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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살아간다면 이렇게"...쓰고 싸우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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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7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11월 하순 발표합니다.
2015년에 출간되어 뒤늦게 차트를 역주행한 ‘구의 증명’은 최진영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잘 보여준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폭력적인 세상, 빚만 물려주는 가난하고 철없는 부모, 이른 생존 투쟁에 노출돼 막장까지 내몰리다가 분노와 자기혐오에 고통받는 청소년 주인공, 절망적인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인 사랑, 사랑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남은 자가 수행하는 지독할 정도의 애도. 최진영의 소설은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살아간다면 대체 무엇으로’라는 마음을 격렬하게 오가게 만든다.
이런 최진영의 소설이 최근 조금 달라졌다. 인류, 미래, 전쟁, 인공지능(AI), 기후위기, 여성 서사. 테마는 더 동시대적이고 다양해졌다. 단편집 '쓰게 될 것'의 수록작 중 기후위기를 배경으로 한 단편 ‘썸머의 마술과학’을 보자. 주인공은 ‘이봄’과 ‘이여름’이란 이름의 자매.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늘 그렇듯이 아빠다. 아빠가 가상화폐에 잘못 투자해 3억 원의 빚을 지는 바람에 집안 분위기는 최악. 그런데 자매에게는 아빠도 문제지만 2100년이면 알프스의 빙하가 다 녹아버리는 기후위기도 문제다.
두 개의 사건은 하나로 겹치며 이 아이들에게는 현재의 재난 상황으로 다가온다. 언니 이봄은 아빠의 허황한 꿈을 지적하며 변화를 촉구한다. 마술사를 꿈꾸는 열 살 동생 ‘썸머’를 보며, 이봄은 “엄마 아빠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겐 당연해질 것들을 사람들이 계속 만들어낼 거라고 믿고 싶다”라고 말하며 동생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어른들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는 방식으로 희망을 꿈꾼다.
표제작인 ‘쓰게 될 것’은 ‘구의 증명’을 잇는 수작 중 하나로, 할머니와 엄마 ‘김은홍’, 그리고 일곱 살 딸 ‘유나’가 전쟁의 폭력과 처참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죽이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 폭격, 맨발, 피투성이. 할머니는 죽고, 엄마는 아수라장이 된 도시를 떠돌며 구호 물품을 가져온다. 유나는 홀로 집에 남아 폭격을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왔다가 낯선 어른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다.
결국 재회한 엄마마저 떠나보내고, 유나는 전쟁 이후 악몽과 트라우마 속에서 어른이 된다. 유나의 시점으로 그려진 이야기는 인물들의 극진한 마음과 서로에게 기대는 사랑이 빚어내는 향기로 그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슬픔과 아름다움을 담아낸다. 어른이 된 유나가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신이었다”고 말할 때, 이 비장함과 가슴 아픈 감정은 사람이 만든 고통 속에서도 사람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간절한 꿈이 담겨 있다.
최진영의 소설에 ‘다음 세대’와 ‘미래’가 깊숙이 들어왔다. 이제는 ‘그럼에도 살아간다면 대체 무엇으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간다면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라는 쪽으로 이야기의 방향성이 달라졌다. 분노와 절망은 나의 세대에서 끊어내고, 기억하면서 쓰고, 쓰고 싸우면서 더 나아가기. ‘삶’과 ‘소설 쓰기’와 그것을 읽는 ‘우리’의 겹침. 이 책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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