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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당론과 이승만의 고집을 꺾은 휴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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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는 선거 20여 일 뒤인 1952년 11월 29일, 뉴욕 맨해튼 컬럼비아대 당선자 집무실을 떠나 비밀리에, 미 육사 동기인 육군 참모총장 오마르 브래들리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이오지마를 거쳐 12월 2일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사흘간 한국에 머물며 미군 병사들과 식사하고, 확전과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고집을 피우던 무력한 대통령 이승만을 만났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방한기간 방한 파카와 모피 안감을 덧댄 모자를 썼지만, 유럽의 어느 전장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폐허가 된 도시의 극심한 추위를 경험해야 했다.
그는 이승만과 당내 우파 ‘올드가드’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혔다. 중국과 소련을 배후에 두고 일방적 승리를 보장할 수 없는 그 제한전쟁에 미국은 700억 달러를 썼고 3만3,68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자기 정당의 당론까지 거스른 조기 휴전 결정이야말로 아이젠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어쨌건 일설에 의하면 그는 중국에 핵 위협까지 해가며 포로 송환 등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53년 1월 20일 취임한 지 불과 7개월 만이었다.
재선에 성공한 아이젠하워는 60년 6월 19일 다시 한국을 방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란 기록도 세웠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 과도내각이 수립된 직후였다. 아시아 순방 중 일본 방문 후 귀국길에 한국에 잠깐 들를 계획이었으나 미-일 신안보조약에 반발한 일본 좌익계 시위와 유혈 충돌 여파로 일본 정부가 방일 연기를 요청하면서 일정을 앞당긴 방문이었다. 그는 한국에 28시간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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