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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주 말고 아사히 슈퍼드라이로"… 맥주로 '작은 사치' 부리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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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레'나마'데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일본 맥주업체 아사히맥주가 일본에서 진행 중인 이벤트의 문구다. 브랜드 홍보 강화를 위해 전국 각 지역을 돌며 팝업 매장을 열고 생맥주와 음식을 파는 행사에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인 일본어 '오쓰카레사마데스'의 '사마'를 생맥주(나마비루)를 뜻하는 '나마'로 바꾼 것이다. 맛있는 생맥주를 직접 전달하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일본인의 일상생활 인사말을 이용해 홍보할 만큼, 맥주는 일본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성인의 일상 음료'다. 회식이나 식사 때 곁들여 마시는 것은 물론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길거리를 다니면서 갈증을 느끼는 목을 적시기 위해 들이켜는 게 바로 맥주다. 심지어는 퇴근길에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타면서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있는 회사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일본인에게 맥주는 시도 때도 없이 접하는 '길거리 음료'이다 보니, 회식 때가 아닌 일상에서는 대체로 저렴한 발포주를 가볍게 마시기도 한다. 맥줏값보다 최대 100엔(약 920원) 정도 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 사회의 맥주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이왕이면 한 잔을 마시더라도 발포주 대신 부드러운 거품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비싼 맥주를 마시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1989년 이후 35년 만에 다시 문을 연 '에비스브루어리도쿄'의 인기가 이를 증명한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11일, 일본 수도 도쿄 에비스에 위치한 양조장 에비스브루어리도쿄를 찾았다. 에비스맥주는 일본 맥주업체 삿포로맥주의 130년가량 된 고급 맥주 브랜드다. 1988년까지는 이곳에 에비스맥주 양조장이 있었으나, 삿포로맥주가 맥주 제조 공장을 이전하면서 이듬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올해 4월 3일 에비스맥주 박물관과 맥주 시음이 가능한 탭룸을 꾸몄다. 35년 만의 양조장 재개장이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3시였으나, 탭룸은 에비스 생맥주를 마시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번호표를 뽑고 빈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테이블과 의자를 차지하려는 눈치 싸움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에비스브루어리도쿄 직원은 "저녁 전이나 주말 점심과 비교하면 그나마 한산한 편"이라며 "개장 이후 주말에는 탭룸이 늘 만석"이라고 설명했다.
에비스 생맥주 한 잔이 1,200엔(약 1만1,000원), 작은 양의 맥주 4종이 나오는 샘플러가 1,800엔(약 1만6,600원)이나 되니 웬만한 한 끼 밥값보다 비싸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맥주 한 잔에 힐링을 느끼는 시간이기에 아깝지 않은 돈이다. 이날 만난 도쿄 거주 50대 남성은 "아내와 함께 주말에 맛있는 맥주로 소소한 행복을 느끼려고 왔다"며 "가격이 비싼 대신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실제 이곳은 요즘 일본인이 즐겨 찾는 나들이 코스 중 하나다. '비싸도 맛있는 맥주'를 원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얘기다. 삿포로맥주는 올해 방문객 수 목표를 가뿐히 넘을 것으로 기대한다. 애초 연말까지 약 20만 명이 찾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개장 3개월여 만인 지난 6월 말에 이미 10만5,000명 이상이 방문했다. 벌써 한 해 목표의 절반 이상을 달성할 만큼, 도쿄의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삿포로맥주는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17억 엔(약 157억 원)을 들여 재개장했는데, 이런 전략이 적중한 셈이다.
다른 주요 맥주 업체들도 '브랜드 고급화'에 힘쓰고 있다. 지난 4월 아사히맥주는 도쿄의 명품 거리 긴자에 대표 제품인 '아사히 슈퍼드라이 체험관'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매장 안에 설치된 4D 어트랙션을 타면 움직임과 바람, 음향 효과로 마치 맥주캔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맥주 거품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트 시설을 체험하는 공간도 있다. 기린맥주는 5월 '젊은이의 도시' 도쿄 시부야에 맥주를 마시면서 음악과 미술을 즐길 수 있는 크래프트 맥주점 '스프링밸리브루어리도쿄'를 개장했다.
일본 4대 맥주 업체(아사히·삿포로·기린·산토리)가 너도나도 고급화 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최근 일본인의 '술 소비 문화'가 비싼 맥주를 마시려는 형태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처럼 해당 업체들로선 지금이 바로 고가 맥주의 판매량을 올릴 적기다.
맥주 소비가 16년 만에 대폭 증가한 게 이를 방증한다. 일본 4대 맥주 업체의 올 상반기 맥주 계열 음료 판매량 중 '맥주'는 54%를 차지했다. 맥주 판매 비중이 50%를 넘은 것은 2008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해 상반기보다 7% 증가한 것은 물론, 1992년 관련 통계 조사를 시작한 뒤 최초로 '3년 연속 전년 동기 대비 증가세'를 보였다. 발포주나 저가 맥주 대신, 맥아가 많이 든 맥주를 찾는 일본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맥아 비율과 공법에 따라 맥주 계열 음료를 △맥주 △발포주 △제3의 맥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모두 갈색의 발포성 알코올음료인 점은 동일하나, 주세법 기준에 따라 '맥아 사용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하고 '다른 원료 중량이 맥아 사용량의 5% 이하'여야만 맥주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맥아 사용 비율이 50% 미만이면 '발포주'로, 맥아 함량이 매우 낮고 알코올 성분 증류주를 첨가하거나 맥아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은 '제3의 맥주'로 불린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고를 땐 '맥주'나 '생맥주'로 표기된 경우가 맥주이며, '리큐르'(향과 설탕을 첨가해 만든 알코올음료), '발포성'으로 표기된 음료는 제3의 맥주다.
2020년까지만 해도 일본인은 맥주보다는 발포주나 제3의 맥주를 즐겨 마셨다. 둘은 편의점에서 한 캔당 평균 약 180엔(약 1,600원)이면 살 수 있지만, 맥주는 230엔(약 2,100원)을 내야 한다. 비싼 맥주는 300엔(약 2,800원)에 가깝다. 가격 차이가 나다 보니 맥주 계열 음료 중 '맥주'의 점유율은 2009년 상반기에 50% 밑으로 내려간 뒤 매년 떨어졌다. 코로나19 때문에 술을 집에 쟁여 두고 마신 사람이 많았던 2020년 상반기에 맥주 점유율은 38%까지 급락했다.
그러나 2022년부터 다시 맥주 점유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올 상반기 맥주 판매량은 전년보다 7%나 늘어났다. 일본 4대 맥주업체 주력 상품 판매량도 크게 증가했다. 아사히의 '아사히 슈퍼드라이'는 지난해 상반기보다 4% 늘었고, 기린 '이치방시보리'와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도 각각 3%, 1%씩 증가했다. 삿포로맥주의 '구로(검은) 라벨'은 무려 14%나 더 많이 팔렸다.
여기에는 무더위가 오래 지속되며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 데다, 일본 정부가 최근 맥주 주세를 내린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선별적 소비' 경향의 강세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최근 '슈퍼 엔저'(엔화 약세) 영향으로 물가가 크게 오르면서 실질임금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지난 6월 오랜만에 실질임금이 전년 동기 대비 상승하긴 했으나, 2022년 4월부터 올해 5월까지 26개월간 실질임금은 계속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술 소비 자체를 줄여야 하는데, 그 대신 비싼 맥주를 마시려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예전에는 싼 맥주를 많이 택하는 분위기였다면, 이제는 조금만 마시되 비싼 맥주를 마시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쿠가 나오코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실질임금이 줄면서 선별적 소비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나를 위한 소비가 비싸고 좋은 물건 구입보다는 '작은 데에서 가치를 찾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술을 마실 때에도 나를 위한 '작은 사치'를 부리겠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쿠가 연구원은 "가끔 음주를 하는 사람일수록 부가가치가 높은 비싼 맥주를 즐기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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