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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식하지 않는 '비생식 동거 집단'이 지구의 희망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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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관찰한다. 같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 온갖 곤충과 벌레, 식물, 미생물까지 집요하게 관찰하고 연구하며 분류해 이름을 붙인다. 신처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이런 행위는 과연 인간만의 특권일까. 소설가 김멜라의 장편소설 ‘환희의 책’은 첫 문장에서부터 이를 깨부순다. “우리는 인간을 ‘두발이엄지’로 분류한다”고 말하는 존재들은 발칙하게도 인간의 기준에서 하등 동물인 벌레들이다. 심지어 “손윗생명인 우리가 손아랫생명인 인간을 향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서글픈 동정심이 배어 있다”고 진술하기까지 한다. 벌레가 인류 탄생보다 훨씬 이전부터 살아왔음을 감안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외면받는 여성의 자위 도구(‘저녁놀’)와 지하철을 떠도는 디지털 잡귀(‘지하철은 왜 샛별인가’), 그리고 ‘환희의 책’의 벌레들까지. 너무나 작고 하찮아서 ‘우리’의 경계로 넣기는커녕 인지조차 못하는 존재들은 김 작가의 소설에서 관찰자의 중책을 맡는다. 소설가 구병모가 김 작가의 첫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을 추천하면서 남겼던 그의 “세상의 어둠 속에서 미량의 빛을 포집하기 위해 확장되는 예민한 동공”이 본 것들이다.
소설에서 톡토기와 모기, 거미는 ‘비생식 연구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단체에서 ‘비생식 동거 집단’의 표본인 레즈비언 연인을 연구하고 해석한다. “경쟁과 우열의 수레바퀴에서 뛰어내려 비생식의 길을 간다”고 선언하며 시작된 비생식 연구 네트워크이기에 번식하지 않는 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단체가 각각 ‘버들’과 ‘호랑’이라고 이름 붙인 두 여성의 관찰자는 “그들의 집에 살던 개미와 파리, 그들의 기저귀에 묻은 똥즙을 빨아 마시던 나방, 그들이 사들인 옷과 가방에 깃들어 살던 좀, 그들의 화분에 은거한 응애, 욕실 창으로 침입한 쥐며느리와 지네, 그들의 곡식과 가구에 서식하는 바구미와 진드기, 그들과 함께 사는 네발 동물의 털 속 벼룩(위장 속 회충과 그 밖의 무수한 미소동물들)”이다.
이들의 “수억 쌍의 홑눈과 겹눈”은 연구 대상인 두 여자의 사계절을 차곡차곡 모은다. 사랑하고, 울고, 웃고, 슬퍼하고, 보살피고, 버거워하면서도 살아가는 두 사람이지만, 어느 날 버들에게 ‘번개의 경고’가 찾아온다. 누군가의 죽음에서부터 벼락과 우박 같은 자연재해, 대규모 화재, 폭발의 장면이 그에게 보이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자는 호랑의 말을 거절하면서 버들은 묻는다. “우리만 떠날 수 있어? 다른 데로 가서, 우리가 살고, 그다음은?”
호랑은 결국 버들의 뜻을 받아들인다. 버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호랑은 그런 버들을 사랑하므로. 관찰자들은 “모든 의지에서 물러나 재앙의 순간을 기다리는” 두 여자의 모습을 기록하면서도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망쳐서 숨고, 싸워서 승리해 생존자 중 하나가 되는 게 인간다운 선택일 텐데.”
마침내 세계를 망가뜨리는 재앙의 순간이 찾아오지만, 두발이엄지들에게 닥친 불행은 행성에는 오히려 이롭다. 소설에서 재앙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 위기를 암시한다. 이와 맞물려 비생식 연구 네트워크의 진정한 목적도 드러난다. 곤충의 번식이 수억 년 진화의 결과물이자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막으려 비생식의 길을 가겠다는 것. 그러나 버들과 호랑을 지켜본 관찰자들은 비생식을 거부하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낳은 인간이 또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대도, 나는 또 다른 버들과 호랑을 만들고 싶어. 설령 그게 악이라 해도 그 악은 끝없는 희망을 품고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니까.” 비생식 집단이 품은, 생식의 가능성이다.
이쯤에서 ‘환희의 책’이라는 제목을 곱씹어본다. “만약 이 세상이 한 권의 책이고 미지의 누군가가 그 책을 썼다면, 그 창작의 시작이 ‘환희’라는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김 작가의 말이다. 환희는 ‘큰 기쁨’이다. 작은 기쁨은 혼자서도 가능할지 몰라도 큰 기쁨은 “우리를 지켜보는 무수한 눈과 섬세한 몸들이 함께”일 때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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