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연예계 사생활 뒤지던 '나쁜 펜'… 원한 살해에 꺾였나

[세계의 콜드케이스]
<84>1944년 인도 라크슈미칸탄 살인사건
연예인 협박 일삼던 기자, 괴한 피습에 사망
원한 샀던 배우들 용의선상에… 영화계 '발칵'
엉성한 수사·재판, 뒤집힌 자백… 끝내 무죄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지난해 6월 23일 인도 동남부 첸나이의 한 어촌 풍경. AFP 연합뉴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전후 혼란스러웠던 1947년 4월의 어느 날 인도 마드라스(현 첸나이) 고등법원. 이날 재판에 온 인도인의 관심이 쏠렸다. 배우 티야가라자 바가바타르, 배우 겸 제작자 NS 크리슈난 등 당대 인도 최고의 영화계 거물들이 모인 까닭이다. 이들은 한 잡지사 기자 청부살인을 교사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항소한 상태였다.

재판 결과는 '증거불충분' 무죄. 지저분한 연예계 추문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던 추악한 펜이 80년 가까이 미제 살인 사건 파일에 갇히는 순간이었다.

'황색 저널리즘 황태자'의 죽음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 동남부 최대 도시 마드라스에는 일본군을 피해 몰려든 동남아 출신 난민들이 넘쳤다. 마드라스 지방정부는 국민의 동의 없이 영국령 인도제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든 데 대한 항의로 해산했고, 영국인 주지사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독립 열망이 거세지던 혼돈의 시기다.

CN 라크슈미칸탄(당시 50세)이 칼에 찔려 사망했다는 소식은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타블로이드지 '시네마 투투'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황색 저널리즘의 황태자'로 불렸다. 영화배우와 연예인들의 부정한 성추문부터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거침없이 파헤쳤고, 떠도는 '뒷소문'까지 적나라하게 보도해 독자들을 끌어모았다.

사회 고발의 주역이자 민족주의의 대변자로 떠오른 영화인들에게 높은 도덕성 잣대를 들이밀던 게 당대 인도 사회 분위기였다. 이들의 부정을 고발하는 라크슈미칸탄식 '징벌'이 대중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열혈 팬들은 그를 가리켜 '도덕적 타락에 맞서는 십자군'이라고 칭했다.

문제는 그가 저널리즘의 정도(正道)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근거 없는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왜곡 보도가 일상이었고, 노골적인 성적 묘사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를 쓰고는 당사자에게 초안을 보여주면서 협박도 일삼았다. 기사를 안 내보내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먹잇감이 된 연예인들이 정부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시네마 투투가 폐간됐는데, 라크슈미칸탄은 주간지 '힌두 네산'을 인수해 일을 계속했다. 그때부터 그의 기사는 더욱 '매운맛'이 됐다.

라크슈미칸탄의 테러 사건을 다룬 인도 현지 매체 인디안익스프레스의 1944년 11월 8일 당시 신문 기사. 위키피디아

용의선상 오른 당대 '톱스타'

적을 많이 만든 탓일까. 1944년 10월 19일 집 근처 길을 걷던 라크슈미칸탄은 괴한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칼에 베였지만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라크슈미칸탄은 한 지역신문사의 직원이었던 바디벨루를 괴한이라고 지목했다. 화가 단단히 난 그는 바디벨루를 고소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주가 지난 같은 해 11월 8일 아침 변호사와 만나 고소장을 작성한 라크슈미칸탄은 릭샤(현지 운송 수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또 다른 괴한을 만났다. 이번에는 두 명이었다. 괴한들은 단검으로 복부를 찔렀다. 인근 종합병원으로 옮겨진 라크슈미칸탄은 이튿날 신장 손상으로 인한 2차 쇼크로 사망했다.

맨 먼저 체포된 건 역시 바디벨루였다. 이어 그와 함께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나갈링감이라는 사내도 붙잡혔다. 경찰은 이들이 용병일 뿐, 배후는 따로 있다고 보고 라크슈미칸탄이 생전 원한을 샀던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했다.

바가바타르, 크리슈난이 체포된 것도 이때였다. 바가바타르는 인도 남부 타밀 영화계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사하던 배우 겸 가수였고, 크리슈난은 배우 겸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면서 '인도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라크슈미칸탄의 악의적 기사로 갈등을 빚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뒤로도 영화감독부터 라크슈미칸탄의 경호원까지 총 9명이 줄줄이 체포됐다. 대부분 라크슈미칸탄의 보도로 직간접적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바가바타르와 크리슈난이 금전적 대가를 약속해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각각 동선 파악부터 연락·지원·실행조로 나뉘어 라크슈미칸탄 살해 계획을 꾸렸다고 경찰은 의심했다.

당대 인도 최고의 배우였던 티야가라자 바가바타르. 위키피디아

유무죄 가른 건 '허위 진술'

하지만 경찰이 별다른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수사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랬던 경찰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피의자 중 하나, 자야난단이라는 사내의 진술이었다. 그에게는 잘나가던 배우 여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한때 라크슈미칸탄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앙갚음을 위해 나머지 9명과 뜻을 모아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사건 전날 모여 살인을 공모했으며 바가바타르와 크리슈난이 착수금과 성공 보수로 얼마를 주기로 약속했다는 구체적인 내용도 줄줄이 털어놨다. 그러다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에 빠져나왔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검찰은 1945년 1월 자야난단을 뺀 나머지 8명을 청부 살해 및 살인 공모 등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 과정은 신통찮았다. 증거로 채택된 자야난단의 진술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진 탓이다. 자야난단은 정작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자신의 자백이 '경찰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야난단의 진술에만 의존해 재판까지 온 수사가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판사는 자야난단에게 "진술을 철회하면 기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야난단은 "그렇다"고 답했다. 수사 단계에서 '기소 면제' 약속을 대가로 한 거래가 있었음을 암시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재판은 계속 이어졌다. 혐의를 부인하는 피고인들의 알리바이 주장은 석연찮은 이유로 기각됐다. 1945년 5월 1심 배심원단은 6대 3 다수의견으로 최종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 시작 후 불과 22일 만. 속전속결이었다. 바가바타르와 크리슈난 두 사람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심지어 자백을 취소한 자야난단도 다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처음부터 허점투성이였던 재판이 마지막에는 모순으로 끝난 셈이다.

'인도의 찰리 채플린'이라고도 불렸던 영화배우 겸 코미디언 NS 크리슈난. 위키피디아

법정 다툼 끝에 무죄 석방

이 재판을 바라보는 인도 사회 분위기는 복합적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인도의 영화산업을 독립을 부추기는 저항세력으로 봤다. 경계 대상이었던 톱스타들의 수감이 나쁠 게 없었다는 얘기다. 마드라스 지역사회의 기득권층은 껄끄러운 재판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시중 여론은 달랐다. 지배계층의 외압에 의해 주먹구구식 재판이 이뤄졌다며 들끓기 시작했다.

바가바타르와 크리슈난은 수년간 항소하면서 끈질기게 무죄를 주장했다. 항소심에서 기각되자 이들은 또 불복해 상고했다. 당시 영연방 속령이었던 인도의 최종심 심판 권한은 영국 대법원, 즉 상원 추밀원 사법위원회에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인도가 독립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에서 사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대신 하급심에서 증인 심문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재판은 이전과 딴판이었다. 엉성했던 공소 사실이 하나둘 기각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라크슈미칸탄의 직접적인 사인이 테러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테러 후 라크슈미칸탄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실수로 신장을 메스로 찔렀을 수 있다는 전문가 소견이 나온 것이다. 판사 중 한 명은 범행에 쓰인 단검을 놓고 "쥐 한 마리도 죽일 수 없는 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47년 4월 마드라스 고등법원은 결정적으로 자야난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마드라스는 요동쳤다. 영화계 거물들의 석방을 환영하며 무수한 군중이 교도소 앞에 모이면서 일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망가진 스타들, 비참한 말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끝은 비참했다. 크리슈난은 계속 코미디언으로 무대에 섰다. 감옥 생활은 그의 개그 소재가 됐다. 새 영화도 찍었다. 하지만 몇 년간 막대한 소송 비용을 대느라 그는 파산한 상태였다. 석방 10년 뒤인 1957년 8월 30일 그는 아내를 빈곤 속에 남겨둔 채 간염으로 죽었다.

바가바타르도 다시 연기를 시작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그 역시 빈털터리 신세였다. 끝내 영화계를 완전히 떠나 콘서트, 축제, 결혼식을 전전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후 1959년 11월 1일 급성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슈퍼스타가 숨을 거둔 장소는 모두 마드라스의 한 종합병원이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끈질기게 자신들과 싸웠던 라크슈미칸탄이 유명을 달리했던 곳이기도 했다.

위용성 기자 up@hankookilbo.com