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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된' 게 아닐지 모른다

입력
2024.07.31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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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교수대의 대니얼 디포

대니얼 디포의 초상화. 영국 런던 국립 해양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대니얼 디포의 초상화. 영국 런던 국립 해양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로빈슨 크루소'(1719)의 작가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는 필그림스, 즉 영국 비순응파(non-conformist) 개신교도였다. 가톨릭 권력과 영국 국교회파 모두와 불화했던 그는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개신교파 국왕 윌리엄 3세를 정치 팸플릿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지했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죽고 국교회파인 앤 여왕이 집권하면서 비순응파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디포는 그해 ‘반대자들을 다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The Shortest Way with the Dissenters)’이란 제목의 정치 팸플릿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국교회 사제들의 설교를 폭넓게 인용한 그 글의 표면적 내용은 교황파와 비순응파 모두 국외로 추방하거나 교수대에 세우라는 거였지만, 진짜 메시지는 앞에선 화합을 말하고 뒤로 탄압을 일삼는 집권 국교회파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풍자였다.
잉글랜드 하원은 이듬해 2월 문제의 팸플릿의 수거-소각을 결의했고 필자를 추적해 그해 5월 디포를 체포했다. 그는 선동적 명예훼손죄로 기소돼 벌금형과 함께 세 차례 각 1시간씩 교수대에 세워지는 형을 선고받았다. 그 형벌은 사기꾼 등 경범죄자를 교수대에 세우는 일종의 수치형으로, 군중들은 상한 달걀이나 오물, 돌을 던져 죄수를 다치게 하곤 했다.

7월 31일 디포가 런던 플리트 스트리트의 교수대에 오르자, 알려진 바 군중은 그에게 돌이 아닌 꽃을 던졌다고 한다. 왕실 장관이던 로버트 할리가 벌금을 대납해준 덕에 그해 11월 석방됐지만, 당시 영세 벽돌공장을 운영하며 8남매를 키우던 디포는 거의 파산 상태였다. 이후 그는 할리를 도와 친정부 선전물 등을 집필하며 생계를 도모했고, 국교회 사제였던 동시대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1709년 한 팸플릿에서 그런 디포를 조롱하며 “형틀에 묶인 적이 있는 그자는 돈을 밝히며 설교투의 독단을 부리는 불량배”라고 썼다. 어쩌면 디포에게 무인도의 '크루소'는 난파된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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