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페이소스를 곁들인 블랙유머, 박지영 소설의 인물들

입력
2024.11.06 15:14
수정
2024.11.06 15:29
19면

<후보작3·가나다순>
박지영 단편소설집 ‘이달의 이웃비’

편집자주

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7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11월 하순 발표합니다.

박지영 소설가. 민음사 제공

박지영 소설가. 민음사 제공

12년 전의 소설이 네 편, 12년 후 소설이 네 편 들어있는 소설집. 14년 만에 출간된 박지영의 첫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 얘기다.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작품은 아무래도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치매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은 속물적이고 기괴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자기 생계유지를 위한 돈줄, 즉 ‘반려밥솥’으로 본다. 돌봄노동을 네 단계로 구분하여 형제들에게 간병비를 받아낸다든지, 한때 코미디언을 꿈꿨던 인물로 아버지를 각색해 유튜브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구독자 수에 일희일비한다든지, 마른 아버지보다는 살찐 아버지로 만들어야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것 같아 당뇨환자인 아버지에게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하게 한 뒤 응급실에 실려 가게 만든다든지 하는 사건들은 배덕과 블랙유머의 끝판을 보는 것 같다.

박지영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

박지영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

표제작 ‘이달의 이웃비’는 어떤가. 경계성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가졌던 형을 먼저 떠나 보낸 뒤 형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면서도 형과 닮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스스로가 비참해져 직장생활을 그만둔 동생 ‘동석’. 인류애를 회복시키는 다정한 소설일까. 그런 것 같은데 아니기도 하다. 이후 우연히 말도 안 되는 품목을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올렸다가 만나게 된 ‘배순경’. 알고 보니 배순경은 “좀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로, 이웃에게 쓸모없어진 물건을 사주는 방식으로 ‘이웃비’를 지불해왔다. 이제 동석은 배순경을 형과 동일시하며 오랜 마음의 빚을 갚아나가고…

아니다. 동석은 형에게 지불하지 못한 이웃비를 배순경에게 지불한다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실종자를 찾아다니며 이 사회의 ‘선한 이웃’이 되어보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배순경을 무해한 이웃으로 선 밖에 두며 ‘돌보는 자의 지위’를 재획득한 자신은 선 안에 있는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마침내 배순경의 감춰진 어둠을 확인하며 충격을 받지만 동시에 무조건 무해한 이웃이 아니라 욕망과 입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배순경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웃비’나 ‘반려밥솥’처럼 인간을 돈과 거래관계로 환산하는 서늘한 상상력, 잉여나 약자를 재현하는 색다른 방식, 돌봄노동의 수행자로서 겪어야 하는 평균 도덕률의 붕괴, 마치 연극무대의 인물들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선함’을 가장하여 ‘연기’하는 인물들. 이들이 만들어내는 희비극과 복잡다단한 내면을 다각도로 파헤치는 서술자의 냉정하면서도 도전적인 논평들.

박지영은 무해하고 선함을 증명할 때에만 반쪽짜리 성원권을 내어주는 가혹한 현실에 대놓고 반발하지 않는다. 비록 가짜 연기일지라도 오히려 강요된 순종과 친절, 공손함을 과할 정도로 애를 써서 도달하려는 인물을 통해 비틀어 보여줌으로써 페이소스를 곁들인 블랙유머의 방식으로 위선적인 사회를 풍자한다. 한동안 섬세한 일인칭 화자의 시선으로 미묘한 감정을 포착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성을 탐구해 왔던 한국소설의 한 경향에 비추어보자면 박지영의 소설은 분명 다르고 또한 새롭다.



박상수 시인·문학평론가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