하고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AI는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짧은 시간 안에 광범위한 물질 데이터를 탐색해 신소재 유망 구조를 제시하고 합성 가능성까지 검토하기 때문이다. 소재 개발을 위한 AI 모델은 그동안 주로 학계에서 연구됐지만, 최근 들어 산업 현장에도 접목되고 있다.
LG AI연구원의 MI랩이 대표적인 사례다. MI랩은 AI를 이용해 개인 맞춤형 암백신 항원, 차세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용 발광 재료를 예측하며 계열사와 협력하고 있다. 지금은 연구원들이 손쉽게 쓸 수 있는 신소재 개발용 플랫폼인 '엑사원 디스커버리'를 개발 중이다. 플랫폼에서 원하는 물질의 특성을 지정해 100여 개의 새로운 분자 구조를 생성하고, 그 분자가 실제로 합성될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는 데는 각 1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뛰어들었다. 구글 딥마인드는 지난해 11월 딥러닝 모델 '구글놈(GNoME)'을 통해 약 2년 만에 220만 개의 신규 물질을 예측했다고 밝혔다. 이 중 약 38만 개가 실제 안정적인 합성이 가능할 것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엔 초전도체 개발과 관련 있는 그래핀 유사 소재 5만2,000여 개, 이차전지 성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리튬이온 전도체 유망 물질 528개가 포함됐다. 구글 딥마인드 측은 “구글놈의 발견은 인류가 약 800년에 걸쳐 구축해야 할 지식”이라고 강조했다. 그간 인류가 개발을 완료한 신소재는 2만여 건에 불과하다.
구글놈의 학습에는 미국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가 '소재 프로젝트'(Materials Project)를 통해 구축한 무기소재 데이터 2만8,000건이 사용됐다. 이 프로젝트는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으로 신소재를 발굴하는 연구다. 구글놈은 △기존 물질들의 원소를 바꿔 새로운 구조를 만들고 △화학식에만 기반해 새로운 물질의 안정성을 예측하는 두 가지 딥러닝 모델을 결합해 여러 후보물질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AI는 신소재 합성에 걸리는 시간도 비약적으로 줄인다.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는 로봇 자동화를 통해 24시간 가동되는 소재 합성 시스템인 '에이랩(A-Lab)'을 구축했다. 에이랩은 구글놈이 예측한 58개 물질 중 41개를 단 17일 만에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신소재 합성에 통상 6개월에서 1년이 걸리지만 이를 비약적으로 단축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지난 1월 '매터젠(MatterGen)'을 활용해 배터리에 사용되는 리튬을 대체할 신소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매터젠은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인 '달리(DALL-E)3'와 비슷한 방식으로 신소재를 찾는 생성형 AI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태평양북서부 국립연구소(PNNL)와 협력해 3,200만 개의 잠재적 소재 후보 중 18개의 유망한 후보를 선별했다. 이 과정에 단 80시간이 걸렸다. 실험으로 했다면 20년 이상이 걸릴 작업이었다. PNNL은 이 중 6가지 후보를 추려 합성한 뒤 배터리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하고 있다.
매터젠을 통해 발견한 물질을 활용하면 배터리에 사용되는 리튬 양을 기존의 70%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리튬 공급망 불안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리튬은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에 필요한 배터리의 핵심 소재로 수요가 커지면서 ‘귀하신 몸’이 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르면 2025년부터 전 세계가 리튬 부족에 직면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측은 “리튬은 희소하고 비싼 데다 채굴 과정에서 독성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등 환경 파괴가 심각하다”며 “리튬이온 배터리는 화재 위험도 있는 만큼 대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AI 소재 개발의 이점은 단순한 비용 절감을 뛰어넘는다. 한세희 MI랩장은 “최근 유럽의 과불화화합물(PFAS) 사용 제한처럼 각종 기후·환경 규제가 시시각각 도입되는 상황"이라며 "적절한 시기에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것을 넘어, 빠른 대체 소재 개발로 각종 규제와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점점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AI가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더 싸고 친환경적인 소재를 실제로 구현해낸다면 기존 글로벌 공급망 질서를 크게 흔들 것으로 예상된다. 관건은 데이터다. 기본적인 물성 데이터를 넘어선 각종 실험 데이터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각 기관·기업별로 보유한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데이터 확보에 비용이 들고, 연구논문의 경우 실제 실험을 통해 양질의 데이터인지 검증도 필요하다.
유기화학 반응을 예측하는 AI를 개발한 정유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AI를 이용하면 과학자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그간 생각지도 못한 유망 물질을 탐색할 수 있어 소재 개발의 병목현상을 비약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다”며 “각 산업 분야에 양질의 데이터가 잘 갖춰져 있느냐에 따라 상용화 속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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