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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과 부활을 반복해온 증오의 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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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전후의 생활고 속에 남부 지역에선 강도·절도 등 재산범죄가 빈발했고, 노예 출신 흑인들의 소행이라 믿는 백인들이 많았다. 자경단을 자청한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협박과 린치가 이어졌고, 그들 중 일부가 스스로를 KKK라 지칭했다. KKK란 이름이 오용되는 걸 창립자들조차 떨떠름해했다. 1868년 6월 창립자 중 한 명이 ‘풀라스키 시티즌’이란 지역신문에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KKK의 단순한 목적이 시위를 통해 정치적이고 악의적으로 변질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KKK가 게릴라나 테러 조직의 속성을 가진 집단이 되었다면 빨리 해체될수록 국가 전체, 특히 남부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루이지애나 출신 남부군 대령 출신인 한 인사가 1867년 결성한 '백동백기사단'이란 것도 있었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출신들로 구성된 백동백기사단은, 흑인 투표 저지 등을 위해 구타나 살인 등 위협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지만, 회원 명단이 공개된 조직이어서 KKK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이었다. 그 조직은 1869년 해체됐다.
증오는 선동에 취약하고, 거칠수록 유혹적인 법이다. 재건시대 흑인 선거권 등 시민권 향상에 불만을 품은 남부 백인들은, 당시 민주당 정치권력과 직간접적으로 결탁해 KKK란 이름으로 남부 전역으로 확산됐다. 조직원도 백인 하층 농부와 노동자 등으로 확산됐다. 지역-지부 개념조차 없었고 폭력의 양상도 지역마다 달랐지만, 백인우월주의를 정체성의 중심에 둔 그들에게 '북부 침략자(공화당)= 흑인 후원자'여서 공화당원 테러도 주저하지 않았다. 흑인 유권자가 처음 투표한 1868년 대선에서 율리시스 그랜트가 당선된 뒤 KKK 기세가 한풀 꺾였고, 1860년 연방대배심이 KKK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했다. 이듬해 ‘KKK 단속법(1882년 위헌 판결)’이 제정됐다.
KKK는 긴 잠복기를 거쳐 1920~30년대 전후와 대공황기, 60~70년대 민권운동시대에 마치 백래시처럼 부활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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