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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엽 고려대 교수 "한강 이후 한국문학이 더 성장하려면...비평 담론·번역 활성화가 중요하다" [기고]

입력
2024.10.20 15:36
수정
2024.10.20 16:19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가운데)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포니정재단은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 오른쪽부터 정몽규 포니정재단 이사장(HDC 회장), 한강 작가, 주선회 포니정 재단이사.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가운데)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포니정재단은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 오른쪽부터 정몽규 포니정재단 이사장(HDC 회장), 한강 작가, 주선회 포니정 재단이사. 사진공동취재단

한강 작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수신자에서 발신자로 전환됐음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한국문학은 개화기 이후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문학의 수용자에 처해 있다가 2010년대 이후 그 위상을 역전시켜 전파자로 이동해 왔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강 작가의 창조적 능력, 그것을 가능케 한 한국문학의 저력, 번역의 힘 등 세 박자가 결합돼 이뤄낸 대한민국의 쾌거다.

한강 작가의 창조적 능력은 작품의 주제 의식, 형식 실험, 미학적 문체 등의 영역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주제 의식의 측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여성의 권리, 자연과 생명의 존엄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 등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그 상처와 고통을 기억하고 치유하고자 한다.

전통적 가부장제에 맞서는 여성이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모습을 통해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를 결부시키는 '채식주의자'에서 광주 및 제주의 비극이 잉태한 트라우마를 고통의 언어로 서술함으로써 위로하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무겁고 진중한 사회적·역사적 주제 의식을 담고 있다. 한강 작가의 고유성은 이 주제 의식을 정치적·윤리적 담론이나 서사의 차원으로 서술하지 않고 내면의 심연으로 침잠시켜 폭력과 야만이라는 인간성과 대면하면서 영혼과 육체,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 생명과 우주 등의 존재론적 질문으로 전환시킨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강 작가의 작품 표지들. (왼쪽부터) 소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창비·문학과지성사 제공

한강 작가의 작품 표지들. (왼쪽부터) 소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창비·문학과지성사 제공

형식 실험의 측면에서 한강 작가의 소설은 전통적 리얼리즘의 재현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미학적 방법론을 시도한다. '채식주의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상적 리얼리즘 및 신화적·원초적 영역과 접속하는 그로테스크 미학을 보여주고, '소년이 온다'는 복수적 화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시점을 보여주며,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을 관찰자로 설정하고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이 극을 풀어나가는 구성을 보여준다.

미학적 문체의 측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특유의 잔잔하고 부드럽지만 밀도 높고 강렬한 시적인 문체를 구사해 독자를 흡입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한강 작가는 시인으로 먼저 등단하고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간행한 이력이 있는 만큼 섬세하고 서정적인 문장을 구사한다. 이처럼 주제, 형식, 문체 등의 대비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결합돼 한강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성과를 얻어냈다.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밝힌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에 한강 작가의 이러한 문학적 성과가 압축돼 있다.

한강 작가의 창조적 능력을 가능케 한 한국문학의 저력은 고전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서구문학을 수용하면서 창조적 변용을 거쳐 독자적 경지를 개척한 한국문학사의 축적된 역량을 의미한다. 한강 작가는 한국문학의 작품들로부터 영감과 자양분을 흡수하면서 성장해 왔고 그것을 발전시켜 자기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오른쪽)과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가 2016년 5월 맨부커상을 수상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오른쪽)과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가 2016년 5월 맨부커상을 수상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번역의 힘은 번역가 개인의 우수한 능력에서도 도움을 받았지만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 및 민간기관인 대산문화재단 등에서 지속적으로 번역 지원 사업을 진행해 온 노력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장기적인 지원의 결실로 2016년 한강 작가가 영국 맨부커 국제상, 2019년 김혜순 시인이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2023년 한강 작가가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으며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정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의 영화·드라마·팝·웹툰 등의 대중문화가 K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K콘텐츠에 원천 소스를 제공해 온 한국문학은 K콘텐츠와 시너지 효과를 만들면서 함께 더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의 경사이고 대한민국의 자부심이다. 이 축제가 일회성에 그치거나 스치는 바람이 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민간적, 개인적 차원에서 관심과 투자를 확대하면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한국문학이 K콘텐츠와 함께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첫째, 뿌리내리기 차원에서 ‘비평 담론의 활성화’가 중요하고 둘째, 확산하기 차원에서 ‘번역의 활성화’가 중요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번역의 활성화’에 대해서는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으므로 필자는 ‘비평 담론의 활성화’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비평 담론의 활성화’는 크게 ‘국내 비평 활성화’와 ‘비평의 해외 전파’라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국내의 문학 생태계가 살아나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국내 문학비평의 활성화’가 중요하므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요청된다.

다음으로 한국문학의 작품 번역과 비평 번역을 연계해서 ‘비평의 해외 전파’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작품 창작→비평 담론 생산→작품 번역 및 비평 번역→해외 전파’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본인 제공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본인 제공




오형엽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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