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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의 올바른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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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불교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화엄경'에 나오는 구절로, 이 세상은 마음이라는 화가가 그리는 그림 같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곤 한다.
진짜 그럴까?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오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식으로 돈 버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다. 주가 상승의 핵심은 기업의 실적과 세상의 흐름이지 ‘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의 응원 열기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면 이 응원으로 우리는 우승했는가? 응원과 염원의 양이 경기의 승부를 가른다면, 인구가 많은 인도나 중국이 맥을 못 추는 건 무슨 이유일까?!
마음이나 생각은 나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지, 외부 대상을 바꾸는 게 아니다. 해서 100만 명이 응원해도 공격수가 찬 공이 휘어 골대로 들어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체유심조란 말은 왜 있는 걸까? 이건 인간의 행복이 물질과 정신의 공유가치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환경은 삶에 편안함을 주고, 이의 상당수는 행복과 연결된다. 그러나 외부적인 것이 곧 행복의 전부일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마음이라는 내적인 관점의 문제를 요청받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일체유심조가 작동하는 부분이다.
삶이 성공을 질주한다면 만족도는 높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젊어서도 마음의 조절을 배울 필요가 있다. 또 나이 들면 외부적인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은퇴한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영향도, 인간관계도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도 마음의 조절이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까지도 보릿고개가 있었다. 헐벗고 굶주렸던 시절에 비한다면, 오늘날은 풍요의 시대다. 그러나 우리는 더 행복하고 너그러워졌는가?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해법이 바로 마음의 조절이다.
물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맹자는 '등문공-상'(藤文公-上)에서, “항상한 소출이 있어야 항상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고, 항상된 소득이 없다면 항상된 마음도 유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물질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행복이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물질 행복과 정신 행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둘은 서로 다른 트레이닝을 통해 단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 일이 아니면 내버려둬도 무방하다. 그러나 행복의 문제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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