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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선예(禪藝)가 만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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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이정재의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대사로 유명한 2013년 영화 '관상'.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관상은 실은 골상(骨相), 즉 ‘뼈의 기운’을 보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표면적인 형상은 살에 의해 변형되며, 본질은 뼈를 통해서 흐른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서양 예술이 형상의 모사를 추구했다면, 동양 예술은 그 이면에 흐르는 정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유럽에서 흔히 목도되는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은 마치 대리석을 살려낸 듯 생생하다. 이들이 추구한 형상 모사의 진수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술에서 형상 모사는 기본이자 핵심이다. 중국 남조의 사혁(5∼6C)은 그림의 6가지 원칙(畵六法)을 강조했다. 거기에는 생동감 있는 형상 모사와 구도가 중요하다고 역설돼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예술은 불교의 확대와 함께 형상을 넘어서는 정신의 묘사로 치닫는다. 형상은 변화하는 허상일 뿐, 그 이면의 품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 왕유에서 시작된다. 왕유는 시선(詩仙) 이태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시불(詩佛)로 불린 시·서·화에 능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그림에는 직업 화가에 견줄 수 없었지만, 전문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은자와 공부인의 기상이 담긴 남종문인화의 시작이다.
동아시아인들은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닌 문인화에는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 즉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내포돼 있다고 말하곤 한다. 추사의 '세한도'나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 등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림을 통해 정신 경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이 세계를 넘어선 불교의 깨달음도 추구하는 미학이다. 불교적인 문인화의 대표로는 달마도가 존재한다.
남종문인화에서의 ‘남종’이란, 명나라 동기창이 '화안'에서 선불교에 남종과 북종이 있듯 회화에도 남종과 북종이 있다고 한 것에 연유한다. 불교의 영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성파 선예(禪藝) 특별전 COSMOS'가 열렸다. 다선일미(茶禪一味)처럼, 차와 선을 결합한 것을 넘어선 선과 예술의 조화이다. 명상의 시대에 던져진 보고 느끼는 공감각적인 선의 향연이 이 시대 최고의 고승에 의해 펼쳐진 것이다.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서화동원(書畵同源) 즉 그림과 글씨의 동일성을 얘기했고, 공자는 '논어'에서 유어예(游於藝) 즉 예술에서 노닌다고 했다. 이를 넘어 선승 성파는 예술을 통한 명상, 즉 깨달음의 현재화를 직접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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