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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마저 빛나는 천년고찰… 마을에서 가장 낮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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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벽면 가득 댓잎 바람이 불었다. 햇살에 겨워 일렁거리는 잎사귀에 생기가 돋고, 명암을 잃은 어둠 속에서도 사각거리며 존재를 증명한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는 지역 출신 김병종 작가의 대표작이 회화로, 그리고 영상으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국보순회전: 모두의 곁으로’라는 제목으로 조선백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역 소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짜임새 있는 미술관이자 전시다. 경사진 언덕에 납작 엎드린 듯 지은 건물 자체도 하나의 작품이다. 한국관광공사 전북지사에서 강소형 잠재관광지로 선정한 이유다.
2층 전시장 하나는 넓은 통창으로 대자연을 작품으로 담고 있다. 멀리 지리산 능선이 물위에 고스란히 비치도록 설계했다. 정령치 넘어 운봉읍, 인월면, 산내면은 남원의 대표적 산악지역이지만, 지리산은 대숲에 일렁이는 바람처럼 품이 넉넉하고 푸근하다. 산내면은 지리산둘레길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난 구간으로 꼽힌다. 인월~금계 구간 중 상황마을에서 등구재로 연결되는 길에서는 다랑논 아래로 산중 평지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람천이 휘감아 도는 들판 한가운데에 실상사가 있다. 보통 이름난 사찰은 계곡 깊숙한 곳, 산중턱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기 마련인데 실상사는 그 반대다. 주변 산자락에 들어선 마을이 절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다. 산내면에서 사실상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절이다.
실상사는 828년 신라 흥덕왕 때 개창한 국내 최초의 선종 가람이라 자랑한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혜능의 남종선을 배우고 돌아온 홍척국사가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귀의를 받아 창건한 사찰이다. 지실사(知實寺)라는 명칭으로 개창한 사찰은 수철화상이 제2대 조사에 오르며 왕실의 후원으로 크게 확장됐고, 고려시대에 조계종 실상산파로 종명을 개칭하며 최대 융성기를 누렸다.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 들어 사세가 쪼그라들었고 15세기 중반에 이르러 완전히 폐사되고 말았다. 절이 보유한 땅은 이후 200년간 민간에서 경작지로 사용했다.
철불과 석탑만 논바닥에 방치돼 오다가 숙종 16년(1690) 대적광전을 비롯해 36동의 건물을 중창하며 실상사는 다시 대가람의 면모를 갖췄다. 하지만 1883년과 1884년 잇단 화재로 약사전, 명부전, 극락전 3채의 불전과 승당 1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됐다. 현재 절의 중심을 잡고 있는 보광전은 1884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김제 금산사, 합천 해인사 등 큰 절의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던 실상사는 1995년부터 주변 경작지를 매입해 5만6,198㎡(약 1만7,000평) 옛 절터를 회복했다. 근래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 들어섰지만, 절의 중심은 여전히 작은 전각들이 차지하고 있어 천년 고찰이라 하기에 짜임새가 다소 허술한 것도 사실이다.
대신 실상사는 '생명평화'라는 내실로 빈자리를 꽉꽉 채웠다.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문턱은 더욱 낮아 주민과 사부대중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남원 사람들은 산내면을 발음하기 쉽게 ‘살래’라고 부른다. 실상사에서는 매월 한 차례 ‘살래장’이 열린다. 마을 공동체의 놀이터이자 문화장터다. 주민들은 직접 만든 물품이나 음식을 판매하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나누기도 한다. 마을 동아리의 노래와 춤 공연도 곁들여진다. 유명인이나 외부에 기대지 않고 살래 사람들의 자부심으로 꾸려가는 축제다.
그 흔적들이 절간 곳곳에 남아 있다. 산문 역할을 하는 천왕문부터 예사롭지 않다. 옛 건물 기둥에 써 붙이는 글귀(주련)는 대개 알기 힘든 한자인데, 실상사 천왕문에는 한글로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는 글귀가 양쪽 기둥을 장식하고 있다. 입구부터 친근감이 느껴진다.
경내로 들어서면 사찰이 보유한 유적마다 국가유산청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옆에 인월중학교 학생들이 쓴 ‘청소년이 만든 문화재 안내판’이 함께 있다. 보광전 앞 석등에 대해 공식 안내판은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라며 다소 딱딱하게 시작하지만, 청소년 안내판은 ‘우리나라에서 계단이 남아 있는 유일한 석등이다’라고 운을 뗀다. 석등보다 석등 앞 계단이 더 궁금했던 모양이다. ‘높은 석등에 불을 붙이기 위해 사용한 계단’이라는 용도가 공식 안내판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런 눈높이 안내판이 사찰의 주요 유적에 모두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 철불이 봉안된 약사전 뒤편 작은 대나무숲에는 허리 높이에 붉은색 실이 둘러져 있다. 대숲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기왓장으로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상징물(푸렁이)이 장식돼 있다. ‘들숨에 전쟁의 어두운 기운을 들이마시고, 날숨에 내 안에 생명평화의 기운을’이라 쓴 기왓장도 보인다. 정재철·황연주 작가의 ‘대숲법당 바람그물’이다. 실상사에서 지리산프로젝트로 해마다 선보이는 작품 중 하나다.
사찰 서편 극락전 마당에는 개망초가 하얗게 덮였고, 흙 담장 아래에 원추리가 듬성듬성 꽃을 피웠다. 자연 그대로 극락정토를 구현한 ‘돌꽃길’이라는 작품이다. ‘빛나라 젊음도 늙음도, 삶도 죽음도.’ 기왓장의 문구가 무심하게 펼쳐진 생명의 풀꽃 밭으로 발걸음을 안내한다.
절간과는 도대체 어울리지 않을 철재 건물에는 ‘우주예술창고’라는 작품명이 붙었다. 외벽에 우리 사회에서 대립하는 좌우 단체의 상징 로고가 뒤틀려 표현돼 있다. 창고는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는 공간이다.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주적 원리에서 보면 심각하게 보이는 세상사 갈등이 초라하고 부질없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에 기와 조각과 널돌로 투박하게 쌓은 탑이 보인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파편으로 쌓은 ‘옛기와탑’이다. 역사의 조그만 편린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실상사의 철학이 쌓인 탑이다. 바로 옆 목탑지에는 돌로 만든 소박한 솟대가 세워져 있다. 큰돈 들여 근사하게 복원하지 않아 오히려 ‘생명평화’를 중시하는 사찰의 소박한 기품이 느껴진다.
실상사는 인근에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3개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실상사에서 찻길로 5㎞ 정도 떨어진 백장암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파를 이뤄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사찰이다. 백장(百丈)은 8세기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파한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 이름이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규칙을 정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백장암에 들어서면 종무소 외벽에 가지런히 걸린 밀짚모자가 눈길을 잡는다. 무더위에도 울력에 나선 스님과 보살의 노고가 엿보인다.
백장암은 단아함이 돋보이는 암자다. 대웅전 앞에 각각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석등이 자리 잡았고, 그 앞으로 역대 스님들의 사리탑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마당은 정원처럼 초록 잔디로 덮여 있다. 대웅전 처마에 서면 삼층석탑 뒤 형제봉 좌우로 연결되는 지리산 능선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약수암은 실상사에서 불과 2.6㎞ 떨어져 있다. 도로가 개설돼 있지만 대부분 비포장이어서 오히려 걷기에 좋은 길이다. 경사도 완만한 편이어서 숲길 산책 겸 느긋하게 다녀올 수 있다. 거의 전 구간에 시원한 나무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약수암은 전각보다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유명하다. 천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무로 조각한 탱화다. 가로 183㎝, 세로 181㎝ 정사각형에 가까운 탱화는 정조 6년(1782)에 제작됐다. 하단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현보살과 세지보살,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을 배치했다. 상단에는 석가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 월광보살과 지장보살,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정교한 조각에 금박을 입혀 설명이 없으면 나무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다. 목각탱화는 암자의 유일한 불전인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다. 조심스럽게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 알현할 수 있다.
약수암에서 건너편으로는 투구봉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걸린다. 실상사에서 산중턱까지 다랑논을 사이에 두고 하황, 중황, 상황마을이 터를 잡고 있다. 지리산둘레길 등구재로 이어지는 마을길이 넉넉하면서도 정겨운 풍광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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